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87화 (87/293)
  • 87.

    “그래? 나는 영민하니까 시험 걱정은 안 할 줄 알았어?”

    웃으며 묻자, 알렉스는 뺨을 붉혔다.

    “예.”

    “어떡하지. 엄청 걱정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귀여울까? 그레이랑 비슷한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알렉스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그리고 떨어져도 시험은 다시 응시하면 되니까요.”

    “어?”

    “예?”

    알렉스가 당황했다.

    “혹시 아카데미는 재시험이 허용되지 않나요?”

    “아니.”

    “그러면……?”

    뭐가 문제냐는 듯 알렉스가 쳐다봤다.

    그렇지. 시험에 떨어지면 다시 응시하면 되지. 매년 열리는 시험이니까. 입학 못 한다고 누가 쫓아와서 죽일 것도 아니고.

    어?

    뭔가 엄청나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조프리가 아카데미에 없으면 안 되지. 공략 캐릭터잖아?

    조프리는 아카데미에서 ‘반드시’ 여주인공을 만나고, ‘반드시’ 에드워드와…….

    강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 이상한 기분은 느껴 본 적 있었다. 내 것이 아닌 생각이 나를 지배하는 감각.

    어린 조프리의 기억을 꿈에서 봤을 때. 그의 감정과 생각이 너무 생생해서 나와 그를 구별할 수 없었다.

    “전하?”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휴식이 필요하신가요? 얼굴이 붉어요.”

    “그러게. 자야겠어.”

    조프리?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조프리는 아카데미에 ‘가야 한다’. 지구는 ‘돈다’.

    둘이 같은 수준의 과학적 사실로 느껴졌다.

    두 개 모두 진행되고 있거나 진행되어야만 하는 사실이고, 나는 이미 그걸 알고 있는 것처럼.

    에드워드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으면, 난 아카데미에 떨어지는 편이 나았다. 아카데미 입시에 실패하는 왕자는 되게 멍청해 보일 테니까.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으면 에드워드도 여주인공도 만날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나를 미워하는 건 그대로겠지만, 날 죽이고 싶어지는 촉매제는 피하는 셈이다.

    그런데 왜 난 그렇게 열심히 시험을 봤지?

    위화감을 한번 깨닫자, 모든 게 이상해졌다.

    그냥 내가 멍청해서인가?

    알렉스가 보였다. 내가 오늘 까맣게 잊고 아카데미에 두고 온 알렉스…….

    가능성 있었다.

    됐다. 쉬자.

    난 침대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었다. 피곤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씻지도 않고 누워 버리려다, 두 팔로 몸을 지탱했다. 아직도 대답을 못 들었다.

    “알렉스, 용서한 거야?”

    “예? 무엇을요?”

    내 신발을 정리하던 알렉스가 쭈그려 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

    “……너 내 말 안 들었지.”

    “아닙니다, 전하.”

    “근데 왜 자꾸 못 알아들은 척해…….”

    알렉스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 오늘 일이요. 제가 용서해야 합니까?”

    “어?”

    잠이 확 깼다.

    그렇게 화난 거였어? 용서도 못 하는 거야?

    “전하께서 용서를 구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알렉스는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만족스러운 듯 일어났다.

    으응?

    “왜?”

    “용서를 한다는 건, 상대가 벌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 처벌하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요?”

    “그…… 렇지? 아니, 아닌가? 상대가 화날 만한 일을 했을 때도 사용하지 않나?”

    “예. 전하께서는 벌받을 일을 하시지도 않았고 저를 화나게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알렉스가 명쾌하게 말했다.

    정말?

    너 성격 너무 좋은 거 아냐?

    고아원 일을 용서했을 때도 느꼈는데 알렉스는 엄청난 대인배였다. 얘 진짜 어떡하지? 너무 착해서 무서운데.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 떠오르면 서운할지도 모르잖아. 뭐 원하는 거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들어줄게.”

    “예? 없습니다.”

    “고민이라도 해 봐.”

    알렉스는 불붙은 초를 협탁 위에 올려놓고 내 밑에서 이불을 빼냈다. 난 번갈아 가며 다리를 올렸다. 알렉스가 쉽게 빼낼 수 있게.

    어설프게 내게 이불을 덮어 준 알렉스가 “그러면…….” 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전하의 침실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내 침실?”

    “예.”

    알렉스가 내 표정을 살폈다.

    “침실이라니, 여기? 여기서 날 지키겠다고?”

    “예.”

    그게 왜 선물이 되는 거지?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예.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뭐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 경비가 신경 쓰였어? 허술할까 봐?”

    “예. 지난밤에도 여차하면 전하를 지킬 수 있게 방비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옆방이어서 반응이 늦으니까요.”

    알렉스가 긴장을 풀고 미소 지었다.

