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82화 (82/293)
  • 82.

    게임을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가 짤 수 있는 여주인공의 일정은 두 종류였다. 공부와 아르바이트.

    이 게임의 여주인공은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아카데미를 다니는 고학생이었다.

    그렇다는 건 알았지만, 여주인공이 입학시험 전날에도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좀 다른 문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큰 소리에 놀라 여주인공을 쳐다봤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익숙해진 듯 여주인공을 지나쳤다.

    “저건 뭐야?”

    여관에서 조프리 또래의 남자가 몸을 내밀었다. 귀족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여주인공을 쳐다보더니 인상을 썼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파벨. 뭐 해? 방 준비됐어. 안 들어와?”

    “들어가. 그런데 여관이 여기밖에 없어? 밖에 저 거지 떼들 안 보여? 격 떨어지잖아.”

    파벨이라고 불린 남자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어이없는 듯한 일행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근방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거든? 묵기 싫으면 나가서 저 호객꾼들 아무나 따라가든지.”

    “누가 뭐래?”

    “뭐랬잖아?”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말을 말자.”

    파벨이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주인공은 그 사이 손님을 잡았는지, 쉬지 않고 말을 붙이며 누군가와 길을 건너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 게임의 여주인공은 나를 모른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는데.

    다른 공략 캐릭터를 보는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여주인공에게 빨려 들어가듯 시선이 고정됐다.

    도트가 정문에서 나왔다.

    “왕자님, 방이 준비됐어요. 들어가서 쉬실래요? 아니면 이 근방을 좀 둘러보시겠어요?”

    여주인공이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갔다. 난 여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서 쉴래. 다들 피로가 쌓였을 텐데 식사하고 쉬라고 말해 줘.”

    “예, 왕자님.”

    도트는 일행들에게 가서 방을 배정해 주고 돌아왔다. 병사들이 올라가자 주위 인구 밀도가 비교적 낮아졌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방에서 드시겠어요, 아니면 아래층 카페테리아에서 하실래요?”

    도트가 물었다.

    카페테리아? 조프리가 되고 외식은 거의 해 본 적 없었다.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뭐라도 하고 싶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아래층에서 할래.”

    “이런 혼잡한 공간인데 괜찮으세요?”

    “응. 카페테리아에서 식사해 보고 싶었어. 알렉스, 너도 식사할 거지?”

    “예, 전하.”

    알렉스가 내 뒤에 섰다. 내 옆을 지나가던 행인이 알렉스의 팔에 가로막혀 거리로 밀려났다.

    그 틈에 도트는 외부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더니, 도트가 손을 품속으로 넣었다. 거기서 불쑥 엄청난 금화 주머니가 튀어나왔다. 식사하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트, 뭐 해?”

    “앗.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어요, 왕자님. 여기 친절한 분들이 자리를 비켜 주신대요.”

    도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난 눈 없어?

    자리를 뺏고 있는 거잖아?

    “식사하는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이리 와.”

    “앗. 흔쾌히 비켜 주신다고 했는데…….”

    “됐어. 위층에서 먹을래.”

    도트가 아쉬운 얼굴로 금화 주머니를 품에 집어넣었다. 저 안에 블랙홀이라도 있는 걸까? 그걸 보고도 알렉스는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

    “알렉스, 위에서 먹어도 괜찮아?”

    “예, 전하. 어디든 괜찮습니다.”

    알렉스가 대답했다.

    여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정문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나왔다. 아까 들어간 파벨이라는 남자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묵고 있었나?

    그 사람도 나를 발견했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커졌다. 로웰 몽블랑이 물었다.

    “조프리 전하?”

    파벨이 로웰에게 짜증을 냈다.

    “아, 가자고. 깨끗한 척 그만하고. 왜 또 딴소리야?”

    “파벨, 조용히 좀 해 봐. 내가 아는 분을 만났잖아.”

    로웰이 갑자기 다정한 말씨로 말했다.

    “아, 뭔데?”

    파벨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시큰둥하게 나를 쭉 훑어보더니 표정이 조금 변했다.

    난 로웰에게 인사했다.

    “안녕, 로웰. 너도 여기서 묵어?”

    “예, 전하. 전하께서 계신 줄 알았다면 인사 갔을 텐데요.”

    로웰이 활짝 웃었다. 평소처럼 반짝거리긴 하는데 어딘가 난처해 보이는 미소였다.

    “나도 방금 도착했어.”

    “그렇구나. 여행 많이 피곤하셨죠? 그럼 아직 식사도 못 하셨겠네요.”

    “응. 위에서 먹으려고.”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좋은 결정이세요.”

    로웰이 친근하게 말했다. 원래라면 ‘왜요, 같이 식사하시지 않고요.’ 하고 붙잡을 타이밍인데?

    으르렁거릴 준비를 하던 도트도 이상하다는 듯이 로웰을 쳐다봤다.

    그때 파벨이 헛기침을 했다.

    “로웰, 전하께 내 소개도 안 드릴 셈이야?”

    로웰이 미소 지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간 얼굴로 그가 파벨을 타박했다.

    “네가 왕자 전하를 봬서 뭐하게?”

    “뭘 하겠어? 인사드리겠지.”

