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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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저질렀다.

알렉스를 달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충성 맹세를 받고서 할 생각은 아니었다.

어떻게 책임지려고 받았지? 난 왕이 되지 못한다. 알렉스가 내게 충성한다면 잘해 봐야 나를 따라 권력 잃고 왕국 구석진 데로 쫓겨나는 결말밖에 없었다.

음? 그건 그것대로 좋은 삶 같은데.

아니, 내 마음대로 생각하면 안 되지.

알렉스에게 권력욕과 명예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명예욕은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기사니까.

알렉스가 후회한다면, 에드워드에게 보내 주자.

알렉스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알렉스에게 들어야 할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얘기들은 언제든 들을 수 있을 거였다.

돌아가면 이야기를 나누자. 알렉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갑자기 누군가 내 편이 되어 주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내가 믿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지금 난 이상하게 희망적이었다.

실패에 너무 익숙해진 걸까? 붕 뜬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알렉스가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게 됐다.

알렉스는 아무렇지 않게 내 뒤에 서 있었다.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였다는 듯 언제든 나를 지킬 수 있는 위치에서 내 보조를 맞춰 움직였다.

“에드워드에게 안 가 봐도 돼?”

“예. 괜찮습니다.”

알렉스가 대답했다.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에드워드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 그레이가 있었다. 그레이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알렉스의 존재를 확인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쪽으로 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곳이 그레이의 자리였다. 다른 귀족들은 에드워드와 그레이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재상의 아들 그레이는 두 왕자와 친분이 있었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으나 지금 에드워드와 함께 있었다.

귀족들은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알렉스가 나를 내려다봤다. 당황한 것 같았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눈이 놀랐다.

난 아무렇지 않게 벽에 가서 섰다. 앞으로도 그레이는 에드워드의 곁에 있을 것이다.

그레이는 내 앞에서 에드워드와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에드워드에게 나와 왕비님의 정황을 알렸고, 균형을 맞추듯 가끔 내게 에드워드의 소식을 흘렸다.

그레이가 에드워드의 편이라는 건 늘 명심하고 있었다. 그가 날 걱정한다고 느낀 적도 있고,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 적도 있지만.

설정은 변하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모두 가져갈 것이다. 난 그에게 하나씩 넘기면 됐다.

에드워드가 왕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무언가 말했다. 두 사람은 대화 중이었던 듯했다. 귀족들은 왕과 왕자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가겠다고?”

왕이 되물었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이내 귀족들은 술렁거렸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예. 나라의 외적을 물리쳐 아바마마의 시름을 덜어 드렸으니 본래의 바람대로 학업을 마치려고 합니다.”

“아카데미가 아직 입학 시기 전이던가?”

왕이 물었다.

귀족들이 나를 쳐다봤다. 티 안 나게 힐끗거린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러고 있는 눈이 수십 개였다.

왕비님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내가 올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왕밖에 없는 듯했다.

“예, 폐하. 조프리 왕자도 올해 입학할 예정이에요.”

왕비님이 대답했다.

“잘됐군. 네가 입학시험을 도울 수 있겠구나, 조프리.”

왕이 말했다.

제가요?

내가 에드워드의 시험을 돕는다고? 하마터면 되물을 뻔했다.

“예, 폐하.”

난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입학식에 맞추려면 내일 아카데미로 출발해야 하지만.

상관없겠지. 왕은 내 일정 따위 관심 없을 테니까. 시험공부 도와줄 시간이 없다는 얘길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레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연회장 분위기는 여전히 이상했다. 게임이라면 대화 창에 ‘웅성웅성’ 같은 문구가 떠 있었을 것이다. 대충 그린 귀족들이 대화 창 위로 보이고.

왜들 저러는 거야?

알렉스를 돌아보니 그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전하, 에드워드 전하께서 아카데미로 가실 줄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면 안 될 분위기였다. 알렉스는 여전히 난처해 보였다.

“놀라지 않으시던데요.”

놀라야 했나?

귀족들을 둘러봤다. 놀라야 했던 것 같다.

게임에서 에드워드는 조프리와 같은 학년이었다. 에드워드의 출정 중에 왕비님은 내게 권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겠냐고. 젊은 귀족들과 친분을 다지고 내 편을 만들라는 게 왕비님의 바람이었다.

