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80화 (80/293)
  • 80.

    마차가 멈췄다는 걸 눈치챈 건 잠에서 깨고도 한참 뒤였다. 마차 밖에서 도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정말이네. 길이 막혔어. 돌아가면 얼마나 걸리지? ……어쩔 수 없군. 알렉스 경, 경로를 바꿔도 될까요?”

    “전하께 여쭤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고 계세요. 깨우고 싶지 않아요. 전하를 모시겠다면 경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중요해요. 전하께서는 섬세한 분이신 데다 워낙 아랫사람을 먼저 생각하셔서…….”

    난 도트가 더 낯 뜨거운 소리를 하기 전에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앗, 왕자님.”

    도트가 마차로 달려왔다.

    “왕자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니에요. 나무가 쓰러져서 길을 막는 바람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좀 더 주무시는 게 어떠세요? 이쪽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도 상관없지만.

    이 길이 왜 막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이동 경로는 안전하고 사람이 빈번히 다니는 길 위주로 짜여 있었다. 길이 막혀 있다면 통행을 방해받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관리들은 뭐 하는 거지?

    난 마차에서 내렸다. 줄기 굵은 나무 여러 그루가 길을 막고 있었다.

    누가 일부러 만들지 않고서야 생길 수 없는 현상이었다. 아니, 이건 무슨 의심해 달라고 설치해 놓은 함정도 아니고.

    앞에 도적 떼라도 있나?

    뒤따라오던 마차 두 대에서 줄줄이 호위병들이 내렸다.

    “무슨 문제입니까, 전하?”

    “저거 치울 수 있어?”

    두 명의 기사와 열두 명의 병사들. 전부 튼튼한 장정이었다.

    “예. 치우겠습니다.”

    왕자가 하라니까 병사들은 군말 없이 움직였다. 몇 명씩 짝을 지어 나무를 치우는 모습을 보다가 기사를 불렀다.

    “어떻게 생각해? 앞에 도적이 있을까?”

    그런 흉흉한 게 게임에 등장한 기억은 없지만.

    “예? 왕도 근처에 도적 떼가 출현했다는 소식은 들은 바 없습니다.”

    기사가 대답했다. 알렉스는 도적이라는 단어가 나온 뒤부터 내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도적이 아니면 어떤 사람이 길을 막아 놓고 싶어 하지?”

    난 알렉스에게 물었다. 관리를 불러야 할지 내가 정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알렉스의 판단력은 몰라도 그의 무력은 믿을 만했다. 그는 학부 최고의 기사였다.

    알렉스는 굳은 얼굴이었다.

    “알렉?”

    “전하. 실례지만…….”

    알렉스가 고개를 숙였다. 내 귓가에 입을 붙인 그가 말했다.

    “습격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립니다. 몸을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습격?”

    “예. 아마도…….”

    알렉스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나무가 치워져 뻥 뚫린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가 멎었습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도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병사들과 기사도 제자리에 멈춰 섰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나도 들을 수 있었다.

    여러 대의 말이 달리는 소리. 편자가 땅을 박차며 내는 소리.

    소리가 점점 커졌다.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는 말이 보였다. 주인 없는 말들과 사람을 태운 세 마리의 말.

    그중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말을 타고 한 손으로는 다른 말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빛을 받아 황금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있었다.

    에드워드가 말의 속도를 줄였다. 그를 따라오던 그레이와 다른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 옆으로 주인 없는 말들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우레 같은 발굽 소리가 우리를 덮쳤다.

    한 무리의 말이 우리를 지나쳤다.

    “에드워드.”

    난 간신히 입을 열었다. 텅 빈 길에서 에드워드가 다가오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흰 얼굴에 점점이 튄 피가 보였다.

    “안녕, 조프리.”

    에드워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는 연회장에서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아카데미에 가는 길이야? 잘됐다. 우리 좀 태워 줘.”

    에드워드는 문득 떠오른 듯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그러나 손을 적신 피가 마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붉은 자국이 크게 번졌다.

    “마차를 잃어버렸거든.”

    그가 덧붙였다.

    4인승 마차가 비좁게 느껴졌다.

    맞은편에 앉은 에드워드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 옆에 앉은 알렉스도 조용했다.

