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에드워드, 이야기 좀 해.”
에드워드는 장갑을 벗고 수도 시설로 향하고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반짝였다. 에드워드는 목덜미를 주무르다 멈칫했다.
내 목소리를 들었다.
난 달리다시피 걸어서 에드워드를 따라잡았다. 에드워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방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에드워드는 분명히 나를 봤다. 내 눈을 보고, 결정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난 그레이를 통해 에드워드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왕비님을 경계하라고 말했다.
에드워드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면, 난 그가 내 경고를 몰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나를 봤고…….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니라면, 그래서 왕비님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내가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어리석은 이유로 잘못된 선택을 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에드워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잘못된 길을,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선택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내가 너무 미워서, 내 말이라면 뭐든 듣기 싫은 게 아니라면…….
에드워드는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 건가?
발이 멈췄다.
나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할 정도로 에드워드가 날 미워하나?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닌가? 내 착각이었나?
에드워드를 기를 쓰고 피하느라 그의 감정은 생각하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그 정도로 날 미워할지도.
왕위 경쟁을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면 에드워드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었다.
후보가 두 명인데 한 명은 자동 탈락할 예정이니까.
경쟁은 없다. 에드워드가 우승자였다. 사냥 대회와 다를 바 없었다.
에드워드에게 시간을 들여 그 사실을 알리려고 했는데.
꼬리를 내리고 머리를 낮춰서, 에드워드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면. 에드워드는 지금처럼 내 존재를 무시하고 살 거라고. 난 에드워드에게 없는 존재처럼 살다가 평범한 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멈춰 서자, 에드워드는 몇 걸음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이야기?”
그가 멈춰 설 줄 몰랐다. 무작정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에게 말을 거는 것도 뻔뻔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에드워드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목이 따끔거렸다.
“왜 출전하겠다 한 거야?”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출전하지 마. 그럴 필요 없어.”
2년 뒤에도 이 나라는 용케 안 망해서 연애 게임의 배경이 된다. 에드워드가 위험해질 필요는 전혀 없었다.
고개를 들었다. 에드워드는 약간 웃고 있었다. 왕비님과 비슷했다. 즐거워서 나오는 미소가 아니다.
“조프리, 내가 걱정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가증스럽게 들려서.
에드워드는 고개를 기울였다.
“넌 내가 살아 돌아올 때를 걱정해야 하지 않겠어?”
“…….”
난 에드워드가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너무 좋은 해석이었는지 모른다.
살아 돌아오면? 뭘 할 건데?
궁금한데 모르고 싶었다.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어느새 에드워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깜빡거린다 싶더니 까맣게 번졌다.
속이 메스꺼웠다.
차가운 벽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몸에 다시 중심이 잡힐 때까지. 내가 그레이를 통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에드워드가 출전할 일도 없었을 텐데.
이마가 시원해졌다. 시원해진 머리를 벽에 쿵쿵 박았다. 그 와중에도 상처가 날까 봐, 상처가 생기면 왕비님이 걱정할까 봐 벽과 이마 사이에 손을 끼고 있었다.
멍청한 자식.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에드워드는 왕과 있었다.
왕비님이 내 뺨에 손을 올렸다.
“안색이 왜 이런가요? 조프리 왕자, 이리 와요. 따듯한 차를 마셔 봐요.”
왕비님의 시녀들이 자리를 만들었다. 난 자리에 앉아서 왕비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따듯한 차가 속을 덥혔다. 토기가 가시고, 머리가 명료해졌다. 멀쩡해진 머리로 생각하니 나는 망했다는 게 확실해졌다.
왕비님의 시녀가 담요를 가져와서 내 어깨에 덮었다. 왕비님은 손수 내 앞에 새 차를 따랐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에드워드가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역시 사냥 대회는 참가하는 게 아니었다. 사냥터에서 좋은 기억이라곤 없었다.
* * *
원작 게임은 화기애애한 연애물로, 전쟁 같은 피비린내 나는 사건과는 관계없었다. 에드워드 루트를 탈 때 여주인공이 습격당한 적은 있지만, 에드워드가 가뿐히 물리쳐서 피 볼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 게임 공략 캐릭터들은 왜 이렇게 나서서 전쟁터에 나가려는지 모르겠다.
바움쿠헨의 양자가 된 알렉스는 내게 출전 전 마지막 인사를 올리겠다며 찾아왔다.
“왜 마지막 인사인데? 죽으러 가?”
“예? 아니요……. 죄송합니다.”
알렉스는 당황했다. 예전엔 찌르면 가시를 세우는 성격이었는데 못 보던 사이 차분해졌다.
몇 년 만에 찾아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출전 보고였다. 내가 그의 주인도 아닌데 왜 나한테 보고하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알렉스 바움쿠헨이 바움쿠헨 경이라는 호칭을 가져가서 전 바움쿠헨 경은 명실상부 바움쿠헨 백작이 됐다.