국경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승전보를 띄우고 에드워드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난 그가 언제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올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가려면 그가 국경에 있어서는 안 되니까.

에드워드가 입학식에 늦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입학식에 참여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만일 이번 해에 입학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유가 생겨서 나도 입학이 미뤄질 것이다. 조프리와 에드워드는 여주인공과 같은 해에 입학하니까.

그러나 이건 내 사정이었고 에드워드는 얼마 전까지 참전 중이었다. 전쟁 영웅씩이나 된 왕자가 돌아오자마자 아카데미에 가겠다는데 안 놀라는 게 이상했다.

지금 놀란 척하기엔 늦었겠지.

난 그냥 평소대로 행동했다. 에드워드와 어쩔 수 없이 한자리에 있게 되면 늘 그랬던 것처럼 그를 훔쳐봤다.

에드워드는 예전처럼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그레이는 대신 대답하다가 에드워드가 입을 열자 뒤로 물러섰다.

왕비님이 에드워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한숨을 쉬고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귀족들이 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난 알렉스에게 작게 손짓했다. 그가 내 키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나가자.”

지금? 알렉스는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묻지 않았다. 귀족들을 물리고 내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었다.

연회장에서 빠져나오자 숨이 트였다.

“알렉스. 지금 시간 있어?”

“시간을 내라고 명령해 주세요. 전 전하의 기사니까요.”

“그래? 그럼 시간 내. 날 따라와. 할 얘기가 있어.”

알렉스는 이번에도 두 번 묻지 않고 따라왔다. 내 침실까지.

“왕자님? 일찍 오셨네요.”

도트가 뛰쳐나와 맞았다. 나는 그를 물리쳤다.

“차는 필요 없어. 쉴게. 따라오지 마.”

도트의 눈이 커졌다. 난 침실 문을 닫고 보조 의자를 끌어 침대 옆에 뒀다. 침실은 내 궁에서 가장 보호받는 곳이었다. 오는 길에는 보초가 이중으로 서 있었다. 시종도 도트 외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어릴 적부터 제집처럼 드나들었지만.

걔는 진짜 뭘까. 소드 마스터라도 되는 걸까?

설마 알렉스보다 강하진 않겠지?

그게 좀 궁금했다. 여차할 때 알렉스가 날 구할 수 있을지.

“앉아.”

알렉스가 시종용 의자에 앉았다. 덩치 때문에 의자가 작아 보였다. 접어 앉은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그냥 일어날래?”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내가 불편해졌다. 그를 올려다보며 말하고 싶진 않았다.

“미안해. 다시 앉아.”

알렉스는 불평 없이 앉았다.

뒤늦게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온몸을 구긴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냥 얘기나 하자.

그를 보고 있으니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내가 게임 속에서 무언가를 변화시켰다는 증거였다.

게임 설정을 벗어난 건 아니었다. 그 정도의 변화를 가져올 힘은 내게 없었다.

하지만 설정 내에서라면, 약간의 뒤틀림은 허용된다.

게임 속에서 에드워드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주인공은 현재 진행형으로 불행했다.

불행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행복해진다.

생각해 보면 이 게임은 흔하고 진부한 이야기를 원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사랑.

게임을 할 때 ‘여주인공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에드워드가 아니라 조프리가 아닌가’ 같은 생각을 하지 말고 에드워드를 계속 밀어 줬으면 둘은 잘됐을 것이다.

에드워드 루트로 해피엔딩을 맞고 여주인공은 왕세자빈이 됐겠지.

에드워드는 공략하긴 힘들어도 한번 마음을 열면 상대를 깊이 믿었다. 애정 결핍이라 상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걸 좋아하고.

여주인공은 귀여운 사람을 좋아했던 것 같으니까, 에드워드도 좋아하게 됐을 것이다.

“알렉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어. 그래도 들어 줬으면 좋겠어.”

“예. 말씀하십시오.”

“네가 몇 살이었지?”

“모르겠습니다.”

“어?”

“저는 고아라 태어난 해를 정확히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알렉스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고.”

이야기가 꼬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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