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85화 (85/293)
  • 85.

    “네가 좋아. 너 아니면 앞으로 어디에도 투자하고 싶지 않아.”

    “어……. 저로서는 영광인데요. 제가 혹시 투자의 귀재였나요? 상인 집안 아들이긴 한가 봐요.”

    로웰이 애매한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때마침 점원이 핫 초콜릿 세 잔을 내와서 대화가 끊겼다.

    점원은 잔을 내려놓으며 로웰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로웰은 반사적으로 웃었다. 의식적인 반응이라기보다 척수 반사 같은 걸로 보였다.

    점원은 쟁반을 품에 안더니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봐, 너한테 관심 있는 거 맞는다니까!”

    카운터에 있던 다른 점원이 속삭였다. 그 소리가 좀 컸다.

    “그런가 봐. 어떡해!”

    꺄아아아, 숨죽인 비명이 카운터에서 들렸다.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로웰이 말했다.

    “알아.”

    “하지만 전하, 전하의 시종이 절 노려보고 있어요.”

    도트는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도트가 순진하게 말했다.

    “왕자님. 전 아무나 유혹하는 사람은 불결하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전하, 제가 아무 짓도 안 한 거 보셨잖아요?”

    로웰이 항의했다.

    “왕자님.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래.”

    로웰 정도면 평소 행실도 괜찮지 않나? 일밖에 안 하는 것 같던데.

    시험 전날 술독에 빠졌다 나오긴 했지만.

    “전하…….”

    로웰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전하께 믿음을 드리기 위해 노력해야겠네요.”

    “이미 충분히 믿고 있어.”

    “어떤 믿음인지 정말 신경 쓰이는데요!”

    “내 재산을 맡기고 있잖아.”

    로웰이 눈을 굴리다 빙그레 웃었다.

    “그러네요. 전하의 신임을 받게 되어 영광이에요.”

    “왕자님, 세상엔 능력만 있고 인성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도트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전하…….”

    로웰이 다시 축 늘어졌다.

    로웰의 행실 논란은 카페를 나설 때까지 지속돼서, 점원이 계산하고 나가려는 그를 붙잡았을 때 절정에 달했다.

    “우린 나가 있을까?”

    “네, 왕자님.”

    나와 도트는 카페 밖에서 로웰을 기다렸다. 한참 뒤 로웰이 나왔다.

    “왕자님, 저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소중히 하지 않는 사람은 벌받는다고 생각해요.”

    도트가 말했다.

    “전하. 전하의 시종에게 전 모든 사람의 마음을 소중히 여긴다고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아, 만나기로 한 거야?”

    “…….”

    도트는 나를 통하지도 않고 로웰을 흰 눈으로 봤다. 불결해, 라는 말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게임 속 로웰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5분 간격이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 싶었지만, 도트는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기엔 평범한 연애의 시작인데. 로웰에 대한 기준이 너무 가혹한 게 아닌가?

    싫어하는 사람에겐 모든 기준이 가혹해지기 마련이지만.

    “전하. 전하의 시종이 절 벌레처럼 노려보고 있어요.”

    “도트는 벌레를 노려보지 않아.”

    “전하. 전하의 시종이 절 벌레보다 못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짐작하는 건 신중히 해야 하지 않을까?”

    로웰에게 대충 대답해 주며 여관으로 돌아가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버스에 우산을 놓고 내린 기분이었다.

    시험 끝난 수험생들로 거리가 가득했다. 누군가 내 몸을 치고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상대가 사과했다.

    어쩌다 부딪혔지?

    인파 속에서 아무랑도 안 부딪힐 정도로 내가 민첩하다는 뜻이 아니라, 뭔가……. 왜 이렇게 허전한 거지?

    “그런데 왕자님, 알렉스 경은 시험이 아직 안 끝난 건가요?”

    도트가 물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알렉스.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지?

    변명 목록이 머릿속에 쭉 펼쳐졌다.

    시험이 너무 일찍 끝났고, 결과가 불안했고, 시험장을 나왔더니 도트가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사람을 떠올릴 여력이 없었고, 로웰까지 말을 붙이고…….

    목록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알렉스를 찾았다. 시험이 끝나고 시험장에 아무도 없으면 돌아왔겠지 싶었는데 여관방엔 아무도 없었다.

    “나 잠깐만 다녀올게!”

    “예? 왕자님? 어디 가세요?”

    “아카데미!”

    아카데미 건물로 달려갔다. 인파를 역류해야 해서, 정문을 통과했을 즈음엔 몸이 땀범벅이었다.

    찾았다.

    시험장 앞에 알렉스가 서 있었다. 시험이 끝나서 가족들과 함께 울거나 떠들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서 눈에 띄었다. 그는 시험장에서 나오는 학생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지원 학부와 시험 시간이 다른 학생들이 뒤섞여서, 시험장에는 아직도 많은 학생이 남아 있었다.

