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79화 (79/293)
  • 79.

    아무튼 중요한 건 알렉스의 나이가 아니었다.

    “내년에 아카데미 입학할 거지?”

    “아니요.”

    “응?”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밑밥을 까는데 뭔가 계속 어긋났다.

    “올해 입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물론 나는 올해 입학해야 했다.

    “그런데?”

    “저도 입학할 겁니다.”

    “안 돼.”

    “왜요?”

    그가 되물었다. 아니, 왜 안 되냐니…….

    “넌 내년에 입학해야지?”

    “싫습니다.”

    알렉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거대하고 위협적이었다.

    어쩐지 의자에 앉혀 놓고 싶더라니.

    “왜 싫은데?”

    “아카데미엔 호위도 시종도 못 들어가잖아요.”

    알렉스가 말했다.

    “전하께서 위험해지시면요? 누가 지킵니까?”

    “아카데미의…… 경비원이?”

    “경비원이요?”

    알렉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너 경비원 무시하냐.

    게임 속에서 에드워드가 조프리를 죽이는 동안 아무것도 못 하긴 했지만.

    기사다운 기특한 이유였다. 알렉스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충성하는 상대를 지키겠다는데 말릴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난 말려야 했다.

    “난 네가 내년에 입학했으면 좋겠는데.”

    “전 싫습니다.”

    알렉스는 의견을 잘 개진하는 기사였다.

    도트는 이러지 않는데. 그야 기사니까 시종과 다른 게 당연하겠지만. 난 충성스러운 시종에게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충성이라는 말을 순종과 동의어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봐도 둘은 비슷한 말 같았다.

    내게 충성하겠다며. 내 말 듣겠다는 뜻 아니었나? 내가 충성하는 기사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명령이야.”

    난 도트에게 잘 통하는 말을 해 봤다.

    “싫어요.”

    알렉스에겐 통하지 않았다.

    “야…….”

    “내일 출발하는 마차 뒤에 붙어서라도 따라갈 겁니다.”

    알렉스가 협박했다. 진심인 것 같았다.

    정말로 올해 입학할 생각인가?

    아니 그러면 알렉스가 후배 캐릭터가 아니게 되잖아.

    이게 중대한 문제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후배 캐릭터라는 설정이 엄청나게 중요한 설정인가? 아닌가? 내가 바꿀 수 있는 건가? 바꿔도 되는 거긴 한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설정인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핵심 설정인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알렉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난 애매하게 허락했던 것 같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잠깐 잊었다. 중요한 건 알렉스의 입학이 아니었는데.

    다음 날 알렉스는 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출발하고 있었다.

    21. 아카데미

    내가 어젯밤 알렉스에게 해야 했던 말은 이런 거였다.

    내겐 암울한 미래가 배정되어 있는데 그걸 막으려면 내 평판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것.

    에드워드는 아카데미에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

    이 모든 일은 내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

    이건 정말 이상하게 들릴 말이기 때문에 먼저 분위기를 잡아 두려고 했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알렉스는 내게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 난 과거 조프리와 에드워드와의 관계는 바꾸지 못했다. 그건 이미 정해진 설정이니까.

    그러나 에드워드가 조프리를 죽이는 건 게임의 여러 엔딩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엔딩을 ‘조프리 베드엔딩’이라고 말하자.

    난 이 게임의 끝을 ‘에드워드 해피엔딩’ 정도로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 에드워드와 여주인공은 방해 없이 서로를 사랑해야 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공략 캐릭터 중 하나고, 여주인공과 에드워드가 속할 학생회에 들어갈 테니까.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조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레이만큼 가깝지는 않겠지만.

    그러고 보니 그레이를 입조심 시켜야 하는데. 이 녀석은 여주인공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이것도 내가 붙잡아 둘 수 있겠지.

    해 보자.

    알렉스는 날 따르겠다고 했다.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난 그에게서 에드워드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레이가 어째서 알렉스를 내 편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는지.

    마차에 오르면 전날 못 했던 얘기를 하자.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약간의 문제만 아니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안 돼.”

    도트가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는 시종 차림을 벗어 던지고 평범한 귀족처럼 입고 있었다.

    공손히 모은 두 손에는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내 짐은 아니었으니 자기 짐일 것이다.

    내 반대에도 도트는 꿈쩍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나를 따라서 아카데미에 간다는 말을 듣고서부터 도트는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안 된다니까?”