그 바움쿠헨 백작은 출전 준비로 바빠서 방문하지 못한다는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백작의 소식을 전하고 침을 삼켰다.
난 그래, 알려 줘서 고마워, 잘 다녀와,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건 미묘해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면 반갑긴 해도 대화할 말이 없었다.
매일 만난 사이가 서로 얼굴 보기 지겨워도 할 말은 많은 법이다. 그레이처럼.
알렉스는 너무 커서 예전의 모습이 연상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날 찾아왔다는 건, 알렉스가 조금쯤은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소리인가.
어쨌든 난 알렉스의 은인이기도 했다.
내가 해 준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옛날에 알렉스는 구해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했다. 그의 기억에 난 은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안 가면 안 돼?”
그냥 물어봤다. 기대 없이.
알렉스는 놀란 듯했다.
“죄송합니다.”
넌 사과밖에 할 줄 몰라? 그런 거 누가 가르쳤어?
상대가 자신보다 높은 신분일 때, 무슨 말에든 사과로 답하는 건 상황을 모면하기 좋은 방법이었다.
잘 배웠네.
“위험을 감수하기에 넌 너무 어리잖아.”
“죄송합니다.”
“사과 그만해. 내가 너 괴롭히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 전하, 그게 아니라…….”
“응.”
“저는 각오한 일이 있습니다. 왕자님의 은혜를 입어, 지금은 비록 분수에 맞지 않는 성을 받았지만.”
알렉스는 천천히 말했다.
“아무도 제게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출전해 성에 걸맞은 명예를 안고 돌아오겠습니다. 이건 제 욕심입니다. 하지만 전하, 제가 돌아오면…….”
알렉스의 눈동자가 떨렸다.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나를 쳐다봤다.
“저를 기사로 인정해 주세요.”
이미 넌 기사잖아. 내 인정이 필요해?
“그래. 그럴게.”
난 대답했다.
알렉스의 콤플렉스는 양자라는 걸까. 바움쿠헨이라는 성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나.
게임을 플레이하는 중이었다면 ‘성과 관계없이 당신은 가치 있는 사람이에요.’ 같은 대사를 선택해서 말해 줬겠지만.
“알렉스 바움쿠헨 경. 에드워드를 따라다녀. 에드워드 곁이 가장 안전할 거야. 어느 때건 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챙기고. 소년 기사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이길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군대라면, 네가 뭘 하든 망할 테니까.”
“예, 전하.”
알렉스의 대답했다.
조프리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겠지.
해가 지났다. 승전보가 날아들었고, 전쟁은 끝났다.
에드워드는 영웅이었다.
내 미래는 순조롭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빛 한 점 안 보인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19. 귀환
2부.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다음 날 에드워드가 돌아올 예정이었고, 이 주 전부터 왕성 사람들은 들떠 있었다. 국경 분쟁은 완전히 끝났다. 우리는 승리했고 평화가 이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에드워드라는 왕자를 이제 막 안 것처럼 행동했다. 에드워드가 왕성에서 지낸 시간들은 잊혔고,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인 것처럼 사람들 입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에드워드 전하는 어릴 적부터 영특하고 기품 있는 분이셨다면서요?”
“물론 그러셨지.”
“태어나셨을 때 정복왕 에드워드의 별이 왕성 위에 떠서 ‘에드워드’라는 이름을 받으셨다면서요?”
“그렇고말고.”
난 복도를 지나가다가 시종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에드워드의 평가가 끝도 없이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이 꿈에도 바라던 강한 왕자의 상이었으니까.
들뜬 공기와 상관없는 사람은 나와 왕비님뿐인 듯했다. 왕비님은 어떤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건 일 년 전, 에드워드가 출전하기 전부터 시작된 왕비님의 취미 생활이었다. 그때만 해도 외국의 특이한 놀이 정도로 취급되던 문화가 요즘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왕도의 최신 유행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차나 드레스, 이국의 비단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이와 지위가 있는 귀족들은 그걸 ‘자유연애라고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 무슨 미확인 생물체라도 되는 것처럼.
왕비님은 이 문화에 뜻밖에 호의적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냐면, 왕비님의 잦은 티타임 때문이었다.
왕비님은 귀족의 딸들을 불러 차를 마시면서 함께 대화를 나눴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 자리에 우연처럼 나를 불러서 꼭 소개했다.
처음에는 왕비님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어서 그 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맞추기도 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 도트가 놀라서 소문을 물고 왔다.
“왕자님 연애하신다면서요?”
“뭐? 누구랑?”
“네? 왕자님이? 어떤 영애랑……?”
“그 왕자가 나야?”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일의 전말을 알았다. 그 뒤로 왕비님이 부르는 자리에는 긴장한 채 참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