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도트 님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부터 알렉스에게 도트가 ‘님’이 된 거지? 나 자는 동안 둘이 친해졌나?
“그건 불가능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시종은 들어올 수 없으니까요. 역시 제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알렉스는 악의 없이 말했지만 도트는 타격을 입었다.
“아카데미의 규정은 부당해요! 하지만 부탁드릴게요.”
“예. 토끼 모양으로 사과를 깎는 것부터 수련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정말로 수련을 시작할 생각인지 알렉스가 과도를 넘겨받았다. 과도가 큰 손 안에 쑥 들어갔다. 무슨 장난감 같았다.
그러고 알렉스는 사과 껍질을 줄줄 깎았다. 껍질을 다 제거하면서 어떻게 토끼 모양을 만들려는 거지? 이상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토끼 모양을 원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니, 토끼 모양으로 깎고 싶어 하는 쪽은 애초에 도트랑 알렉스잖아? 왜 내가 신경 쓰고 있지?
아무튼 알렉스는 과일 깎는 수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비타민은 됐어. 내가 운동을 할 테니까.”
“하지만 왕자님,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늘 숨쉬기 운동밖에 안 하시잖아요!”
도트가 말했다. 옆에서 알렉스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십니까?”
“그렇다니까요!”
“무슨 소리야? 승마는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고…….”
“일주일에 삼십 분 하시잖아요, 왕자님!”
“심각하군요.”
“그러다 근육이 다 사라질지도 몰라요!”
“큰일입니다.”
둘이 짜고 저러는가 싶었는데 알렉스의 얼굴이 심각했다.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여 내 근육량을 재고 있었다.
어?
진심인 것 같은데.
그런데 난 운동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조프리는 평판을 망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거기에 운동까지 할 시간이 없는 것뿐이었다.
바움쿠헨 경의 수업이 사라지자, 조프리 일과에서 운동은 지워졌다.
따로 시간을 내서 승마 연습을 하는 것만 해도 장하다고 생각했는데.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연습하는 거긴 하지만.
“전하, 달리기는 최대 몇 시간 가능하십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몰라? 한 시간은 달리겠지.”
“전하. 몸을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뭐? 싫어.”
그런데 알렉스가 몹시 걱정된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도트?”
말려 봐, 하고 부르는데 도트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알렉스 경은 대단한 기사셨죠? 왕자님이 운동하시도록 도와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전하,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알렉스는 내 어깨를 잡더니 팔뚝을 주물렀다. 그리고 내 겨드랑이 밑으로 두 팔을 넣어서 등과 허리 근육을 만졌다.
뭐 하는 거야? 도트? 도트도 약간 놀란 듯 알렉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보지 말고 말리라고!
“으악? 알렉스!”
다른 것보다 간지러워서 참을 수 없었다. 커다란 손이 몸을 꽉 잡고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알렉스는 내 얼굴이 터질 것처럼 변한 뒤에야 물러섰다.
와! 진짜!
“괜찮으십니까, 전하?”
“괜찮겠어? 그렇게 만져 대는데!”
“아.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 얼마나 단련되어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수양을 쌓지 못했습니다.”
알렉스가 죄송스럽다는 듯 말했다. 와! 진짜!
뭔가 이건 아니지 않나?
도트를 돌아봤다. 공감을 얻고 싶었는데 도트는 ‘앗,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더니, 병원에 따라온 보호자처럼 알렉스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전하 몸은 괜찮으신가요? 제가 운동을 권해도 가끔 산책만 하신다니까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산책은 하시는군요. 다행입니다. 평범한 성인 남자 수준의 근육량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왕자님.”
도트가 기뻐했다.
할 말이 많았는데 사라졌다. 허리를 주무르며 도트에게 물었다. 아직도 이상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걱정됐어?”
“네. 어릴 적 왕자님은 밖에서 노는 것도,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아하셨잖아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외출은 필요할 때밖에 안 하게 되셨으니까요.”
도트는 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어쩔 수 없네요. 왕자님을 안심하고 맡기도록 하겠어요, 알렉스 경. 이렇게 전문적인 분이니까요. 왕자님을 부탁드립니다.”
“예. 걱정 마십시오.”
뭔가 이상한 식사 자리가 훈훈하게 끝났다.
다음 날 아침 도트는 여관 밖까지 나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시험 잘 보는 부적이래요, 왕자님.”
“그래. 고마워.”
“머리가 맑아지는 차예요. 시험 중간에 목마르시면 드시고, 이건 초콜릿이에요. 생각을 많이 하면 열량이 부족해지니까요. 그리고 이건…….”
도트는 이것저것 내 품에 떠넘기더니 마지막으로 지난해 수석 합격자가 시험에 사용한 펜을 줬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걸까?
덕분에 떨어지면 100퍼센트 내 탓을 할 수 있게 됐다. 난 도트가 챙겨 준 걸 모두 들고 아카데미로 들어갔다.
