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77화 (77/293)
  • 77.

    마지막으로 알렉스를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다음 날 출전한다고 말했다. 성에 걸맞은 명예를 안고 돌아오겠다고. 돌아오면 자신을 기사로 인정해 달라고.

    내게 무슨 말을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미 그는 기사 작위를 갖고 있었다. 그는 바움쿠헨이었고 그런 가문의 후계자가 기사 작위를 갖겠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알렉스가 맹목적인 눈으로 나를 보고 있어서, 난 무사히 돌아오라고 말했다.

    “전하께서 명령하신 대로 저는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제겐 이제 작위와 명예가 있고, 전하의 명예를 위해 걸 목숨도 있습니다.”

    알렉스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의 떨림이 공기를 타고 피부로 와 닿았다.

    “과거에 저는 전하를 지키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때 저는 어렸고, 마음만 앞서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무시하신 것도 당연했습니다.”

    “잠깐…….”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잖아. 난 알렉스를 무시한 기억이 없었다.

    알렉스는 덜덜 떨면서 말하고 있었다.

    “이제 제게 전하를 지킬 자격이 있습니까?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전하의 검이 되겠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걸 전하께서 주셨습니다. 제게 받은 걸 모두 돌려 드릴 기회를 주십시오.”

    알렉스의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거짓말처럼 연회장의 음악이 그쳤다. 침묵 속에서 알렉스는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그가 눈을 들어 나를 봤다.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떨렸다. 그의 동요가 내게까지 전해졌다.

    저렇게까지 떨면서 말할 일인가.

    내가 알렉스에게 뭘 해 줬는지 생각했다. 바움쿠헨 경을 보내 준 거?

    얻어걸린 일이다. 그때 내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알렉스는 바움쿠헨 경의 양자가 됐을 것이다. 이 게임은 알아서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침이 넘어갔다. 나도 긴장하고 있었다.

    “알렉스 바움쿠헨.”

    나는 그를 불렀다.

    “예, 전하.”

    “일어나.”

    알렉스의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지만 이내 일어났다.

    테라스 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그의 몸에 가려졌다.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실망할 일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알렉스가 겪은 불행은 어느 정도 조프리가 원인이었다. 고아원을 주관하던 사람은 왕비님이었고, 왕비님이 그 일에 얼마나 관여했든 왕비님과 조프리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조프리가 왕비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왕비님이 벌이는 대부분의 일들이 조프리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알고 있을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아보기는 한 걸까?

    잘못을 저지르고 수습했다고 이미 저지른 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렉스는 내가 그의 인생을 구원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진짜 큰일 날 애 아닌가.

    그게 편했기 때문에 그의 은인 행세를 하고 있긴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난 말해 주려고 했다. 네 어린 시절이 힘들었던 원인이 나라고. 난 그걸 수습하려고 했던 것뿐이라고. 네 원한을 사기 싫었으니까.

    네가 내 덕을 봤다고 느낀다면 착각이라고.

    그런데 그런 말을 해서 내게 득 될 게 없었다.

    일말의 양심이 이득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알렉스에게 사실을 알리라고 말했다. 그래. 그래야 하는데…….

    “내 기사가 되고 싶다는 말이야?”

    “……예.”

    잠긴 목소리로 알렉스가 대답했다.

    “네가 가진 모든 걸 내가 줬다고?”

    “예, 전하.”

    그의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내가 알렉스를 에드워드에게 붙였다. 그레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알렉스가 지금 보이는 마음이 그레이에게도 진심처럼 느껴졌다는 뜻이었다.

    알렉스는 기대를 내려놓은 듯이, 그럼에도 약간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감정은 유리구슬처럼 들여다보였다.

    최근 왕성에서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던가? 가끔 불러다가 성안 이야기를 듣곤 하는 어린 시종들이 떠올랐다.

    누구나 미움 사기 싫은 대상은 있는 법이다. 실망시키기 싫은 사람도.

    이미 난 충분한 미움과 실망을 사고 있었다.

    조프리의 미래가 그리 밝고 창창하지 않은데 알렉스의 미움까지 살 필요 있을까.

    알렉스가 지금까지 과거의 비밀을 모르고 살아왔다면, 앞으로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을 것이다.

    “알렉스.”

    “예, 왕자님.”

