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74화 (74/293)

74.

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얘기라면 됐어.”

“한숨 쉴 만한 이야기였나요?”

그레이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충고했다.

“아무튼 그런 일도 있으니까요. 백성들은 두 왕자의 활약을 연이어 접하니 당장은 기쁘겠지만, 이 상황에 전하께서 연회에 빠져 봐요.”

“어떻게 될까?”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기뻐 날뛰겠죠. 그런 사람들이야 어디에나 있잖아요. 형제의 공훈을 질투하는 모습은 전하께도 안 좋아요. 연회에는 참석하시고, 바로 테라스로 피하세요. 제가 그리로 갈 테니까요.”

내 인생이 그렇지 뭐. 연회 참석은 피할 수 없다.

당장에 에드워드를 피하느라 미래의 불구덩이로 가까워지는 꼴이니까.

“됐어. 에드워드 곁에 있어 줘. 에드워드는 귀족들을 상대하는 데 익숙하지 않으니까.”

“연회는 참여하실 거라는 뜻이죠?”

“어쩔 수 없잖아.”

그렇다고 에드워드와 그레이를 두고 다툴 생각은 없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전하께서도 제가 필요하시잖아요.”

그레이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했다.

“내가?”

“혼자 계시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너 모르는구나? 나 인기 많아.”

전부 왕비님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레이는 그러시냐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갈 테니까요.”라고 말하며.

이상한 녀석이었다.

* * *

계획이란 건 이상했다. 내가 어떤 미래를 계획하든 그 계획대로 성공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평판을 망치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운 게 말이 되나?

이젠 뭐가 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 계획의 문제인지 나 자체가 문제인지. 눈을 감고 있는데 자꾸 잡생각이 떠올랐다.

내일 에드워드가 돌아온다.

어떡해, 조프리? 너 망했는데.

마지막으로 에드워드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에드워드를 피해 다니다 결국 사냥 대회에서 마주쳤을 때.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을까? 뭘 확인하려고. 그냥 모른 척했다면 좋았을 텐데.

에드워드는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순진할 정도로 멍청하게 믿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가 날 얼마나 미워하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면.

딱 하나 좋은 점이 있긴 했다. 내일 에드워드에게 말을 걸지 않아도 된다는 거.

그날 사냥 대회에서의 일이 없었다면 난 에드워드에게 한 마디 해 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자랑스럽다든가, 정말 대단하다든가.

오랜만에 만난 자랑스러운 형제에게 할 수 있는 그런 말. 다른 귀족들의 찬사 속에 묻어 갈 수 있을 법한 그런…….

난 똑같은 실수를 두 번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겁낼 필요 없었다. 난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거고, 그와 대화하지도 않을 것이다.

연회장 같은 곳에서는 에드워드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를 마주 보고, 눈을 마주치고…….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맥박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심장이 더 이상 내 가슴 언저리를 때리지 않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잠을 자고 싶었다. 수면제의 도움을 받으면 쉽겠지만, 내성이 생기고 있었다. 오늘은 자력으로 자야 한다.

숨이 규칙적으로 쉬어지고, 설핏 잠들었을 때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듯한…….

“조프리. 들어갈게.”

에드워드의 목소리.

나는 소스라쳐서 일어났다.

어둠 속에 에드워드가 서 있었다.

조프리의 침실이었다. 그의 침대, 손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시트의 감촉, 깃털처럼 가벼운 이불도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내가 매일같이 누워 자는 곳.

그런데도 현실감이 사라졌다.

꿈인가?

에드워드가 망토의 후드를 젖혔다. 물기가 떨어지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걷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한 빛 아래 드러났다.

에드워드가 후드를 벗기 전부터 나는 그를 알아봤다. 그의 얼굴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는 없었다. 인형처럼 섬세한 이목구비가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에드워드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어릴 때처럼 새파랗지 않았다. 그늘진 눈동자는 거의 까맣게 보였다.

에드워드가 왜 여기 있지?

그가 내게 다가왔다. 에드워드가 다가오는 만큼 나는 물러섰다. 주춤주춤 물러서던 다리가 침대에 걸렸다.

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등이 침대에 파묻혔다.

날 죽이러 왔어?

그럴 리 없다. 아직은 아니다. 비현실적인 공포감이 왔던 만큼 빠르게 가셨다. 그런데도 심장은 계속 두근거렸다.

팔로 몸을 지탱한 채, 에드워드를 올려다봤다. 그는 멈춰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을 등진 탓에 에드워드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왜 뒤로 가? 내가 무서워?”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가 너무 태연해서 이상했다. 우리가 만나자고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릴 적의 에드워드는 그런 약속 없이도 이곳을 들락거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서로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낸 지 오래였다.

“아니.”

무섭다고 말하면, 그가 정말로 무서운 짓을 할 것 같아서.

난 거짓말을 했다.

“그래?”

에드워드는 멀어지지 않았다. 그가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그를 마지막으로 봤던 사냥 대회가 떠올랐다.

