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86화 (86/293)

86.

싱숭생숭한 나를 두고 알렉스는 과일을 깎았다. 그는 토끼 모양으로 자른 사과를 접시에 세팅해서 내게 내밀었다.

“전하, 드십시오.”

사과를 얼마나 주물러 댄 걸까? 토끼 모양이긴 했는데 사과가 묘하게 윤기가 없었다.

꼭 먹어야 돼?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찝찝한 기분으로 입에 넣었다. 짠맛이 나는 것 같은데.

알렉스가 기대하는 시선을 보냈다.

“어떠십니까?”

“맛있어.”

알렉스는 도트를 돌아봤다. 도트는 장인 같은 태도로 팔짱을 꼈다.

“흠. 제 마음 같아선 턱도 없지만, 왕자님이 괜찮다고 하셨으니까요. 노력을 높이 사겠어요.”

“감사합니다.”

“저에게 감사하지 마시고, 여기서 만족하시면 안 돼요. 정진하세요!”

“예, 도트 님.”

알렉스는 사과를 다시 집어 들었다. 더 먹어야 하나? 배 터질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알렉스의 과도는 쓸데없이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사과를 쩍쩍 잘라서 껍질 모양 내는 손길이 경지에 올랐다.

저게 뭐람……. 맞다. 과도도 검이었지.

검술 만렙이라도 찍은 듯한 알렉스가 두 번째 접시를 내 앞에 내밀었다.

배불러…….

난 앙증맞은 사과를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었다.

거리는 시험 끝난 수험생들로 미어터지는데 여관 1층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밖의 소음이 안으로 들어왔다.

식당은 외부로 이어져 있었는데 오늘은 외부 테이블에도 손님이 없었다. 벽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누군가 식당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행을 돌아보며 텅 비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려는데, 어느샌가 나타난 직원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카페테리아에서 식사하고 싶긴 했지만 가게를 전세 내고 싶단 건 아니었는데.

이건 그냥 왕자님 같은 짓 아닌가? 드라마에 나온 재벌이 이런 짓을 했던 것 같다. 걔네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런 거라 로맨틱하기라도 했지.

이 경우에는 그냥 민폐 같았다. 수능일에 식당 하나를 전세 낸 셈 아닌가?

사건의 주모자 도트가 샴페인을 가져왔다. 어려서부터 왕자를 모셔 온 도트는 나보다 훨씬 왕족다운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왕자님이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어’ 같은 생각으로 식당을 빌렸을 게 틀림없었다. 이래서 사람이 말조심하고 살아야 된다.

도트가 내 잔에 샴페인을 따라 주며 신신당부했다.

“왕자님, 한 잔만 드셔야 해요. 더 달라고 해도 안 드릴 거예요.”

마시고 싶다고 안 했거든. 그럴 거면 안 가져오면 되잖아.

하지만 합격 기원 파티에 샴페인이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보고는 한 잔만 마시랬으면서, 도트는 몇 잔을 내리 비웠다.

뺨이 발그레해진 도트가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왕자님, 제가 편지 열심히 보낼게요. 답변 꼭 해 주셔야 해요.”

“그래.”

“내일 왕자님 기숙사 들어가시는 것까지는 도와 드려도 되죠?”

“물론이지.”

도트가 웃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생글생글한 눈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어서,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취했어?”

“아니요, 왕자님. 저 멀쩡해요.”

“올라가서 잘까?”

도트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반응이 굼떴다. 난 도트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평소라면 펄쩍 뛸 도트가 말로만 거절하고 있었다.

“앗, 왕자님. 제 발로 걸을 수 있어요. 어? 계단이 왜 두 겹이지?”

퍽이나 제 발로 걷겠다.

당황한 알렉스가 과도를 놓고 일어났다.

“전하.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됐어. 알렉스, 식사 끝난 거지? 여기 주인한테 다시 손님 받아도 된다고 전해 줄래? 도트, 다리에 힘 좀 줘 봐. 아니면 내가 업어 줘?”

도트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왕자님. 그러시면 안 돼요. 저 제가 걸을 수 있어요.”

꾸물거리는 도트를 계단으로 데려갔다. 자리가 빨리 파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행인들 눈치가 보이고 있었다. 너희 뭐냐는 시선으로 유리창 밖에서 힐끔거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도트가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갔다. 속도에 맞춰 나도 한 계단씩 올랐다. 도트가 헤헤 웃으며 “왕자님” 하고 불렀다.

술 냄새.

“왜?”

“왕자니임.”

코앞에서 도트의 얼굴이 생글거리고 있다.

술주정뱅이.

“왜에.”

술주정뱅이는 상대하는 게 아니다. 적당히 대꾸하고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무게가 덜어졌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뒤에서 따라온 알렉스가 도트를 종이 인형처럼 들어 올렸다. 그는 그대로 도트를 끌고 위층에 도착했다.