    “하지만 제가 없으면 왕자님은 옷도 못 갈아입으시잖아요?”

    도트가 말했다.

    뒤에서 알렉스가 그렇게나 도련님이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도련님같이 생긴 건 너고.

    알아서 입을 수 있는 옷에 손도 못 대게 한 사람은 도트였다.

    “혼자 입을 수 있어.”

    “저 없이 외출해 보신 적도 없잖아요?”

    “있…… 없네.”

    몰래 외출했을 때도 도트는 항상 동행했다.

    “없으시죠?”

    도트가 도리어 의심했다.

    “없어.”

    “없으시죠! 제가 필요할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막상 뭐든 해 보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고…….”

    마차와 마부는 준비되어 있고 숙소도 마찬가지다. 난 정해진 안전한 경로를 통해 아카데미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무슨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생긴다 해도 돈으로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어떻게든이요?”

    도트가 어쩌면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말을 하냐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알렉스가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쟤는 누구 편인지 모르겠다.

    “아카데미에 누가 시종을 데려가?”

    난 원론적으로 반박했다.

    “전 전하의 시종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저도 나이가 찬 귀족이라고요, 얼마든지 자격이 있어요.”

    도트가 의젓하게 말했다.

    그럴듯했다.

    그래도 안 되지만.

    도트는 이 게임에 등장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곁을 따라다니는 그레이처럼 조프리 곁을 지키는 캐릭터?

    그런 건 없었다.

    “내 시종을 그만두겠다는 소리야?”

    “아니요!”

    “그럼 안 돼. 성에 있어. 명령이야.”

    알렉스에게 안 통하던 말은 도트에겐 잘 통했다.

    도트가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은 혼자 주무시는 것도 잘 못하시잖아요. 제가 옆에서 도와 드려야 하는데…….”

    알렉스가 깜짝 놀라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혼자 잘 줄도 모르는 왕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새벽에 부탁하지도 않은 수면제를 가져오는 건 도트였다.

    “아카데미에서까지 시중받는 왕자라니 꼴불견이잖아.”

    “왕자님은 제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도트는 원망스러운 듯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가 자기 자리를 빼앗아 가기라도 한 듯 앙심에 찬 눈빛이었다.

    노려볼 대상이 잘못됐다.

    난 도트의 관심을 내게로 돌렸다.

    “편지나 자주 써 줘. 그런 거 받아 보고 싶었거든.”

    “편지 자주 받으시잖아요.”

    도트가 웅얼거렸다. 설마 업무나 사교 관련으로 받는 편지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편지는 내가 읽고 답장을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도트나 다른 시종이 처리하지.

    “네 편지가 다른 편지들이랑 같아?”

    도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명령대로 입학은 포기할게요. 대신 아카데미까지는 바래다드려도 되죠? 그건 괜찮으신 거죠?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간 게 아니니까요!”

    갑자기 밝아진 도트가 말했다.

    “마음대로 해.”

    그가 다시 우울해질까 봐 난 허락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차가 출발했다. 마부는 마차를 성문으로 몰았다.

    더 인사할 곳은 없었다.

    왕비님과는 식사를 함께했다.

    조용한 식사였다. 왕비님은 내게 여행 준비는 잘되었는지, 건강은 어떤지를 물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 나를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 왕자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겠지요?’

    그 상황에서 조프리는 ‘네’ 외의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난 그렇게 대답했다.

    “왕자님, 잠 오는 차를 드릴까요? 여행이 길어질 테니 조금 쉬시는 게 좋겠어요. 바움쿠헨 경 때문에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오늘 출발도 늦어지고…….”

    도트가 어디선가 커다란 보온 통을 꺼내며 물었다. 밝은 목소리로 알렉스를 욕하는데 알렉스는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반응이 없었다. 아까부터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도트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걸까?

    나로서는 이제 바움쿠헨 경이라고 하면 알렉스를 가리킨다는 게 적응이 안 됐다. 전 바움쿠헨 경은 이제 바움쿠헨 백작이라고 불러야 했다.

    도트가 차를 따라 건넸다. 차에서 김이 올라왔다.

    이 세계의 기술력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됐다.

    도트가 함께 있는 이상 알렉스와 에드워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마시고 자는 게 좋을 것이다.

    마차가 덜컹거렸다. 길은 길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