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84화 (84/293)
  • 84.

    불안한 마음을 안고 시험장을 나왔는데 정문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수험생 가족들과 도트였다. 다른 가족들은 시험장을 나온 사람이 자신의 자녀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팔을 내렸다.

    도트만 팔을 휘젓고 있었다.

    “왕자님! 왕……. 도련님! 여기예요!”

    내 표정을 본 도트가 재빨리 단어를 바꿨다.

    “여기까진 왜 나와 있어? 잔다며.”

    도트는 전날 밤새 물 떠 놓고 기도했다. ‘왕자님의 시험 합격을 기원해서’라고 했다.

    그러고는 하품을 하며 아침에 나와 알렉스를 배웅했다.

    자러 간다더니 바로 여기로 온 모양이다. 이 시험 떨어지면, 나한테 변명거리가 있기는 한가?

    도트는 배시시 웃었다.

    “잠이 안 와서요! 왕자……. 도련님이 쉽게 풀고 나오실 줄 알았어요!”

    “쉬웠는진 잘 모르겠어.”

    난 밑밥을 깔아 뒀다.

    “앗. 시험이 어려웠군요? 괜찮아요, 모두에게 어려웠을 거예요.”

    도트가 의젓하게 말했다.

    역시 그렇겠지? 나만 쉽게 보고 누구나 쓸 수 있는 답변을 쓴 거겠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본 적 없는 역사가 떠올랐다.

    다시 돌아가서 답안을 보충하고 싶어졌다. 내가 떨어지면 도트는 눈물 바람으로 자책하겠지.

    도트의 세계에서 조프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 실력이 허접해서 떨어져도 아마 자기가 기도를 덜 한 탓이라고 생각할 거였다.

    먹지도 않은 아침이 속에서 부대끼는 기분이었다. 정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시험 스트레스란 걸 평생 공감해 본 적이 없는데, 게임 속에서 이해하게 될 줄 몰랐다.

    우리가 정문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자 주변 수험생 가족들이 수군거렸다.

    “우리 애는 뭘 하느라 안 나온담?”

    “시험이 어려운가?”

    “먼저 나온 애들한테 물어볼까요?”

    한국 수능일 광경 같았다.

    아카데미가 대학 비슷한 거니까 이 시험도 대충 대입 비슷하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엄청났다. 여기의 교육열도 한국 못지않았다.

    “도련님, 붙잡히기 전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말이네요, 도련님. 저분들 무섭다고요. 쪽수가 밀려요.”

    로웰이 끼어들었다.

    “술은 깼어?”

    시험을 마치고도 정문까지 비틀비틀 나가기에 말도 걸지 않았는데. 내 질문에 로웰은 치약 광고에서 본 듯한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예? 술이요? 무슨 말씀이세요. 어떤 나쁜 학생이 술에 취해서 시험을 치러 오나요?”

    “네 몸에서 나는 냄새는 향수야?”

    “아. 뭔가 허전하다 했어요.”

    로웰은 품에서 향수를 꺼내 손목과 귀 뒤에 뿌리기 시작했다.

    상쾌한 향이 코를 찔렀다. 로웰은 머리를 털고 목을 가다듬더니 다시 나를 바라봤다.

    “이제 어떤가요? 도련님.”

    “괜찮아.”

    로웰은 더 이상 술독에 빠졌다 나온 사람 같진 않았다. 향수병을 깨트린 사람 같긴 했지만.

    “술이요? 로웰 님, 술 드셨어요?”

    도트가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로웰이 그렇다고 대답하면 몽블랑 상단주에게 편지라도 쓸 기세였다.

    “도련님, 도련님의 시종이 저를 괴롭혀요.”

    “너무 가까이 붙지 마. 술 냄새 나.”

    술 냄새는 로웰의 입에서 나는 거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로웰은 입맛을 다시더니 내게서 네 걸음 멀어졌다.

    사람 세 명쯤은 사이로 지나갈 수 있는 거리를 벌리고 그가 물었다.

    “이 정도는 어떠세요?”

    “냄새는 안 나는데, 의미 있어?”

    로웰과 같이 걷는 의미가 없었다. 거의 다른 일행 수준이었다.

    로웰이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 유지라는 건 정말 힘드네요.”

    “인생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어.”

    로웰을 대충 위로해 주는데 도트가 웃으며 말했다.

    “로웰 님, 술 냄새가 아직도 나요. 한 걸음 더 떨어져 주세요.”

    “도련님. 도련님의 시종이 절 죽이려고 해요.”

    로웰이 한 걸음 더 떨어지려면 난간을 넘어야 했다. 난간 밖은 강이었다.

    확실히 술 냄새가 사라질 것 같긴 했다. 로웰도 덩달아 사라지겠지만.

    “내 시종은 그런 짓 안 해.”

    도트의 눈이 커졌다.

    “전하 시종이라고 너무 감싸 주시는 거 아니에요?”

    로웰이 투덜거렸다. 주변에 사람 없다고 호칭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트는 그냥 널 싫어하는 것뿐이야.”

    “전하. 위로가 안 돼요.”

    당연하지. 위로해 주려고 한 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누가 자길 죽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단,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마음 편하지 않나?

    사람을 싫어하는 것과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건 좀 다른 영역이니까.

