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88화 (88/293)
  • 88.

    “아카데미에선 안 그럴게.”

    난 일단 도트를 달랬다.

    “왕자니이이이임……. 정말로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약속하셨어요!”

    도트는 나를 붙잡고 한참 신신당부를 했다.

    아카데미에 가면 아무나 침대로 끌어들이지 마라, 행동을 조심하셔야 한다, 아카데미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아느냐, 왕자님은 정말로 위험하다…….

    “……로웰 님이 처음 수작 부렸을 때 알려 드렸어야 했는데. 왕자님, 명심하셔야 해요. 왕자님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거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변태예요!”

    로웰이 바람둥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무릎 꿇고 정자세로 앉아 있던 알렉스가 “로웰 님? 수작?” 하고 고개를 들었다.

    “바움쿠헨 경도 기억해 두세요. 왕자님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이 세상엔 많으니까요.”

    “예, 도트 님.”

    “특히 왕자님께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그러겠습니다.”

    얘가 이상한 거 배우면 안 되는데. 바움쿠헨 백작이 알렉스에게 성교육을 했을까?

    아닐 것 같았다. 알렉스가 성교육을 이상하게 받기 전에 도트를 막아야 하는데.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도트는 조프리가 열일곱이 아니라 일곱 살이라도 되는 듯 걱정했다. 그가 너무 전전긍긍하는 나머지 그만 좀 하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난 도트에게 네 말대로 다 하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씻으러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아침 해가 높이 뜬 지 오래였다.

    옷을 갈아입고 복도로 나갔다. 다른 방에서 묵고 있던 병사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한순간 복도가 꽉 찼다.

    “아카데미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호위 기사가 말했다. 내 외출이 잦아진 시기부터 왕비님이 붙여 준 사람이었다. 몇 년간 얼굴을 보아 와서 낯이 익었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내 시장행에 동행해 짐꾼 역할을 하느라 나에 대한 감정은 별로 안 좋을 거였다. 하지만 왕비님이 내게 붙여 준 사람답게 인내심이 강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먼저 돌아가도 되는데.”

    “아닙니다. 기숙사 입소하는 데까지 전하를 보호하라고 왕비님께 명받았습니다.”

    “그래. 알았어.”

    왕비님의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기사도 병사도 사복 차림이었지만, 덩치 큰 남자들이 우르르 내려가는데 이목이 안 모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병사들의 행동엔 묘한 절도가 있었다. 1층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여관을 가로질렀다.

    사람들 가운데는 로웰과 파벨도 있었다. 파벨이 내게 다가오려는데 알렉스와 호위 기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입니까?”

    호위 기사가 물었다.

    “아니, 왕자 전하께 인사를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전하, 검을 물려 주십시오.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세요.”

    파벨이 버벅거렸다. 그 목소리가 꽤 컸다.

    아침 여관은 식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인구 밀도에 비해 몹시 조용했다. 파벨의 목소리가 사방에 퍼지기 좋은 조건이었다.

    “왕자 전하?”

    “왕자님? 어디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내 또래의 학생이 일어났다. 병사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나를 보려고 발꿈치를 치켜들었다.

    그게 신호탄이었다. 한순간에 여관이 시끄러워졌다. 테이블에서 벌떡벌떡 일어난 사람들이 의자와 테이블 위로 올라가 나를 구경했다.

    병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다.

    반사적으로 방긋 웃었다. 조프리 모드로 미소를 만들며 앞사람에게 “미안해, 지나갈게.” 하고 말했다.

    입을 연 뒤에야 또 사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앞이라 도트는 별말 없었다. 속으로 ‘왕자님, 품위 유지!’ 같은 생각은 하고 있겠지만.

    로웰이 파벨을 걷어차고 있었다. 말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보통 왕자가 묵는 여관이 이렇게 북적거리면 눈치를 챌 만도 한데. 로웰 친구면서 그 눈치를 어디 팔아먹는 걸까? 두 사람의 눈치를 평균 내면 평범한 귀족 수준은 되겠다.

    나와 병사들은 우르르 아카데미로 몰려갔다.

    아카데미로 다가갈수록 병사들을 물리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표를 기다리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파도처럼 몰려들어서, 아카데미 정문은 병목 현상을 호소하고 있었다.

    저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안 나는데.

    가만히 있어도 교통사고가 날 것 같은 곳이었다. 병사들이 없었다면 이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었을 것이다.

    다들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카데미 앞에 카페가 왜 저렇게 많은가 했더니 지금 카페도 가득 차 있었다.

    어디 앉아 쉴 곳도 없었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 짐 다 뺐는데.

    조프리를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하던 사람들을 떠올리니 영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돌아가 봤자 시선이나 다시 받을 텐데.