    나는 아까부터 에드워드의 무릎쯤에 눈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일이 이렇게 돼 버렸지?

    알렉스와 도트의 일 때문에 출발 시간이 한참 늦어졌다. 본래라면 에드워드와 나는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게임 본편 시작은 일 년 뒤니까.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엔딩을 바꾸자고 생각했지만, 에드워드를 대하는 방법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

    이전까지 내가 에드워드를 대하는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것.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였다. 난 그가 나를 외면하기 전에 먼저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왜 이러는 걸까?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잊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간 있었던 일을 덮어 버리려는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았는데 에드워드는 내게 어떻게 대응할지 정해 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런 관계는 게임과는 달랐다.

    게임 속 에드워드는 조프리와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일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둘은 게임 본편에서도 서로를 피했다.

    마차를 잃어버렸다고? 그에겐 말이 있었다.

    근처 여관이나 마을까지 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보호가 필요해서? 에드워드에게 보호가 필요한가?

    그는 게임 본편까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할 것이다. 전장에서도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방금 전의 일만 해도 그랬다.

    그가 굳이 조프리에게 보호를 요청해야 할 이유가 있나? 설령 왕비님이 그를 노리고 있대도.

    이성적인 판단으로? 원수진 조프리라도 방패막이론 쓸 만할 테니까?

    그렇다면 에드워드는 대단했다. 그레이가 선택할 만한 이상적인 왕자였다.

    내가 에드워드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조프리의 마차에 타지는 않을 테니까.

    에드워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사람의 감각이란 건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눈을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가 뭘 하는지 알 수 있다니.

    에드워드라면 눈만 사용해서 상대를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나는 가시밭길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아팠다.

    마주 봐야겠지.

    에드워드가 나를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고개를 들려는데 피가 말라붙은 에드워드의 손이 보였다.

    그의 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지혈한 흔적이 없었다.

    누구의 피일까.

    “궁금해? 어떻게 된 일인지.”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자기 손을 보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난 거짓말을 했다.

    얘기해 봐야, 좋은 주제는 아닐 것 같은데.

    에드워드가 활짝 웃었다.

    “안 궁금하다고?”

    목소리가 바닥을 쓸 것처럼 낮고 부드러웠다. 에드워드는 살짝 화난 것 같았다.

    왜?

    온몸에 소름이 돋는데 머리는 멍해졌다.

    에드워드의 얼굴이 어이없을 정도로 예뻐서인지 그 얼굴에 남은 흉흉한 핏자국 때문인지 모르겠다.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그럼 무슨 생각 했어?”

    에드워드가 웃으며 물었다.

    그만 좀 웃어라.

    쓴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잘 웃지도 않던 애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원하는 대답을 해 줄 텐데. 웃는 얼굴 만들어 내지 말고 그냥 용건을 말해 줬으면 했다.

    어렸을 때 에드워드의 웃는 얼굴보다 지금 만들어 낸 웃음을 더 많이 보는 것 같았다.

    “네 생각.”

    “내 생각? ……무슨 생각?”

    에드워드가 멍하니 되물었다.

    “피를 닦았으면 좋겠다.”

    “피?”

    그가 자기 손을 봤다.

    “얼굴에 묻은 것도.”

    “……안 닦였어?”

    “번졌어.”

    “흉측해?”

    “무서워.”

    “피가 무서워?”

    아니, 네가.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그런가 봐.”

    “닦을까?”

    에드워드가 순진하게 물었다.

    “응.”

    “닦아 줘.”

    뭐?

    에드워드가 손을 내밀었다. 피가 엉겨 붙은 손이 보였다. 거기 말고……. 네 얼굴이 더 문제인데.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에드워드가 물었다.

    “무서워?”

    마치 반응을 살피는 것 같은 물음이라 가슴 아래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내가 무서워하면 좋으냐고 되묻고 싶었다.

    “닦아 드리겠습니다.”

    그때 알렉스가 끼어들었다. 그는 에드워드의 손목을 잡아 손을 고정하더니 다른 손에 손수건을 들고 피를 벅벅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런다고 마른 피가 닦일 리 없어서 에드워드의 손은 점점 벌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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