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에드워드는 알렉스를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말려야 했다.
“물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예, 전하.”
알렉스는 물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물건을 찾아내는 건 도트의 고유한 기술이었다. 알렉스는 사용할 수 없었다.
“물통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차를 세우고 전하의 시종을 부를까요?”
알렉스가 물었다.
“그만해도 돼. 경은 시중드는 데는 재주가 없군.”
에드워드가 말했다.
“좋은 기사를 뒀구나, 조프리. 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 전장에서도 열심이었지.”
“……고마워.”
기사에 대한 칭찬으로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중하게?
뭘 했길래 그런 평가를 듣지?
알렉스는 내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네가 피를 무서워하는 줄은 몰랐어. 출전한 사람이 나라서 다행이야. 네가 출전하지 않아서.”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그는 미소 짓지 않았고,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진심처럼 들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에드워드에게 속셈이 있다는 걸 안다. 이것도 선의에서 나온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거짓말을 잘 못했다.
내가 싫어하니까 피를 닦겠다는 것도, 내가 출전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것도 거짓말 같지 않았다.
왜 이 마차에 탄 걸까?
에드워드는 입을 다물고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뒤 다시 그를 보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깊게 잠든 채였다.
그사이 난 마차 안에서 물통을 발견했다.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에드워드의 얼굴을 닦았다.
곤히 잠든 에드워드는 깨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순하게 자고 있었다.
잠을 못 잔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꿈에서의 일이었던가.
알렉스가 대신 하겠다며 손수건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미 에드워드의 얼굴은 깨끗해진 뒤였다.
긴 속눈썹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나도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알렉스가 창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눈꺼풀을 찌르던 햇살이 사라졌다.
마차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 * *
먼저 잠에서 깬 건 나였다. 에드워드는 모든 마차가 멈추고 병사들이 짐을 내릴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에드워드를 찾으러 온 그레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주무신다고요?”
안 그래도 어떻게 깨워야 하나 망설이던 차였다. 내가 깨워선 안 될 것 같은데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밖이 이렇게 시끄러운데 잠을 잘 수가 있나. 정신을 잃은 수준인 거 아닌가.
“네가 깨워 볼래?”
“예.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그레이는 마차 안으로 쑥 들어왔다. 에드워드를 보고 인상을 쓰더니 조용히 “에드워드 전하.”라고 불렀다.
그렇게 불러서 들리겠어?
그런데 에드워드가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에드워드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여기가 어딘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멍한 눈이 내게 닿았다.
“조프리? 네가 왜 여기 있어?”
“……내 마차니까?”
에드워드는 내 말을 듣고도 멍하니 있었다.
“내가 잠들었다고?”
“예. 제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주무시고 계셨잖아요. 지금도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그레이가 말했다. 에드워드는 그제야 그레이를 발견한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나를 원망하는 눈초리를 노려봤다. 섬세한 눈에 물기까지 어려서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았다.
난 당황해서 물었다.
“왜? 깨웠어야 했어?”
“아니. 고마워. 덕분에 잘 잤어.”
에드워드는 내가 밉고 싫어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 고마워 보였다.
뭔데?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이번엔 이유를 정말 알 수 없어서 식은땀이 났다. 피를 닦지 말았어야 했나? 에드워드가 화를 내는 부분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도트가 내 개인 짐을 들고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왜들 내리지 않고 있는가, 안을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에드워드가 도트를 발견하고 마차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네 시종은 늘 부지런하네. 왕비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 줘. 보내 주신 선물 잘 받았다고. 조프리, 무사히 바래다줘서 고마워.”
에드워드는 도트에게 말하고,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그렇게 싫은 것처럼 말하지 않아도 전혀 고맙지 않다는 건 알겠는데.
“보내 주신 선물?”
왕비님이 에드워드에게?
내 물음에 그레이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인사라도 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는 손을 내리고 “아카데미에서 봬요.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더니 가 버렸다.
그레이의 손바닥에도 핏자국이 있었다.
아.
아아…….
당연하겠지! 에드워드가 습격을 당했다면 당연히 왕비님 소행이겠지!