    “왕자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고 돌아올게요.”

    도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온몸으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트, 잠깐…….”

    “흐아아아아!”

    도트의 기합이 저 멀리 사라졌다. 흡사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듯한 비명이었다.

    괜찮은 거 맞나? 고개를 빼들고 사람들 사이를 살피는데 저 멀리서 파도를 타듯 도트의 머리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도트의 시체가 떠다니고 있는 거 아닌가?

    “구하러 안 가도 돼?”

    “전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알렉스가 당황해서 말했다. 말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내 옆에 딱 달라붙었다. 여차하면 붙잡을 수 있게.

    나도 알아. 내가 들어가 봐야 병사들 분실물 찾기나 시작되겠지.

    그래서 도트와 친해진 알렉스에게 물어본 말이었는데, 알렉스도 저 안에 휩쓸릴 각오는 없는 듯했다.

    도트는 한참 뒤에 나타났다. 여전히 제 발로 걷는 모습이 아니었다. 도트는 급류에 휩쓸리듯 반짝 모습을 드러냈고, 다음 파도에서는 우리를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도트가 팔을 높이 들었다. 검지와 엄지를 붙이고 동그라미를 만들고 있었다.

    합격했다고?

    도트의 얼굴은 새빨갰는데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합격했구나.

    안도감이 찾아왔다.

    “합격했대.”

    알렉스를 쳐다보자 그는 기둥처럼 단단히 서서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예.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알렉스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내가 합격할 거라고 믿고 있었고, 도트가 가져온 소식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도 나를 못 믿는데.

    주변의 소음이 평온하게 느껴졌다.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아카데미 합격 정도는 해야지.

    난 휩쓸려 가려는 것도 될 대로 되라고 손을 놓으려는 것도 아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바꾸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정문에서 툭 튀어나온 도트는 누군가 거대한 손으로 주물럭거리다 던져 버린 듯한 몰골이었다.

    “도트, 괜찮아?”

    “물론이죠, 왕자님! 왕자님이 합격하셨는걸요! 이 기쁜 소식을 성에 전해야겠어요.”

    “그래. 왕비님께 잘 말씀드려.”

    “예?”

    도트가 당황했다.

    “제가요? 왕비님께?”

    말이 잘못 나왔다. 이 소식을 기뻐할 분이라면 왕비님밖에 안 떠올라서.

    “아, 누구한테 전할 생각이었어?”

    “다른 시종들이랑 궁인들이요! 다들 얼마나 기뻐할까요!”

    “아, 그래…….”

    어쩌라는 반응이 돌아올 것 같은데. 아무튼 도트 마음이니까.

    “합격한 학생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기숙사로 안내해 드립니다!”

    안에서 교직원이 외치는 소리가 이제야 들렸다. 웅웅거리는 소음 탓에 귀가 먹먹하고 중심을 잡을 수 없었던 건 불안 때문이었나 보다.

    “이제 들어갈게.”

    도트에게 말했다. 호위 기사와 병사들을 차례로 돌아보고, 병사에게서 짐을 받았다.

    처음 챙겨 온 짐 가방은 여러 개였지만 여관에서 하나로 줄였다. 옷이나 기타 필수품은 근처에서 사면 되니까.

    조프리의 물건 중에 내가 꼭 가져가야 할 물건은 몇 개 없었다. 조프리 방에 남겨 두기 뭐한 것들.

    소원의 상자라거나. 그런 것만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다들 잘 지내. 방학 때 올라갈게.”

    “왕자님…….”

    도트는 금방 힘이 빠졌다.

    의외였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도트와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나도 약간 긴장이 됐다.

    도트를 떼어 놓고 생활해 본 적이 언젠지 기억나지 않았다. 생활 전반에 도움을 받아 왔다. 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시종이었다.

    없어도 알아서 잘 살겠지만.

    시종 캐릭터가 왜 이렇게 끈끈한 느낌으로 표현되는지 알 것 같았다. 애초에 시종과 왕자의 관계가 그랬다. 이렇게 십여 년을 붙여 놓으면 상대가 끔찍하게 싫지 않은 이상 정이 들 수밖에 없겠다.

    도트가 조프리에게 과한 충성심을 보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지 모른다. 도트는 몇 살부터 조프리랑 지냈던 거지?

    이제 와서 궁금해해 봤자지만.

    “안녕, 도트.”

    “왕자님…….”

    도트의 코가 빨개졌다. 알렉스는 나와 도트를 번갈아 보며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왕자님을 잘 부탁드려요, 알렉스 경.”

    도트는 잠깐 훌쩍이더니 씩씩하게 말했다.

    “예. 걱정 마십시오.”

    알렉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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