도트의 발이 계단에 턱턱 걸리는 건 개의치 않는 듯했다. 엄청난 힘이었다. 다음 날 도트 발이 얼얼할 것 같긴 하지만.

“방에 눕히면 될까요?”

“응. 고마워.”

도트는 2층에 도착한 시점에 이미 반쯤 꿈나라로 가 있었다. 침대에 눕힌 뒤에도 눈을 뜨지 못했다. 인사불성이었다.

이렇게 술에 약할 줄 몰랐는데. 한 번도 술 마시는 모습을 본 적 없으니까.

도트는 성년이 지난 지 오래였지만 그동안 내 곁을 떠날 일이 없었다. 본인도 마셔 본 적 없으니까 이렇게 주량이 약할 줄 몰랐을 것이다.

“왕자님, 가지 마세요.”

잠결에 술주정뱅이가 훌쩍거렸다. 알렉스가 그를 내려다봤다.

도트 몸에 깔린 이불을 빼냈다. 그의 배를 덮어 주고 신발을 벗기려고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알렉스가 도트의 신발을 벗겼다. 신발이 바닥에 툭툭 굴렀다. 알렉스는 나를 돌아봤다.

“더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다 된 것 같은데.”

상황이 반대였다면 도트는 나를 씻기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자가 시종을 씻기는 건 그림이 이상했다.

옷이라도 벗겨 줄까? 저러고 자면 불편할 것 같은데.

“그럼…… 나가실 건가요?”

알렉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상한 질문이었다.

알렉스 앞에서 도트 옷을 벗기는 것도 이상하겠지.

“그래야겠지? 오늘 고생했어. 도트를 올려 줘서 고마워.”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제게 고맙다고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렉스가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안도와 죄책감이 반쯤 섞인 얼굴이었다.

왜? 그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쪽은 나인데.

아까의 일이 다시 떠오르면서 다시 곤란해졌다. 역시 사과를 해 두는 게 좋겠다.

알렉스가 문을 열었다. 난 복도로 나갔다. 알렉스는 내가 배정된 침실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스, 안으로 들어올래? 잠깐 얘기할까?”

“예, 전하.”

알렉스는 선선히 내 침실로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환기를 시키지 않았는지 공기가 약간 텁텁했다. 상관없었다. 난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알렉스. 아까 시험장에서 오래 기다렸지? 머리가 복잡해서 네가 기다리는 걸 잊었어. 정말 미안해.”

알렉스의 표정이 곤란해졌다.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 난 그를 가로막았다.

“왕자한테 사과받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하지 마. 내 기사가 되겠다며. 나한테 익숙해져야 할걸.”

“그게 아니라……. 전하, 고민이 있으셨습니까?”

“응?”

“머리가 복잡하다고 하셔서요.”

“고민이…… 있지? 넌 걱정 안 돼? 시험 붙을 거라고 확신해? 자신만만하네.”

그나저나 아까부터 사과는 안 받아 주고 있는데. 사실 엄청나게 화난 건가?

알렉스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시험에 떨어질까 봐 걱정하고 계셨습니까?”

“보통 수험생들은 다 걱정하지 않나?”

“전하께서 걱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왜? 왕족은 긴장도 안 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는 부류가 많기는 했다. 왕족은 긴장이나 걱정 같은 인간적인 감정과 동떨어진 존재라고.

내가 처음 자선 행사에 참여했을 때도 귀족들은 당연한 듯 다가와서 말을 붙였다. 그때 조프리는 열한 살이었는데.

보통 열한 살 먹은 어린애한테 달려들어 자기소개를 할 때, 애가 의젓하게 받아 줄 거라는 기대는 안 하지 않나?

그런데 진짜 열한 살인 그레이도 어른스레 대응하고 있어서 내가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좀 더 나이가 차서 참석하게 된 사교계 행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프리라는 이름을 걸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왕족으로 살려면 사람을 잘 대하는 성격이어야 하지 않을까? 난 아니었지만.

원래 조프리도 사교성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후천적으로 기른 성격이겠지만.

어릴 적 조프리는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겁 많은 어린애였다. 그 아이가 자라서 ‘사교성 좋은 왕자’라는 평가를 들으려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안 됐을 것이다.

“아니요. 아버지께 들은 말이 있어서…….”

알렉스는 곤란한 듯 말했다. 아버지라면 바움쿠헨 백작?

“무슨 말?”

“전하께서는 저…… 영민하고 선한 분이라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신다고요.”

“그렇게 좋은 말을 해 줬다고?”

바움쿠헨 백작이 칭찬에 후한 성격이긴 했다. 그렇다곤 해도 대부분 날 놀리려는 의도였는데, 알렉스 앞에서도 칭찬을 해 줬던 모양이다.

아마 날 좋게 생각하는 알렉스 때문이겠지만.

“그런 말이 언제 나왔어?”

“제가 왕자 전하의 기사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을 때요.”

네 덕분 맞네.

알렉스는 여전히 바움쿠헨 백작에게 귀여움받는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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