    파벨이 앞으로 나서서 씩 웃었다.

    “안녕하세요, 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제 소개를 드려도 될까요?”

    내게 허락을 구하는가 싶더니,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로웰을 재촉했다.

    “로웰, 어서.”

    로웰이 내키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이 날티 나는 놈은 파벨레 비에른 상송. 셔벗 왕국에서 온 유학생이에요. 공부를 하러 왔는지 뭘 하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사족 붙이지 말고.”

    “……아무튼 이번 아카데미 시험을 친다고 합니다. 합격하면 동기가 되겠네요.”

    “그래? 이웃 나라의 손님이었네.”

    이 나라가 학문으로 위명을 떨치고 있다는 설정은 듣지도 못했는데. 왜 유학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게임에 이런 캐릭터가 있었나?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주요 인물은 아니었다.

    파벨레 상송이 씩 웃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파벨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하여 시장 잠행을 나가시고, 귀족들 사이에서 정원 문화를 선도하시며, 상재 역시 비할 데 없어 천한 뱃놈들이 신항로를 개척하도록 친히 가르침을 내리셨다는 소문이 모국까지 퍼져 있습니다.”

    “오…….”

    그런 헛소문이 외국까지?

    “왕자님의 반이라도 따라가라는 말을 아버님께 귀가 닳도록 들어 왔는데,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한없는 영광입니다.”

    “와. 고마워.”

    외국 귀족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국경에 있는 에드워드도 실시간으로 듣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긴 전장에 보내 놓고 나는 득 될 일만 하고 있었다고 생각할까?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사람이 망하려면 이렇게나 망하나 보다.

    “파벨. 안 나갈 거야? 분위기 좋은 데 가고 싶다며.”

    로웰이 말했다.

    “아, 물론이지. 나갈 거야. 뭐야, 괜히 빼더니 저도 가고 싶었구먼? 왕자님도 함께 모시는 게 어때? 전하, 전하의 고견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저희에게 베풀어 주십시오.”

    파벨이 서글서글한 웃음이 보이며 말했다.

    “요즘 제가 무역에 무척 관심이 많습니다. 일확천금 노래를 불러도 상인 놈들 수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무역로라니 참 구미가 당겨서……. 전하께서는 얼마나 투자하셨습니까? 무역 붐이 일어서 요즘엔 노옛값도 많이 올랐잖습니까? 뱃값이 가장 걱정이긴 하지만요. 참, 요샌 거금 들여 바다로 보내 놔도 선상 반란이 극심하다면서요? 세상이 말세입니다.”

    뭐라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래. 다음에 그런 영광을 베풀어 줄게. 지금은 피곤하네.”

    웃으며 대꾸했다. 파벨도 따라서 활짝 웃었다.

    “다음이라면, 약속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야. 빨리 와.”

    로웰이 파벨을 끌고 사라졌다. 그는 나가면서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 둘이 친구인가? 인파 속에서 파벨이 로웰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로웰이 웃으면서 파벨을 걷어찼다.

    뭐지?

    방금 자고 일어났는데도 피곤해졌다.

    * * *

    큰 침대 하나와 테이블이 있는 여관방에 저녁상이 차려졌다. 너무 익혀서 약간 질긴 스테이크와 드레싱이 듬뿍 뿌려진 샐러드, 사과와 포도 등이 든 과일 바구니가 저녁 메뉴였다.

    가장 맛있는 건 맑은 수프였다. 그마저도 수프 위에 뿌려진 후추가 맛있다는 수준이었다. 끓여 놓은 걸 막 데운 듯 온도가 미지근했다.

    아카데미 근처에 특급 호텔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 자고 내일 오전에 입학시험을 치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시험을 마치고 다음 날이면 합격자가 발표되고, 입학 예정자들은 전원 기숙사로 들어간다.

    도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이게 왕자님과 하는 마지막 식사네요. 이제 저는 왕자님이 안 계신 왕성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식사를 하겠죠…….”

    “…….”

    “왕자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리면서 침실을 청소하고, 왕자님이 계시지 않는 서재를 정리하면서…….”

    “…….”

    “왕자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면 어떡하죠?”

    도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옆에서 알렉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지 마.”

    “명령이시라면 노력해 볼게요.”

    도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도트를 아카데미에 데려가는 건 좀 아니지.

    공략 캐릭터를 따라다니면서 여주인공에게 쉿쉿거리는 건 그레이만으로 충분했다.

    도트는 슬퍼하며 “이게 왕자님께 마지막으로 깎아 드리는 과일…….” 하고 과도를 들었다.

    “이제 누가 왕자님의 영양소를 신경 써 드리죠? 저도 없는데. 왕자님은 비타민 D가 부족한 분이라는 걸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영양사들이 알아야 할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제가 왕자님께 과일을 깎아 드리겠습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도트는 사과를 깎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과일을 깎을 줄 아세요?”

    “껍질을 벗겨 내는 정도는…….”

    “그 정도로 왕자님께 과일을 깎아 드리겠다니요? 토끼 모양은 가능하시겠죠?”

    “죄송합니다. 하지만 수련을 거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늦어요! 이미 수련을 하고 계셨어야죠!”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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