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76화 (76/293)
  • 76.

    “그래……. 걱정했어.”

    내가 대답했다.

    “고마워.”

    에드워드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다.”

    “그렇게 보여?”

    “……응.”

    “그래. 네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니 나도 다행이네.”

    “…….”

    차라리 욕을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가 울고 나를 노려볼 때가 훨씬 편했다.

    차가운 손이 배 속을 헤집는 듯했다. 저릿한 긴장감이 등골을 달렸다.

    “이 나라의 왕자로서, 네 형제로서, 나라에 대한 너의 헌신에 감사해. 이 자리의 모두가 네게 감사하고 있어. 널 위해 준비한 연회니만큼 즐거웠으면 좋겠다.”

    인사를 서둘러 마쳤다. 에드워드는 어느 지점부터 조용히 웃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웃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동요했다.

    눈이 있으면 제대로 봐 줬으면 좋겠다. 에드워드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알아채서 내게 말해 주면 더 좋고.

    “고마워. 덕분에 즐거워질 것 같아.”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래…….”

    내가 더 뭐라고 말했던가?

    난 도망쳤다.

    정신 차려 보니 테라스였다.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결국 알아내려던 건 언급도 해 보지 못했다. 다시 꿈속에라도 있는 것 같았다.

    속이 지끈거렸다. 뒷목에 솟은 솜털은 진정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차가운 난간에 손을 올리고 정원을 내려다봤다.

    풀숲이 부스럭거렸다. 신음 소리가 들렸다.

    정원에는 격정적인 연인들이 많았다.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냉정해질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두려웠다.

    난 예전부터 그가 무서웠지만, 이런 종류의 공포는 아니었다. 나는 그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었다. 나를 죽이는 에드워드나, 나를 증오하는 에드워드는 내가 상상할 수 있었다.

    방금 만난 에드워드는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내겐 설명이 필요했다.

    “왕자님, 계세요?”

    그레이가 커튼을 열었다. 난 그를 잡고 테라스로 끌어당겼다.

    “그레이. 얘기 좀 해.”

    그레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난 커튼을 닫았다.

    “왕자님?”

    테라스로 나오는 문까지 닫고 그레이를 돌아봤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어요?”

    뭐라는 거야?

    돌아보니 그레이도 당황하고 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안 모양이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

    대답해 주자 그레이가 얼굴을 가렸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다. 무슨 대답을 원한 거야?

    난 그레이에게 손짓했다.

    “그레이, 가까이 와 봐. 할 얘기가 있어.”

    “예, 전하.”

    그레이가 얼굴을 가린 채 다가왔다. 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봤어?”

    “예?”

    “에드워드, 봤어?”

    “예.”

    “왜 저래?”

    “……관계를 회복하고 싶으신 게 아닐까요?”

    그레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대답이 틀림없었다. 에드워드와 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안다면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레이가 그 일들을 알던가? 에드워드가 내게 어떤 말을 했었는지.

    “그럴 리 없어.”

    “그렇게 보였어요.”

    “네가 잘못 본 거야.”

    “아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저처럼 생각했을 텐데요. 아니, 두 분이 원래 우애가 좋으시다고요. 전 두 분이 잘하셨다고 생각해요. 에드워드 전하에 대해서는 귀족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오늘 본 정보로 전하를 판단할 겁니다.”

    “나와 친한 척해서 에드워드에게 좋을 게 뭐지?”

    “흔치 않은 일이네요, 왕자님이 다른 사람의 호의를 의심하다니.”

    그레이가 말했다. 비꼬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 감정 없이 던진 말일 것이다. 그레이의 말투는 원래 저렇다.

    “호의라면 나도 의심하지 않아. 너라면 기뻐할 수 있어? 날 싫어하는 게 분명한 상대가 나를 만나 기쁘다고 말하는데.”

    에드워드의 눈을 봤다. 입을 열어 말하면서도 에드워드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얼어붙을 듯 새파란 눈이었다. 에드워드가 마음을 연 상대를 어떻게 보는지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몰랐다면 당황하고 조금은 기뻤을지도 모른다.

    그가 날 용서했을지도 모른다고. 미움은 희미해지고 마음은 누그러졌을지도 모른다고.

    에드워드는 예전부터 연기가 서툰 어린애였다. 대답하기 싫은 얘기가 나오면 못 들은 척했고 당황하면 눈을 깜빡였다. 정말로 멍한 어린애는 그렇게 바로 반응하지 않는다.

    커서도 연기가 서툰 점은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면을 봐서 기뻤다.