게임 본편에도 에드워드 습격 이벤트가 있었다. 여주인공이 에드워드와 아카데미 밖으로 외출했을 때, 복면을 쓴 암살자가 에드워드를 덮친다. 에드워드는 공략 캐릭터답게 활약해서 암살자를 다 물리치고, 여주인공에게 ‘내가 왕의 후계자가 되는 걸 못마땅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말한다.
여주인공은 너무 완벽해 보이던 에드워드에게 ‘이 사람도 힘들겠구나…….’ 같은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그건 꽤 초반 이벤트다!
조프리 세력이 틈만 나면 에드워드를 습격하는 건 이 게임의 디폴트 설정인 셈이다.
망했다.
에드워드가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냐고 물었을 때 내가 뭐라고 했지? 궁금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에드워드 입장에서 어떻게 들렸을까? 에드워드는 날 방패막이로 삼으려고 내 마차에 탄 게 맞았다.
영리하고 냉정했다.
그렇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날 이용하기 위해 웃어 줄 필요는 없는데.
에드워드에게 난 이미 개자식이었는데 미워할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해 줬다.
원한이 적금처럼 쌓이는 거면 성 한 채는 샀겠다.
엔딩 정말 바꿀 수 있는 거 맞나…….
이 상태라면 에드워드가 사랑 따위 그만두고 ‘에드워드 복수 엔딩’ 같은 걸 찍을 것도 같다.
끝내주네.
“어떡하죠, 왕자님? 왕비님께 전해 드려야 할까요? 왜 저런 말씀을 제게 하시죠?”
도트가 울상으로 물었다. 무서우니까 옆에서 같이 겁먹지 말아 줬으면 했다.
“네가 시종이니까?”
“아.”
“진짜 전해 드리진 말고.”
“아.”
대로 너머로 아카데미 건물이 보였다.
게임 일러스트에서 안개에 휩싸인 성처럼 등장한 그 건물은, 정말로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하늘은 새파랗게 맑았고 아카데미 담벼락 밖은 안개 한 점 없었다. 누가 아카데미만 수상한 그림에서 잘라서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아카데미 건물에 안개가 끼어 있어.”
“예, 왕자님.”
도트가 대답했다. 알렉스가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도 이상해하지 않았다.
그런가 보다.
이 게임은 세상의 물리 법칙도 살짝 무시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도트는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나와 알렉스가 머물 숙소를 잡았다. 여관의 직원들이 뛰쳐나와 내 짐을 올렸다.
난 약간 얼이 빠졌다.
수도와 다른 느낌의 번화가였다.
번잡스럽고 정리라곤 되어 있지 않았다.
거리마다 냄새가 넘쳐났다. 노점의 음식 냄새와 길거리의 악취가 섞여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눈을 어지럽히는 건 사람들이었다.
입학 시즌을 맞아 아카데미를 찾은 사람들로 여관 거리는 미어터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손님을 잡으려는 호객 행위가 성행이었다.
“방 두 개 남았어요! 지금 안 잡으면 다 나가!”
“마구간 있어요! 조식 가능!”
나만 넋이 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어떤 여자아이가 멈칫거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머리카락. 순한 인상에 체구는 마르고 조그맸다.
그녀는 호객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겁을 먹은 건가 싶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전투적으로 거리를 걷고 있었고 어깨만 부딪혀도 시비가 붙을 것 같았다.
길을 건너려는 건가. 무리일 것 같은데.
그런데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들이쉬었다.
“여관 잡으세요! 아직 방 못 잡으신 분들! 뭐 하세요? 작년에 묵은 학생 전원 아카데미 합격! 시험 전날 푹 쉬고 싶다! 조용한 데서 자야겠다! 그런 데가 어디 있어, 우리 여관밖에 없네! 수험생 환영! 수험생 가족분들 환영! 아카데미생 최다 배출 여관!”
거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아니 무슨 아카데미생 최다 배출 학원도 아니고 여관 홍보를…….
응?
난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호객 멘트 때문이 아니었다.
아까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에 묶은 커다란 리본이 흔들렸다.
여주인공이잖아.
아니, 여주인공을 만날 줄은 알았지만.
이제 아카데미 들어가니까.
그러니까 아직 아카데미도 못 들어갔는데…….
여주인공이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