    와, 어떡해.

    다 돌아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을까? 알렉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복도에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표정이 밝아졌다.

    무뚝뚝한 얼굴인데도 약간의 변화만으로 감정을 알 수 있었다.

    날 반가워하고 있다.

    내가 나타난 걸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내 시험은 진작 끝났고 그를 잊은 채 아카데미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는데도.

    진짜 어떡해?

    “알렉스.”

    “전하. 모시겠습니다.”

    알렉스가 다가왔다. 내게 닿으려는 사람을 팔로 막았다.

    “왜 기다리고 있었어? 밖으로 나오지. 행정학부 시험은 끝났잖아.”

    “예? 기다리겠다고 말씀드렸으니까…… 기다렸습니다.”

    난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걸까? 내 기사가 되어 달라고 내 입으로 말해 놓고.

    알렉스가 어떤 성격인지 게임을 통해 이미 알고 있으면서.

    성실하고 신의를 지키는 기사.

    그렇기 때문에 알렉스의 맹세를 받아들였으면서.

    “나 여관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왜 난 내 죄를 고백하지 않고 못 배기는 거지?

    입 뒀다 뭐 하는 걸까? 변명에 안 쓰고.

    아무튼 입은 열렸다. 알렉스의 반응을 기다렸다.

    알렉스는 나를 인파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가 방호벽처럼 사람들을 가로막고 있어서 난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고 아카데미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알렉스?”

    “예, 전하.”

    “할 말 없어?”

    “죄송합니다. 시험이 이렇게 늦게 끝날 줄 몰랐습니다.”

    “응?”

    “실기가 필기보다 길어질 줄은……. 계산 착오입니다. 다음부터는 전하와 같은 시험에 응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다른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느끼는 건가?

    알렉스의 표정이 진지했다.

    “어…… 역사 작문 자신 있어?”

    “아니요.”

    “어떻게 같은 시험 치게?”

    “공부하겠습니다.”

    “이번에 합격하면 입시는 없잖아?”

    “전하와 같은 수업을 듣겠습니다.”

    내용이 전혀 안 통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대화하고 있는 거 맞나?

    내가 사과해야 하는 타이밍 아닌가? 그런데 알렉스는 내 사과에는 관심 없어 보였다.

    “수험생들 대화를 들었는데 아카데미에는 강의 종류가 많다고 합니다, 전하.”

    “응.”

    “입학만 하면 전하 곁에 있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같은 강의를 신청해야 합니다.”

    “응, 그렇지.”

    “학부가 달라도 같은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다면 제가 전과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렉스는 기다리는 동안 다른 수험생들 대화를 열심히 들었던 것 같았다.

    나로서는 저런 것도 모르고 아카데미에 시험 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다른 수험생도 나랑 비슷한 감상일 텐데, 이 대화를 듣는 건 우리밖에 없었다.

    “전공이 달라도 같은 강의 들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전공 수업은 갈리겠지만.

    난 알렉스에게 아카데미 수험생이라면 모르기 힘든 상식을 알려 줬다.

    알렉스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렇군요.”

    “역사 작문 시험을 치러야 할까 봐 걱정했어?”

    “예, 전하.”

    “바움쿠헨 백작이 역사 같은 거 안 가르쳐 줬어?”

    “아니요, 전하. 제가 열심히 안 들었습니다.”

    “아, 그래.”

    “들어 둘 걸 그랬습니다.”

    “그러게. 공부해서 남 주는 것도 아닌데.”

    “예, 전하.”

    알렉스는 현실에서라면 체대를 갔을 것 같다.

    공부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런데.

    아니, 정말 이걸로 괜찮아?

    얼렁뚱땅 여관으로 돌아가자 도트가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합격 기원 파티라고 했다.

    카페테리아를 통째로 빌려서 다른 손님이 없었다.

    어제저녁이 마지막 식사일 것처럼 굴던 도트는 이번 파티에서도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며 앞으로의 내 생활을 걱정했다.

    “왕자님은 시종 없이 살아 보신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카데미에서 혼자 생활하실 수 있죠? 아카데미에선 학생의 사정도 봐주지 않네요! 이렇게 후진적일 수가 있나요?”

    시종 없이는 생활도 못 하는 학생 쪽이 후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도트는 내가 합격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도트를 위해서라도 합격자 명단에는 있어야 할 텐데.

    도트가 이끄는 대로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다가, 다시 불안해졌다.

    시험 문제가 좀 어려웠다면 차라리 안심했을 텐데.

    난 열한 살 수준의 답변을 적어 놓고 나온 것 같았다. 애초에 시험 문제 자체가 열한 살 수업에서 파이 공작이 냈던 문제 수준이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