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75화 (75/293)
  • 75.

    20. 마음의 일

    속이 술렁거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일어나, 오후에는 병든 닭처럼 졸았다.

    에드워드의 개선 행렬은 성문 밖에서 시작해 외성을 한 바퀴 돌고 왕성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끝났다. 아침부터 시작해 오후까지 진행되는 일정이었다.

    에드워드의 행렬이 왕도로 입성하는 시각에 맞춰 동쪽 탑의 종지기가 종을 울렸다. 누군가 하늘 위로 폭죽을 쏘아 올렸다.

    나는 행렬을 구경하러 나가지 않았다. 어린 시종들에게 휴가를 줬다. 시종들은 거리로 나가 오후 늦도록 놀다가, 잔뜩 흥분해서 궁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흥분해서 떠드는 얘기를 들었다. 승리를 가져온 군인들은 멋있었고 훌륭했고 너무 좋았다, 그런 얘기를 하는데 에드워드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못 봤어?”

    “아……. 에드워드 전하는…….”

    어린 시종이 볼을 붉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꿈결이라도 헤매고 있는 얼굴이었다. 시종들은 단체로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한숨만 쉬었다.

    “정말 너무……. 너무…….”

    “너무?”

    “하아…….”

    시종이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뭐야…….

    아무튼 에드워드를 보기는 한 모양이었다. 난 들뜬 시종들을 내보내고 방에 혼자 남았다.

    새벽의 그건 꿈이었을까.

    에드워드가 밤에 나를 찾아왔다가 오늘 아침 성 밖에서 나타났다는 것보다 현실감 있는 생각이었다.

    내가 에드워드를 보고 싶어 했던가? 그에게 용서받고 싶어서, 꿈을 꿀 정도로?

    도트가 문을 두드렸다.

    “왕자님,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무심코 대답하고 난 후회했다. 그레이가 이 시간에 찾아올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아직도 연회 참석 준비를 안 하셨어요?”

    그레이가 물었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꾸민 상태였다.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준비……. 해야지. 그런데 내가 너랑 같이 참석하겠다고 말했었나?”

    “그런 말씀은 안 하셨지만, 제가 아니면 누구랑 참석하시게요? 파트너도 없으시잖아요.”

    “파트너가……. 없지.”

    옳은 말만 하는데 그레이처럼 얄밉기도 힘들 것이다.

    “저 아니었으면 준비도 늦으셨을 거고요.”

    “그래. 고마워.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싫더라.”

    투덜거리자 그레이가 뻔뻔하게 말했다.

    “충신을 싫어하시면 성군이 못 되실 텐데요.”

    “그런 거 될 마음 없거든. 그리고 네가 충신이야?”

    “미움받아도 충언을 아끼지 않잖아요?”

    내가 궁금한 건 네가 언제부터 내 신하였냐는 거였지만.

    “아니, 폐하께서 정말로 화나셨거든요. 오늘 전에 없이 기분이 좋으셨는데, 개선식에 왕비님도 불참하셨으니까요. 요즘 폐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지 모르는 분이라.”

    에드워드가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왕은 극도로 변덕스러워졌다. 강한 기사를 구하겠다며 무술 대회를 열었다가 당일 취소하기도 했고, 한참을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던 적도 있었다.

    총애하던 근신들도 내치고 반칩거 상태에 들어갔다가, 에드워드의 첫 승전보가 들리자 사면령을 내리고 축제를 선포해서 온 나라를 들뜨게 만들기도 했다.

    최근 그가 가장 의욕을 보인 일은 에드워드의 개선식 준비였다. 난 왕이 무슨 짓을 하든 관심 없었지만, 이런 시기에 왕의 심기를 상하게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내가 에드워드를 본 건 현실이었을까? 일어나서 간밤에 비가 왔다는 걸 알았다. 눈을 떠 보니 짙은 풀 내음이 침실까지 타고 올라왔다.

    그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생각하는 일은 체질에 맞지 않는데 요즘 나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가 있어. 옷 갈아입을게.”

    그레이가 싱긋 웃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 * *

    왕비님께 전갈을 보냈다. 저녁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왕비님은 하루 종일 아플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자신의 몸 상태가 괜찮다고 판단하신 듯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검푸른 드레스를 입은 왕비님을 에스코트해 연회장으로 향했다. 입장 시간에 늦었지만, 왕비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왕비님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레스란 입고 벗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복장이었다. 왕비님처럼 위엄을 보여야 하는 분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왕비님의 시녀들이 말했다.

    그런가 보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옆방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

    왕비님은 기다린 시간이 납득될 만큼 아름다웠다.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시종이 왕비님과 나의 입장을 알렸다.

    “조프리.”