아침부터 아카데미는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한 건물로 학생들이 속속 들어가고 있었다.
시험 과목이 다른 알렉스는 정문에서 헤어졌다.
“시험이 끝나면 바로 필기장으로 가겠습니다.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시험 잘 봐.”
“예. 꼭 합격하겠습니다.”
알렉스는 다짐했다.
어떻게 될까.
알렉스가 합격할까? 원래 내년에 붙어야 하는 애니까 떨어질지도 모른다.
알렉스를 데려온 건 솔직히 그런 생각도 있어서였다.
그가 떨어지는 건 실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떨어진다면 알렉스가 후배라는 게 게임에서 굉장히 중요한 설정이라는 거겠지.
알렉스는 실기 시험장으로 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봤다. 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기사부인 알렉스와 달리 조프리가 봐야 하는 건 필기시험이었다. 역사 지식과 작문 실력 같은 걸 평가하는.
필기 시험장은 넓은 강의실이었다. 띄엄띄엄 앉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먹물 냄새. 조곤조곤 대화하는 긴장된 분위기가 익숙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굉장히 익숙하고 친근한 기분.
아카데미는 처음이지만, 강의실 내부는 그냥 고등학교 교실과 다를 바 없었다.
건물의 천장이 높고 기둥이 많고 교내 부지가 넓다는 차이점만 있었다.
보통 고등학교에는 호수 같은 게 없으니까.
이 게임의 장르는 연애 게임 플러스 학원물이었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돌아다녔다.
배정된 자리가 창가인 데다 교실 맨 뒷자리여서 예전 생각이 났다. 딱 이런 자리에서 수업을 들었다.
사실 수업은 안 듣고 내내 잤다.
내 앞에는 유연호가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추억에 잠기려는데 지금 내 앞에도 엎드려서 자는 사람이 있었다.
어? 오늘 입학시험일인데?
앞자리의 의자를 툭툭 건드렸다.
“시험 시작해. 일어나.”
시험 포기자인가?
“으으으…….”
앞자리가 좀비처럼 고개를 들었다. 흐느적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어째서인지 난 의욕 없고 잠에 취한 유연호의 얼굴을 기대했다.
“어라, 전하? 이제 오셨네요.”
로웰이 눈을 반쯤 감고 말했다. 저걸 감았다고 말해야 할지 뜬 거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실망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의문이 차올랐다.
너 나랑 동갑 아니야?
성년의 날은 내년이잖아?
식사에 와인을 곁들여 마셨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야 저런 냄새가 날 리 없었다.
로웰은 술독에 빠졌다 나온 모양이었다. 어제 그러고 나가서 술집으로 갔던 건가?
와. 현실이었으면 그 가게 큰일 났는데.
“얼마나 마신 거야?”
“모르겠어요.”
잠인지 술인지 덜 깬 초췌한 얼굴이었다.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누가 봐도 멀쩡한 꼴이 아니어서 수험생들의 이목이 죄다 로웰에게 쏠렸다.
“죄송해요. 잠깐만 잘게요.”
로웰은 다시 엎어졌다.
약간 멍해졌다.
유연호가 여기에 없는 건 당연하지만.
공략 캐릭터 로웰 몽블랑. 바람둥이에 유흥을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해도 감이 안 잡혔는데, 확실히 원작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로웰은 망나니처럼 졸고 있다가 시험관이 온 뒤에야 다시 일어났다.
“시험 시간은 세 시간입니다. 퇴실은 시험 시작 한 시간 이후부터 가능합니다. 작성한 시험지는 이곳에 제출해 주시길 바랍니다.”
시험관이 말했다.
로웰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는 책상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괴고 있었다.
눈은 뜨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험지가 배부되자, 그는 팔을 움직여 답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로웰은 조프리와 여주인공과 같은 학년이었으니까. 여기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그가 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냐면…….
유연호가 자주 하던 짓이었으니까.
유연호는 저렇게 옅은 갈색 머리도 아니고 시험 전에 술을 마시지도 않았지만.
이상한 생각이었다. 다들 시험에 집중하고 있는데 혼자 다른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집중하자.
조프리가 시험에서 떨어진다니 농담도 아니었다.
첫 문제부터 읽었다. 파이 공작의 시험처럼 서술형이었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지 않아서 충분히 풀 만했다. 아는 만큼 답안지를 작성했다.
작성한 내용을 한번 읽어 보고, 문단 간 호응을 확인했다. 문제는 없었다.
떨어지진 않겠지.
펜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로웰이 하품을 하며 일어나서, 나도 답안지를 들고 따라 일어났다. 그런데 로웰 외에 일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시험 시간은 두 시간이 약간 지났을 뿐이었다.
나머지 수험생들은 문제지를 붙잡고 열심히 답안지를 채우고 있었다.
내 줄에 앉아 있던 학생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시험 포기자를 보는 눈이었다.
……떨어지진 않겠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