‘넌 내가 살아 돌아올 때를 걱정해야 하지 않겠어?’

전쟁에서 살아 돌아와서. 가장 먼저 나를 찾아와서. ……뭘 할 거야?

눈이 감겼다.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뜨는 그 잠깐의 순간도 무서웠다.

에드워드가 무언가를 할까 봐. 눈을 뜨면, 그가 나를 노려보고 있을까 봐.

나를 미워하는 그를 보게 될까 봐.

눈을 뜨고 본다고 그걸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미신에 매달리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내 위에 있었다. 그의 턱에 무언가가 맺혀 있었다.

빗방울?

열린 창으로 빗물 섞인 바람이 들어왔다. 몸이 떨렸다. 방이 이렇게 추웠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한번 눈치채자, 몸이 떨려 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에드워드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추운 거야?”

뺨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난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드워드의 젖은 금발이 장식처럼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이번에는 내 입술 위로 떨어졌다.

피할 수 없었다. 차가웠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빗물 떨어지잖아.”

“응.”

“차가워.”

“응.”

“시트가 젖을 거야.”

“응.”

에드워드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러나 머리를 치우지는 않았다.

“……비켜 줘.”

“싫어.”

그의 몸이 내 위로 기울어졌다. 나는 거의 침대에 눕다시피 했다. 더 뒤로 가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에드워드의 팔이 침대를 짚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머리가 멍했다.

“도망가지 마.”

그가 말했다.

“안 도망가.”

“자주 도망갔잖아.”

에드워드는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의아했다. 내가 그를 피해 다닌 건 지금 와서 말하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의 일이었다.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한 건 너였는데.

“결혼할 거야?”

“뭐?”

“연애 상대가 있다며.”

에드워드는 계속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헛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궁금했다.

“조프리, 결혼해?”

어이가 없어서 긴장이 풀렸다.

“아니.”

“연애는?”

“안 해.”

“왜?”

에드워드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상한 문답이었다. 이곳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에드워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그를 내가 알던 에드워드로 생각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애였기 때문에 그가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내 연애사가 궁금해서 찾아왔어?”

에드워드의 금발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가 눈을 깜빡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보고 싶어서.”

“뭐?”

“수도 근교에 도착했는데, 네가 떠올랐어. 널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

귀가 이상했다.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에드워드는 내가 혼란스러워할 틈도 주지 않았다.

“계속 생각했어. 예전에 네가 했던 말. 조프리, 기억해?”

“……뭘?”

“넌 욕심내도 된다고 했지. 그때 난 아무것도 가져선 안 됐는데. 내가 뭘 원해도 용납해 줄 것처럼 다정했잖아.”

에드워드는 너무 이상했다. 그는 화난 것 같지 않았고, 나를 겁주려고 온 것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이상해서 어릴 적의 그를 떠올리게 하는 에드워드가, 내 앞에서 다정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에드워드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그때 난 에드워드의 마음을 열기 위해 무슨 말이든 했다. 그 말을 전부 기억할 순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에드워드의 비난과, 그가 상처받았고 그게 나 때문이라는 것. 우연이라도 그를 마주치면 느끼는 토할 것 같은 죄책감이 전부였다.

“그 생각 아직도 변하지 않았어? 내가 뭘 원해도 용서할 수 있어?”

테라스 커튼이 안으로 부풀었다. 달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에드워드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 조프리.”

에드워드의 말이 주술처럼 내 몸을 지배했다. 에드워드는 정말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게만 하면 날 용서해 주겠다는 듯이.

그는 이러려고 찾아온 걸까?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어떤 비난보다 효과적이었다. 기대가 너무 커져서, 갈비뼈 안쪽이 아팠다.

그렇게 말하면, 날 용서할 거야?

에드워드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구역질 나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변하지 않았어.”

언제 입을 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에드워드의 젖은 손이 내 뺨을 만지고, 칭찬하듯 쓰다듬은 뒤에야 내가 대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스라쳐서 밀쳐 내자, 에드워드는 한 걸음 물러서서 내가 침대 위에서 일어나는 걸 지켜봤다. 손이 덜덜 떨렸다. 주먹을 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내가 비키라고 했잖아.”

“그럼 도망갔을 거면서.”

“아니야.”

“그래? 내일 어디 있을 생각이었어? 연회장?”

에드워드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에드워드는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었겠지. 난 널 만날 방법이 없잖아. ……이제 혼자 생각하는 건 지쳤어. 너무 오랫동안 생각했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에드워드가 말했다.

“머리가 아파. 잠을 잘 수 없어. 조프리, 잠들게 해 줘.”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멍했다. 에드워드의 두통이 옮은 것처럼 내게 찾아왔다.

그가 답을 알려 주면, 난 그대로 할 거였다. 내가 생각해서 결정한 일들은 안 좋은 결과만 가져왔다.

에드워드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조프리.”

“…….”

“넌 이미 약속했잖아.”

그는 나를 두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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