소설리스트

0과 1-89화 (89/293)
  • 89.

    “경도 잘 들어가. 어마마마께 안부 인사를 부탁해.”

    “예, 전하.”

    호위 기사가 가슴에 주먹을 얹었다. 이어서 병사들이 예를 표했다. 덕분에 우리에게 관심 없던 사람들이 한 번씩 이쪽을 쳐다봤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어서들 가.

    병사들이 빠져나간 자리로 다른 사람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합격했어? 명단에 있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지나쳤다.

    병사들이 재촉하는데도 도트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안 가고 저러고 있는 거야.

    난 멋지게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내가 들어가야 도트가 떠날 것 같아서.

    그런데 제대로 걷는 게 가능하지가 않았다.

    “전하!”

    알렉스가 외쳤다. 순식간이었다. 그를 잠깐 놓친 사이 사방이 사람들로 휩싸였다. 난 압착기에 끼인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어? 내 의지와 관계없이 몸이 훌쩍 들리더니 앞으로 쭉 빨려 들어갔다.

    사람들이 고장 난 레일처럼 나를 앞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비명과 신음이 사방에서 들렸다. 모든 사람이 꼼짝도 못 하고 만원 전철에 탄 것처럼 휩쓸려 가고 있었다.

    내 옆으로 문기둥이 보였다. 아카데미 정문을 통과하기 직전이었다.

    어어?

    사람들이 들썩였다.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알렉스가 뒤에서 손을 뻗었다. 내 허리를 잡아챘다.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날 어깨 위로 훌쩍 들어 올려서, 사람들에게 밀리는 건 피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거대한 흐름이 알렉스까지 덮쳤다.

    나와 알렉스는 정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람들이 신음했다. 퇴근 시간 지하철…….

    알렉스의 손이 날 무식하게 잡고 있어서 옆구리에 멍이 들 것 같았다. 발이 허공에 떠 있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차라리 내 발로 걷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 떨어지면 누구든 밟을 것 같다.

    알렉스를 붙잡고 늘어졌다. 내 몸무게가 감당이 될까? 알렉스가 넘어지면 어떡하지?

    “괜찮으십니까, 전하? 어디 다치셨습니까? 아,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시면…….”

    알렉스가 말했다.

    웅웅거리는 소리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몸이 움직이고,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게 맞닿은 피부로 느껴졌다.

    혼란한 시야로 아카데미 정문 기둥이 지나갔다.

    아카데미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넓어진 공간으로 빠져나갔다. 이제야 숨이 쉬어졌다. 와, 이게 뭐야.

    얼이 빠졌다. 게임에 들어온 뒤 이런 인파에 둘러싸인 건 처음이었다. 여기서 깔려 죽는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나? 안전 요원을 세워 둬야 하는 거 아닌가?

    알렉스는 여전히 나를 쌀 포대처럼 들고 있었다. 난 알렉스에게 내려 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꺄악!”

    앞을 안 보고 다가오던 누군가가 내 등에 부딪혔다. 상대가 넘어졌다.

    놀란 알렉스가 나를 놓쳤다. 미끄러지듯 알렉스의 몸에서 떨어져, 바닥에 발을 디뎠다.

    “죄송합니다, 전하.”

    알렉스가 사과했다.

    아니, 먼저 챙길 사람이 있지 않나?

    “괜찮아? 안 다쳤어?”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려는데, 상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에 떨어진 짐. 찡그린 얼굴.

    거대한 리본.

    여주인공이잖아?

    난 고개를 휙 돌렸다.

    * * *

    그레이 크래커는 이 시장통 같은 아카데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아침부터 합격 발표를 보러 올 계획이 없었다.

    그가 합격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아침부터 사람들 틈에 끼어 고생해야 한단 말인가? 하인을 보내 확인하고 오라고 시키는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물론 그레이는 하인을 시킬 생각도 없었다. 하인들은 그레이의 짐을 아카데미 앞까지 옮겨 놓기만 하면 됐다.

    그레이의 합격은 기정사실이니까. 그레이는 쓸데없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레이만큼이나 합격 발표를 확인할 필요 없는 에드워드 왕자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식사했다.

    그는 빵에 잼을 듬뿍 발라 먹고 있었다. 흘러넘친 잼이 접시로 떨어졌다. 빵을 먹는 건지 잼을 먹는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덕분에 그레이는 원래 없던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는 차로 입만 축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주인의 침실 문을 두드리는 저 눈치 없는 사용인이 누굴까 생각하며.

    “들어와.”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레이는 에드워드 왕자가 곧 사용인을 다시 내보내리라 생각했다.

    사용인은 곧장 다가와 에드워드에게 무언가를 보고했다. 그레이는 에드워드의 표정을 지켜봤다.

    에드워드가 빵 칼을 내려놓고 손수건에 손을 닦았다.

