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73화 (73/293)

73.

왕비님의 내 의사를 존중하시는 것도 좋고, 내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해 주시는 것도 좋지만 정말이지 곤란했다.

자유연애든 뭐든 일단 난 누굴 만날 상태가 아니고, 아카데미 입학을 앞두고 있고, 내게 미래라는 게 존재할지 아닐지의 기로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왕비님께 납득시킬 순 없지만.

얼마 전 왕비님은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왕자, 왕자는 파이 영애가 싫은가요?”

“아니요.”

파이 공작의 막내딸인 파이 영애는 공작을 빼닮은 무서운 아가씨였다. 내가 그녀를 싫어하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좋아하냐고 하면 또 참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녀 앞에 서면 숙제도 하지 않고 공작의 수업에 참석한 기분이 들었다. 할 말이 없고 등엔 식은땀이 흐르고 애매한 미소만 나온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영애들이 불편한가요?”

“사실 그래요.”

“내 왕자님, 이렇게 어려서 어떻게 할까.”

왕비님이 미소 지었다. 나를 귀여워하는 건지 질책하는 건지 아리송했다.

“전 어마마마랑 단둘이 시간이 보내는 게 아직 더 좋아요.”

고분고분 말하자 왕비님이 소리 내서 웃었다.

“그래 보이더군요. 내가 너무 조급했나요? 하지만 왕자도 곧 사랑에 빠져 이 어미 곁을 떠나겠죠.”

“안 그럴 거예요.”

“정말인가요? 왕자를 믿겠어요.”

왕비님이 내 뺨을 만졌다.

“내가 왕자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요.”

왕비님은 조급해하고 있다. 내게 지지 세력을 붙여 주고 싶어서.

그 이유가 왕성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왕비님과 다른 의미에서 나도 심란했다.

* * *

“무슨 생각 하세요, 왕자님?”

로웰 몽블랑이 물었다.

그는 다섯 번째 공략 캐릭터였다. 대상인의 아들. 자유로운 가풍 아래 자라 물질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풍요로운 이 남자는 왕도에 들를 때마다 내게 상품을 납품했다.

“아무 생각도.”

“제가 전하를 지루하게 만들었나 보네요. 노력할게요.”

“어떻게?”

무심코 묻자 로웰이 웃었다. 화사한 얼굴에서 꽃이라도 피어날 것 같았다.

이 캐릭터는 바람둥이라는 설정이었다. 게임 속에서 몇 명의 애인과 5분 간격으로 만나는 모습을 여주인공이 목격한다.

직접 보면 누가 봐도 바람둥이라는 인상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다기보다 사람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건 어때요?”

로웰이 손짓했다. 상단 직원이 고삐를 쥐고 걸어왔다.

직원을 따라 다가오는 말이 보였다. 윤기 나는 털에 매끄러운 근육을 가진 흑마였다. 풍성한 갈기가 휘장처럼 드리워서 깜짝 놀랄 정도로 위풍당당해 보였다.

난 숨도 못 쉬고 말을 바라봤다. 로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 얼굴이었다.

“타 봐도 돼?”

“네? 그건 좀…….”

웃는 낯으로 로웰이 난색을 표했다.

“쟤가 보기보다 더 성질이 더럽거든요.”

“내가 타면 문제가 생길까?”

실력 없는 기수는 떨어뜨리는 애야?

로웰은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미 몇 명 당했어요. 어디 넘겨도 사고 칠 것 같은 애라 왕자님께 데려왔죠. 관상용으로라도 보기 좋잖아요?”

“그래. 내가 데리고 있을게. 타지는 않고.”

“현명한 결정이세요.”

로웰은 몇 마리의 말을 더 보여 줬다. 나는 가장 순하다는 말을 타고 공터를 몇 바퀴 달렸다. 그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였다.

조프리는 겁이 많았다. 높은 건물이랄 게 없는 세상이라 눈에 띄게 티는 나지 않지만 고소 공포증도 있었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채, 평소보다 높은 곳에서 움직여야 하는 승마 같은 건 조프리에게 쥐약이었다.

그래도 난 말을 싫어하지 않았다. 잘 타지도 못하는 말을 사 모으는 건 내 취미였다.

너희들 중 하나는 언젠가 내 목숨을 살려 줄 수도 있겠지.

이 세계엔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었다. 마지막에 믿을 건 결국 조프리의 겁 많은 몸뚱어리 하나였다.

“또 가져온 거 있어?”

복잡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을 때 로웰은 좋은 이야기 상대였다. 그가 가져오는 물건들은 재미있고 가끔은 쓸 만했다.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물건을 보여 드릴까요?”

로웰이 물었다.

유행이라고 하니 다시 ‘자유연애라고 하는 것’이 떠올랐지만.

“보여 줘.”

난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로웰이 잘 생각하셨다며 두 손을 비볐다. 상인 같은 태도였다.