    “어지간히 싫은 사람이 아니면 죽이려고 들진 않잖아.”

    “전하, 죄송해요. 사실 전하의 시종이 절 죽이려 든다고 걱정하진 않았어요.”

    로웰이 실토했다.

    “알아.”

    “그러면 저한테 하신 말씀은…….”

    “아무 의미 없는 말인데?”

    “그렇군요.”

    로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자기 뺨을 짝짝 치더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이제 정말로 술이 깼으니까 잠깐 왕자 전하의 시간을 빌려도 될까요? 사업 관련해서 말씀드릴 사안이 있어요. 아버지가 따로 사람을 보내시겠지만, 그 전에 알려 드리고 싶어서요.”

    “정말 술 깼어?”

    “그럼요. 맹세할 수 있어요.”

    “56 곱하기 37은 뭔데?”

    “맨정신으로도 계산 못 하거든요!”

    술 냄새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술 없이 잠들지 못했다.

    오래전 일이다.

    난 로웰이 이끄는 대로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테리아가 아니라 진짜 카페였고, 내가 현실에서 알던 것과 비슷한 장소였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점원이 다가왔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점원이 물었다.

    로웰이 고개를 기울이며 점원을 올려다봤다.

    “추천하는 음료는 어떤 거예요?”

    “가게의 인기 상품은 휘핑크림을 얹은 핫 초콜릿이에요. 달지 않은 음료를 원하신다면 이쪽 메뉴를 추천드려요.”

    점원이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로웰이 보조개를 만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핫 초콜릿으로 부탁드려요.”

    점원이 움찔했다. 그녀는 로웰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우리에게 물었다.

    “어떤 음료를 준비해 드릴까요?”

    “핫 초콜릿 괜찮아?”

    “네, 왕자님.”

    같은 메뉴를 부탁하자 점원은 멀어졌다.

    로웰은 턱을 괴고 점원의 뒷모습을 보다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 이미 만나셨어요?”

    “투자 관리자? 응. 몇 번.”

    “죄송합니다.”

    로웰이 고개를 숙였다.

    “네가 왜?”

    “그러지 말라고 몇 번 말씀드렸는데! 전하께선 그런 분이 아니래도 이해를 못 하신다니까요.”

    로웰이 말하는 ‘그런 분’이 뭔지 신경 쓰였다. 대개 저렇게 말하면 난 ‘그런 분’이 맞던데.

    “전하께서는 여느 투자자가 아니고, 이득보다 다른 곳에 관심이 있으시다고 말씀드려도 도무지 모르시더라고요. 전 사람의 욕망을 모른다고요. 아버지야 늘 저를 무시하시죠.”

    “내가 다른 곳에 관심이 있다고?”

    “예. 사실 왕자 전하의 궁극적인 목표가 투자 소득은 아니시잖아요?”

    로웰이 태연하게 말했다.

    도트가 흥미진진하게 로웰을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앗, 로웰 님이 저보다 왕자 전하를 잘 아시는군요?’ 할 타이밍인데.

    로웰이 안다고?

    물론 난 실패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투자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웃고 있었고.

    “전하, 아버지가 권한 사업에 투자하셨어요?”

    “검토 중이었어.”

    사실 투자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보류 중이었다.

    “실은 투자할 생각 없으시죠?”

    “맞아.”

    정말 어떻게 알았지?

    “그러실 줄 알았어요. 왕자 전하께서 관심을 가질 만한 사업 목록을 따로 정리해 왔어요.”

    로웰이 한숨을 쉬며 내 앞에 서류 뭉치를 내려놨다. 책 같은 걸 들고 있더라니 시험 대비용이 아니었다.

    목록을 쭉 읽었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순으로 정리된, 내 취향에 꼭 맞춘 투자처가 가득했다.

    서류를 덮었다.

    “이런 걸 평소에도 들고 다녀?”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시험장에 오실 테니까 가지고 나온 거죠.”

    “무슨 기준으로 정리한 거야?”

    “전하께서 투자할 만한 순이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기준인데?”

    “여기서 말해도 되나요? 좀……. 위험하지 않나요?”

    로웰이 난처한 듯 말했다.

    “맞아요, 왕자님. 여기는 너무 개방된 공간인 것 같아요.”

    도트가 맞장구쳤다.

    뭔데?

    ‘사실 돈지랄하고 싶으신 거잖아요’가 남들 듣기에 위험한 이유인가?

    어쩐지 내가 예상한 것과 완전히 다른 이유 같았다. 도트도 로웰도 진지했다.

    “사실 아버지가 재촉했어요. 처음 왕자 전하의 투자를 받아 온 게 저니까 어떻게 좀 해 보라고요. 전하께서 다른 상단과 거래하시면 어떻게 하냐고. 제 아버지지만 욕심이 바다 같으시다니까요. 끝을 알 수 없어요.”

    로웰이 나를 힐끗 봤다.

    “다른 상단과 거래할 계획이 있으세요, 전하?”

    “아니.”

    “제가 가져온 투자 목록은 기준에 맞으세요?”

    “응.”

    “그러면, 투자를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그래도 될 것 같네.”

    “좋아요. 담당자를 부를게요.”

    로웰이 한숨 놓았다는 듯 웃었다.

    “아니. 네가 담당해 줘.”

    “네? 하지만 전하,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투자 전문가가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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