    에드워드가 정말로 나를 용서한 것처럼 보였다면 난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으니까.

    전날 꿈에서처럼.

    “에드워드 전하가 왕자님을 싫어하신다고요?”

    그레이는 이상한 표정이었다.

    “표현이 마음에 안 들어? 미워한다? 이쪽이 낫나? 마음대로 말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레이가 생각에 잠겼다.

    “왕자님이 옳으실지도 모르겠네요. 저보다 왕자님이 에드워드 전하를 더 잘 알고 계시니까요.”

    “그래?”

    “예. 아무래도 오래 지켜보셨으니까요.”

    “내가? 에드워드를?”

    “알렉스 바움쿠헨을 에드워드 전하께 붙이셨잖아요?”

    그레이가 태연하게 말했다.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어서 난 당황했다.

    내가 알렉스를? 에드워드에게?

    무슨 소리야?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와 그레이는 동시에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놀란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테라스 유리문 너머에 알렉스 바움쿠헨이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알렉스가 정중하게 물었다. 큰 체격에 앳된 데가 남은 얼굴, 몸에 맞는 기사 정복을 입은 알렉스는 귀부인들의 연애 소설에서 튀어나온 청년 기사처럼 보였다.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나와 그레이를 번갈아 살펴보더니, 공손한 자세로 아래를 향했다.

    “들어와.”

    내가 허락했다. 그레이가 안에서 문을 열어 줬다.

    알렉스는 들어오는 대신 말했다.

    “크래커 소공작. 에드워드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급한 일인가?”

    그레이가 물었다.

    “제겐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나중에 봐.”

    난 그레이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난 그를 따라 알렉스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래. 에드워드가 돌아왔으니까, 알렉스도 돌아왔겠지.

    생각이 에드워드에게 매몰돼서 알렉스에 대해서는 떠올리지 못했다. 두 사람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이 전쟁은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둘 다 이 게임 세계의 공략 캐릭터. 주역이었으니까.

    알렉스 바움쿠헨은 처음 봤을 때에 비해 인상이 가장 바뀐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엔 가시 세운 꼬맹이였는데 지금은 나라에서 손꼽히는 기사가 됐다.

    사람들은 그가 에드워드의 기사라고 말했다. 젊고 충직한 기사와 왕자의 그림은 보기 좋았다.

    그는 전장에서 에드워드의 곁을 지켰고 연회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부르기 전까지 에드워드가 대화를 나누던 상대가 알렉스였다.

    둘은 친밀해 보였다. 그 자리가 원래 알렉스의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게임에서 둘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지금과 비슷했을 것이다.

    모든 게 본래의 설정에 맞게 돌아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예전처럼 타인에게 경계심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존중했다.

    수도에서 알렉스의 인기는 대단해서 귀족 영애들 중 그에게 편지 한번 보내 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실물을 보니 그럴 만했다.

    나로서는 오랜만에 보는 알렉스였다. 알렉스를 거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움쿠헨 경은 종종 그를 수업에 데리고 왔다. 그때마다 알렉스는 어딘가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불편해하는 대상은 나였다. 바움쿠헨 경과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왜 저렇게 불편해할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바움쿠헨 경이 그 모습을 즐기는 것 같아서 난 알렉스를 굳이 수업에 데리고 올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 뒤로 몇 년간 알렉스를 보지 못했다. 가장 최근에 만난 건 그가 출전하기 전날이었다.

    입구에 서 있던 알렉스가 테라스로 들어왔다.

    뒤늦게 내가 그에게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테라스가 꽉 찬 것처럼 느껴졌다.

    못 보던 사이 키가 얼마나 큰 건가 싶었다. 전장으로 떠난 반년간 못 봤을 뿐인데. 아직 성장기라고 해도 신기했다.

    뭘 먹고 저렇게 자랐을까. 어렸을 땐 귀여웠는데.

    하기야 처음 만났을 때로부터 거의 칠 년이 흘렀다. 십 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데 칠 년이면 강산은 아니어도 산 하나는 바뀔 만했다.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데 알렉스의 머리가 낮아졌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기사 정복을 입고 무릎을 꿇은 알렉스는 과하게 그럴듯했다. 이곳이 왕의 정전이라도 된 듯했다. 그 행동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주인이었다면.

    하지만 알렉스는 왕의 기사였다. 그의 주인은 왕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이었다. 알렉스는 빛과 음악이 새어 나오는 연회장을 등지고 있었다.

    알렉스가 말했다.

    “조프리 전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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