게임 속 로웰은 부잣집 철없는 아들 같은 느낌이었지만 내가 만난 그는 장사꾼 같은 면이 더 강했다. 장사 수완이 좋고 사람을 기분 좋게 대한다.

상단 직원이 상자를 가져왔다. 붉게 내부를 장식한 상자에는 투박한 검집에 수납된 검이 있었다. 별로 값나가는 물건 같진 않은데.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에드워드 전하께서 전장에서 사용하신 애검…….”

로웰이 신나서 말했다.

에드워드의 검이라고? 난 어이가 없어서 로웰을 쳐다봤다.

그걸 왜 네가 갖고 있는데?

“……과 똑같이 생긴 명검입니다! 풍류를 아는 기사님이라면 하나쯤 차고 다니심이 어떨까요?”

“…….”

“이야, 또 이걸로 말할 것 같으면 에드워드 전하께서 전장에서 사용하신 것과 똑같은 제조사에서 만든 말안장……. 모양과 성능까지 똑같이 재현한 물건으로…….”

“…….”

아니, 이런 게 수도 최신 유행이라고?

내가 예전부터 유행을 잘 따라가지 못하긴 했지만……. 정말 유행이란 건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겐 안목이란 게 없는 걸까?

어쨌거나 에드워드는 동경의 대상인 모양이다.

“마지막 물건입니다.”

로웰이 말했다.

상단 직원이 작은 보석함 같은 걸 가져왔다. 그 안에 든 로켓을 보자마자 난 로웰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에드워드 전하가 늘 품에 지니고 계신 행운의 로켓과 똑같은 디자인의…….”

“이런 게 지금 풀리고 있어?”

내가 정색하자 로웰은 당황했다.

“아니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물건이라 저희 상단에서 최초로 유통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전부 나한테 팔아. 지금 가진 물량과 생산 중인 물량 모두. 그리고 로켓은 시장에 유통하지 마. 손해 본 만큼 내가 메워 줄 테니까.”

로웰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더 지시하실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

“다른 상단에도 알릴까요?”

“아니.”

로웰이 신중하게 내 분위기를 살폈다. 내 기분이 상한 건 아닌지.

난 그에게 웃어 주고 수도에서 유행 중인 잡다한 물건들도 하나씩 구매하겠다고 말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들이었지만 이 자리의 분위기를 푸는 데는 도움이 됐다.

* * *

“개선식에 참여하실 건가요?”

그레이가 물었다. 그는 불쑥 찾아와서 차를 얻어 마시겠다고 했다. 오늘은 보충 수업도 없었고 무슨 날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내 서재에 있는 모습은 익숙했다.

“아니.”

대뜸 물어서야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난 질문에 대한 답만 했다.

에드워드에겐 좋은 날 나를 마주치지 않을 자격이 있다.

“저녁에 열리는 환영 연회에는?”

“참석 안 해.”

“폐하께서 싫어하실 텐데요.”

“언제는 좋아하셨어? 기뻐하시는 모습 본 지 백만 년인데.”

“그렇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씀하신다니까요. 에드워드 전하께서도 서운해하실 거예요.”

그레이가 농담처럼 말했다.

“진심이야?”

나로서는 농담 같지도 않게 들렸다.

그레이는 읽던 시늉을 그만두고 책장을 덮었다. 그 위에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에드워드 전하께 편지를 받았어요. 왕자님의 안부와 근황을 물으시더라고요.”

“와,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에드워드가 내 안부를? 왜?

“뭐라고 답장했는데?”

“아는 대로요. 왕자님은 많은 일을 하고 계시잖아요.”

“그런가?”

“예. 저야 왕자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요.”

“네가 날 모르면 누가 알겠어?”

그레이가 눈썹을 올렸다.

“글쎄요. 그 상인 아들쯤 되지 않고서야 모르죠. 전하께서 항로 개척에 성공하셨을 땐 정말 놀랐어요. 그런 데 관심 있으시단 말씀 전혀 없으셨잖아요.”

“아. 그거.”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레이가 말해 주지 않아도 투자의 귀재라는 찬사는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었다.

로웰만 해도 헤어지기 전에 그 얘기를 슬쩍 하고 갔다.

도대체 나는 뭐가 문제일까?

배 타고 나가는 투자는 백 명이 시도하면 아흔아홉 명이 실패한다며.

로웰의 통계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실패할 투자라고 생각해서 생존 수당도 도입했는데.

보통 실패할 모험에 생존 수당이 걸려 있으면 선원들 태업하지 않나? 누가 먼 바다까지 나가서 고생해?

그런데 이 세계 사람들은 나와 달리 착하고 성실했다. 약속을 하면 지키는 분들이었다.

모험가와 선원들은 신항로 개척에 성공했다. 그 사업에 투자한 나는 혜안을 가진 왕자라는 명성까지 얻은 모양이었다.

조프리는 안 좋은 쪽으로만 상황을 만드는 천운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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