    내 목소리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알렉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말문이 막혔다.

    “알렉스.”

    “예.”

    “네가 있던 고아원은 왕비님의 관리하에 있던 곳이야.”

    알렉스의 눈이 커졌다.

    사는 데 지장이 없긴.

    지금 알렉스를 속이고 충성 맹세를 받아 낸다 해도, 아카데미에 가서 들키면? 아카데미에 호위 기사를 데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알렉스가 검 들고 달려들면 막아 줄 사람도 없다.

    그에 반해 연회장은 무기 반입 금지다. 누군가의 미움을 받아도 안전한 장소가 있다면 아마 연회장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난 널 구한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

    날 너무 미워하지도 말고.

    그런 건 에드워드로 충분했다. 알렉스가 조프리를 죽이는 루트가 따로 있었던 건 아니겠지…….

    알렉스는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다. 그가 인상을 썼다. 어린 시절의 날카로운 인상이 되살아났다.

    “아니요, 왕자님은 제 삶을 구해 주셨습니다. 전 왕자님이 아니었으면 경비대에 붙잡혔을 때 죽거나 불구가 됐을 겁니다.”

    그는 약간 흥분해서 말했다. 그가 반걸음 다가와서, 난 그를 마주보기 위해 턱을 들어야 했다.

    “네가 체포된 건 내가 경비대장에게 널 잡아 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야.”

    “왕자님이 아니었어도 전 언제든 붙잡힐 수 있었어요.”

    “아니, 넌 안 그랬을 거야.”

    난 알고 있었다. 알렉스가 누군가에게 붙잡혔다면 그건 아마 바움쿠헨 경이었을 것이다.

    “아니요, 틀림없이 붙잡혔을 거예요.”

    “아니라니까?”

    “제가 필요 없으시면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알렉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가 왈칵 젖었다.

    어느새 극존칭이 반 토막 난 말투로 알렉스가 말했다.

    “왕자님이 아니었다면 전 아무것도 될 수 없었어요. 그때 전 미래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소매치기가 아니었다면 전 경매에 팔려서 노예가 되거나 부자의 노리개가 됐을 거예요. 그것도 아니면 조각나서 장기별로 보관되고 있었겠죠. 제 눈은 희소가치가 있다고 원장이 말했으니까. 제게 미래는 그런 거였어요.”

    “…….”

    “전하께서는 절 구해 주셨어요. 왕비님에 대해서는 몰라요. 전하께서 절 구해 주셨다는 건 알아요. 전 전하를 지키고 싶어요……. 아니, 전하를 지키고 싶습니다.”

    알렉스가 더듬거렸다. 나는 그렇게 진심 그대로인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내 눈앞에서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서 준대도 이렇게 놀라울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알렉스를 구했던가? 왕비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내 행동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나는 알렉스를 구하려고 했다.

    내가 저지른 일이 나쁜 결과만 만들어 낸 건 아니었다. 알렉스는 그로 인해 자신에게 미래가 생겼다고 말했다.

    눈앞이 반짝거렸다. 노란 연회장의 불빛이 번졌다가 선명해졌다.

    “알렉스 바움쿠헨.”

    “……예.”

    알렉스가 대답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우는 자신이 싫고 분한 듯 입술을 물고 눈물을 참고 있었다.

    물론 눈물은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큰 눈에서 방울져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정말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고 순수했다.

    “내 기사가 될래? 나를 위해 명예와 목숨을 걸겠다고 맹세할래? 평생 신의를 지키고,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목소리가 떨렸다. 어리석을 정도로 과분한 것을 나는 탐내고 있었다.

    누군가의 삶을 내게 묶어 둔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말일 뿐이라도 내게는 도움이 됐다.

    지금 내게는 지탱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내 행동이 무언가를 변화시켰다고. 그 변화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 줄 사람이.

    알렉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예, 전하. 신 알렉스 바움쿠헨, 전하의 검과 방패가 되겠습니다. 전하의 미래가 저의 미래이며, 전하의 행복이 저의 행복일 것입니다.”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수십 번 반복해서 외운 문장처럼 한번 저는 곳도 없이.

    내게 검이 있었다면 그의 어깨에 올려 주었겠지만.

    알렉스가 너무 울고 있었다. 난 그냥 그를 끌어안고 등을 툭툭 쳐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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