    “나가자.”

    “……지금요?”

    “지금.”

    그레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그리고 이 상태였다.

    이 나라 사람의 절반쯤은 이곳에 모여 있는 게 아닐까? 그레이는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에드워드에게는 전부터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에드워드는 터무니없는 짓을 하곤 했는데 그레이는 그를 굳이 말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레이는 그때 에드워드 왕자를 관찰하고 있었으니까. 왕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고 알아 갈수록 이상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에드워드 왕자는 커 가면서 점점 이상해져서, 전장에 나갈 즈음에는 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레이와 에드워드는 아카데미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레이는 배정된 기숙사 방을 알아보기 위해 에드워드와 떨어졌고, 인파에 휩쓸린 조프리 왕자가 아카데미 정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조프리는 알렉스에게 안겨서 보호받고 있었다. 알렉스는 한 팔로 조프리를 안고 다른 팔로 사람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레이는 어이가 없었다. 왕족의 위엄 같은 건 전혀 없지 않은가? 기사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꼴이라니.

    연회장에서 알렉스에 대해 언급했을 때는 모르는 척하더니.

    조프리가 어설픈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했다. 그가 의뭉스러운 것도 마찬가지로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휩쓸리듯 아카데미에 들어온 조프리는 알렉스와 얼굴을 붙이고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잠시 둘을 바라보다가 떨쳐 내듯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다. 에드워드가 왜 이 시간에 나왔는지는 알겠지만, 글쎄.

    “꺄악!”

    “괜찮아? 안 다쳤어?”

    비명 소리가 그레이의 이목을 다시 잡아끌었다. 그레이는 조프리를 돌아봤다.

    조프리는 넘어진 여학생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가 할 만한 행동이었다.

    연회장에서도 저런 짓을 하곤 했었지. 조프리는 연회에 자주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가 연회장에 나타나면 종종 저런 상황이 펼쳐졌다.

    그때 조프리가 갑자기 굳어서 뒤로 물러섰다.

    손을 잡으려던 여학생이 헛손질을 했다.

    “……저기요?”

    여학생이 언짢게 물었다.

    “아, 미안해. 정말로. 혼자 일어날 수 있겠어?”

    조프리는 여학생을 쳐다보지 않았다. 부자연스럽게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난 거기에 없는데.”

    여학생은 ‘왜 반말이야?’ 하는 어투로 내뱉었다.

    그레이는 저도 모르게 왕자 전하, 하고 조프리에게 접근할 뻔했다.

    알렉스가 눈치 있는 귀족이라면 자연스럽게 조프리의 신분을 흘릴 것이다. 앞으로 얼굴 보고 지내야 할 귀족이 조프리에게 반말을 하게 둬선 안 됐으니까.

    아카데미가 아무리 학생 간의 평등을 강조한다고 해도 학교 밖 신분이 어디 가진 않는 법이었다.

    평민은 아무리 잘해도 평민.

    귀족과 맞먹으려 들지 않았고 그건 왕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이 공부에 있어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고 해도, 교실에서 왕족을 경칭 없이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왕자 전하는 왕자 전하다.

    하지만 알렉스는 귀족의 눈치 따위는 기르지 못했다.

    조프리 왕자는 품위 없게 주저앉아 여학생의 짐을 줍기 시작했다. 저럴 줄 알았어! 그레이는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는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똑같이 쭈그려 앉았다.

    그럴 게 아니라 왕자를 먼저 일으켜야지! 그레이는 끼어들고 싶어 손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시종은 어딜 간 거지? 저 꼴을 안 말리고? ……아카데미는 시종을 허용하지 않았지!

    그레이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프리 왕자 앞에 몸을 낮추고 짐을 빼앗아 들었다.

    “조프리 왕자 전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기숙사 방은 확인하셨나요?”

    “그레이?”

    그레이는 짐을 여학생에게 떠넘겼다. 두 팔로 짐을 받은 여학생은 미간을 좁히더니 조프리를 쳐다봤다.

    “왕자 전하?”

    조프리 왕자는 그녀를 외면하다가, 이내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응. 미안. 다 주운 거지? 혹시 망가진 물건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배상할게.”

    어색한 미소였다. 말투마저 어색했다. 책을 읽나?

    왕자는 긴장하고 있었다.

    긴장할 만한 상대인가?

    그레이는 여학생을 쳐다봤다. 여학생의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입술, 전체적으로 미인형인 얼굴을 뜯어봤다.

    미인이라고는 해도 그레이에게는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왕성을 드나들며 눈이 끝 간 데 없이 높아져 있었다.

    어떤 미인인들 에드워드만 하겠는가? 왕과 왕비도 인상적인 미모의 소유자인 데다가 조프리 왕자 역시 단정한 외모였다.

    그레이가 다시 조프리를 쳐다봤다. 그는 여학생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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