    “어젯밤에도 방비하고 있었다고? 어제 잠 안 잤어?”

    “예.”

    난 기가 막혀서 알렉스를 쳐다봤다. 내 기사가 되어 준다는 애가 충실한 사람인 건 정말 좋지만.

    “그럼 몇 시간을 깨 있는 거야?”

    알렉스는 그걸 또 계산하려고 했다. 난 그가 피곤한 머리를 혹사시키기 전에 침대 옆을 툭툭 쳤다.

    “누워.”

    “전하?”

    “빨리 눈 감고 자. 이제 벽 하나 사이에 둔 것도 아니고, 같은 침대에서 날 지키는 거니까 신경 곤두세울 필요 없잖아.”

    “하지만…….”

    알렉스가 머뭇거렸다. 왕자랑 같은 침대에서 어떻게 자냐는 거겠지. 뭘 새삼스럽게?

    “어릴 적에도 같이 잤잖아. 왜, 불편해? 그럼 이 방 어디에 있을 생각이었어?”

    “침대 옆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하.”

    “침대 옆? 어디?”

    이 방에는 시종을 위한 작은 의자도 없었다. 일인용 안락의자가 있었지만 창가에 위치했다.

    앉을 데가 없는데?

    “침대 옆에 서 있으려고 했습니다.”

    알렉스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밤새 무슨 벌서?”

    나 인간쓰레기야? 나는 자면서 다른 사람은 나 지키라고 계속 세워 놓게?

    날 뭘로 아는 건지 모르겠다. 알렉스한테 특별히 못되게 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물론 아카데미에 버리고 갔지만!

    “예? 아닙니다. 호위가 앉아 있으면 이상하니까요.”

    상식적인 척하지 마. 밤새 침대맡에 서 있는 게 훨씬 이상하거든?

    가위눌릴 것 같다. 눈뜨면 알렉스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고 그러는 거 아냐? 숨 막혀서 깰 것 같은데.

    “아니, 공포 영화 같아. 싫어. 빨리 와서 누워.”

    “공포 영화가 뭡니까?”

    알렉스는 여전히 안 눕고 서 있었다.

    “몰라. 잘래. 나 피곤해. 자고 있다가 습격받으면 나 지키지도 못할 실력이야?”

    “아닙니다.”

    알렉스가 정색했다.

    “그럼 같이 자.”

    이불을 걷어 줬다. 침대는 충분히 커서 베개도 세 개나 구비되어 있었다. 두 개는 2인용 침대라서 그렇다 치고 나머지 하나는 어디 쓰라는 걸까?

    알렉스가 꾸물꾸물 다가왔다. 이게 아닌데 하는 얼굴이었지만 왕자의 명령을 거부하진 못했다.

    알렉스에게 베개 하나를 주고 하나는 내가 베고 누웠다. 나머지 하나를 어디 둘까 하다가 나와 알렉스 사이에 놨다.

    “잘 자.”

    알렉스의 대답은 내가 반쯤 잠에 발을 담갔을 즈음에 들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전하.”

    * * *

    “왕자님? 알렉스 경! 두 분 뭐 하시는 거예요?”

    도트의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깼다. 햇빛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도트가 커튼을 걷고 이불은 빼앗아 버린 게 분명했다.

    “도트, 이불 좀…….”

    “왕자님!”

    이불이 없는데 몸이 따듯했다. 도트가 계속 비명을 질렀다. 눈을 감고 버틸 수가 없었다.

    “왜 그래?”

    뻑뻑한 눈을 뜨자 도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울상이었다.

    “왜. 무슨 일이야?”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자, 도트는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 왕자님은 열한 살이 아니라고요! 성년을 앞두고 계신 분이 다른 사람과 함부로 동침을 하시면 어떡해요!”

    “요즘엔 호위 기사랑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동침이라고 해?”

    어이가 없어서 묻자 도트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백 년 전에도 동침이라고 불렀을걸요! 바움쿠헨 경, 믿었는데!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왕자님께 성교육을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해 이런 사태가…….”

    성교육? 조프리 커리큘럼에 그런 것도 있었어?

    “죄송합니다, 도트 님. 하지만 왕자 전하께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그는 당황해서 침대 위에 무릎 꿇고 있었다.

    “맹세는 필요 없어요! 혼기가 다 된 두 사람이 한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누가 믿어 줄 것 같나요?”

    도트는 숨죽여 비명을 지르다 창백해졌다.

    “이런 일이 여관이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일어났다면, 왕자님의 평판이……. 아, 안 돼. 전하, 제가 왕실에서는 필사적으로 소문을 막았지만…….”

    무슨 소문?

    “밖에서 그러시면 큰일 나요. 남색가라고 소문날 거라고요!”

    뭐? 그거 좋은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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