    열린 문으로 들어가기 전, 왕비님이 내 손을 붙잡았다. 왕비님은 내 옷매무새를 한번 정돈해 주고,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나를 걱정하는 눈이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왕비님은 에드워드의 환영 연회 같은 자리에 나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혼자 참석하게 두지도 못했다.

    나는 왕비님이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왕비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 물었을 뿐이었다.

    “들어갈까요? 준비됐나요?”

    “예, 어마마마.”

    왕비님이 내 팔에 손을 올렸다.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한 무리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이 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 한곳에 모여 있어서 상대적으로 연회장은 한산해 보였다.

    왕보다 늦게 도착한 탓에 우리의 입장은 이목을 모았다. 애초에 왕비와 왕이 함께 등장하지 않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평범한 일이지만.

    나는 왕비님을 모시고 왕에게 다가갔다. 고개 숙여 인사하자, 왕은 피곤하다는 듯 대답했다.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네 형제에게나 사과해라. 고생하고 돌아온 형제가 아니냐. 넌 개선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서로 인사도 못 했겠구나.”

    왕비님이 왕의 옆자리에 앉았다. 난 새삼스레 놀랐다.

    두 사람은 전혀 부부로 보이지 않았다. 수염을 기르고 무기력한 얼굴로 앉아 있는 왕은 본래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두 사람이 비슷한 나이라는 걸 알지만, 둘은 거의 딸과 아버지처럼 보였다.

    왕비님은 내게 웃어 주었다. 왕이 내젓듯 손짓했다. 나는 연회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가 보였다. 넓은 연회장 어디에 그가 있는지는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귀족들에게 생긴 무슨 일이란 에드워드의 참석이었다.

    현재 에드워드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그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를 둘러싼 귀족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젊은 귀족, 나이 든 귀족 할 것 없이 섞여 있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에드워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애쓰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가 왔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시종이 큰 소리로 소리쳤으니 귀가 있다면 들었을 것이다. 그의 곁에 있는 귀족들도 나와 왕비님이 입장할 땐 우리를 돌아봤다.

    혼란스러웠다.

    정말 꿈이었던가? 내가 에드워드가 찾아오는 꿈을 꿀 만큼 간절했던가? 그렇게 생생했는데. 꿈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을 만큼 이상한 일이었지만.

    왕은 턱을 괴고 날 내려다보았다. 그의 지친 얼굴이 빨리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어디로 사라지든 말든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 가기 싫었다. 괜한 내면의 욕망만 확인한 느낌이었다. 에드워드는 모를 텐데도 얼굴이 화끈거려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난 최대한 꾸물거리며 에드워드에게 다가갔다. 인파에 가로막혀서 에드워드에게 접근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친절한 귀족들이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조프리 왕자님.”

    “조프리 전하시다.”

    그들이 자리를 비켜 줬다. 홍해처럼 갈라진 길을 따라 에드워드에게 다가갔다. 길 양옆으로 귀족들이 구경꾼처럼 자리 잡았다. 에드워드는 그때까지도 누군가와 대화하느라 나를 보지 못했다.

    보지 못한 건지, 안 보는 건지.

    진짜 에드워드였다. 나를 용서하지 않는, 내가 두려워하는 에드워드.

    “에드워드.”

    한번 부르자, 에드워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새파란 눈동자. 비인간적으로 예쁜 눈이 나를 향했다.

    난 그가 싸늘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 버릴 거라고.

    거기에 대비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가 천천히 미소 짓는 데는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조프리.”

    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당황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나만 멍청한 게 아니어서.

    얘는 뭘 잘못 먹은 걸까?

    “안녕, 에드워드.”

    멍하니 중얼거리자 에드워드가 다시 웃었다. 활짝 웃은 것도 아니고, 그저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이 약간 웃었을 뿐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래. 안녕, 조프리.”

    “……오랜만이야.”

    “그러게.”

    “잘 다녀왔어?”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잘 다녀왔어?’가 뭐야? 에드워드가 옆집이라도 다녀왔나?

    에드워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목덜미가 곤두섰다.

    그는 무표정하게 나를 보다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다녀왔어. 네가 걱정해 주는 말을 들으니까 참 좋다.”

    뭐…….

    진짜 뭘 잘못 먹은 걸까? 전쟁터에서는 사람이 못 먹을 음식을 제공하는 걸까?

    정말 무서웠다. 그가 헛소리를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도 수작 부리는 게 뻔한 말투로 개수작을 부리고 있어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대개 뻔한 수작은 뻔한 결과를 바라고 있기 마련인데, 에드워드의 수작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랑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기를 바라는 건가? 내 호감을 얻기 위해서?

    그래서 에드워드가 얻을 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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