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69화 (69/293)
  • 69.

    “경들이 너무 늙은 건가? 내 아들이 뛰어난 건가?”

    “에드워드 전하께서 뛰어나십니다, 폐하. 폐하께서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단번에 짐승의 목덜미를 꿰뚫으시던 모습을요.”

    “이제 왕자 전하의 시대가 오지 않겠습니까? 꼭 폐하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폐하를 꼭 닮으셨습니다. 저 탄앙할 만한 모습하며 특출한 사냥 실력까지. 역시 재능은 대를 이어 가는 것인가 봅니다.”

    “정복왕의 후예가 뛰어난 기사이자 뛰어난 사냥꾼인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혀에 꿀을 바른 듯한 찬사가 쏟아졌다. 나를 향한 게 아닌데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에드워드는 내게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 볼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에드워드에겐 익숙한 아부가 아닐 테니까.

    그가 뺨을 붉히고 쑥스럽게 서 있는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어릴 적의 멍한 표정과 활짝 웃는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얼어붙은 푸른 눈동자.

    역시 모르겠다. 난 성장한 에드워드를 모른다.

    “그러한가? 과연 그렇군.”

    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호쾌한 느낌이 들기는커녕 기침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 아픈 게 아닌가?

    젊고 잘생긴 얼굴은 거칠어져서 예전의 날카로움을 잃었다. 에드워드와 나란히 두면 누구나 부자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았지만, 그래서 더 두드러지게 보였다. 왕의 혈색이 나쁘다는 게.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왕이 표적을 찾았다. 볼품없는 사냥감과 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나였다.

    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조프리, 이게 뭐냐?”

    “여우인데요.”

    “누가 이게 무슨 짐승인지 물었더냐? 네 사냥감이 고작 이것이란 말이냐? 열 살 아이가 숲을 헤매고 다녀도 너보다 많은 짐승을 잡았겠구나.”

    대답할 말이 없는 질문을 하고는 쪼아 대는 면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라는데. 왕이 겉모습은 유령처럼 변했어도 중심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야 저는 숲을 헤매고 다니지 않았으니까요.”

    “누가 너보고 숲을 헤매라더냐?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화가 많은 사람이다.

    “몸이 좋지 않아 금방 숲을 벗어났어요. 몸살이라고 불참 의사를 밝혔는데, 폐하의 시종이 전하지 않았나요?”

    왜 억지로 불러 놓고 시비냐?

    내 대답에 왕은 짜증을 냈다.

    “새파랗게 어려서는 앓는 것도 일이구나. 네가 하루라도 건강한 적이 있느냐?”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마마마께서 매번 신경 쓰고 계시니 언젠가는 건강해지겠죠.”

    걱정하는 척이라도 좀 해라.

    에드워드와 조프리를 나란히 불러 놓고 왕이 어떤 그림을 만들려 했는지는 알겠지만.

    내가 짐작할 만한 일이면 왕비님도 짐작할 거라는 사실을 왕은 알았어야 했다. 생전 사냥터라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왕비님이 대회 구경을 나오실 정도니까.

    왕비님은 나와 왕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발그레하게 뺨을 붉힌 채.

    그게 좋은 의미의 미소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에요, 폐하. 저도 걱정이랍니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조프리 왕자가 워낙 몸이 약하니까요. 어제만 해도 열이 끓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던 아이가, 폐하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준비하는 모습이 어찌나 마음 아프던지……. 폐하께서도 조프리 왕자가 착하고 여려 걱정이시겠죠. 하지만 에드워드가 대신 이렇게 용맹을 보여 주니 부모 된 자로서 마음이 놓이는군요.”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새파란 눈으로 왕비님을 바라보는데 그 얼굴이 에드워드와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

    왕비님이 부드럽게 말했다.

    “저는 늘 마음 아팠답니다, 폐하. 국경에서는 고통받는 백성들과 병사들의 눈물이 강을 이루는데 왕국의 어미가 되어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토록 훌륭한 왕자가 있으니 어찌 안심이 되지 않을까요?”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거지? 난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에드워드는 턱을 당기고 바닥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몰라도 태도는 공손했다.

    “정복왕 폐하가 첫 출전한 나이와 에드워드 그대의 나이가 같음은 하늘이 안배한 바가 아닐까요? 왕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 젊은 왕자였던 정복왕 에드워드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죠.”

    “밀라네.”

    왕이 경고했다. 왕비님은 웃으며 말했다.

    “숲에서 나오는 에드워드 그대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저는 역사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저의 의무라면, 나라의 위기에 검을 드는 건 그대와 같은 젊고 용맹한 왕자의 의무.”

    “밀라네!”

    왕이 언성을 높였다. 왕비님은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듯 입을 가렸다.

    “예, 폐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에드워드의 출전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 폐하. 저희에게 에드워드가 얼마나 훌륭한 기사인지 보여 주셨잖아요. 제가 어리석어 이제야 폐하의 뜻을 알았답니다. 정복왕 폐하를 언급하기 전까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아둔한가요. 그렇지 않나요, 경?”

    지목당한 에몬 경은 당황했다.

    “예? 아닙니다, 비 전하.”

    “경들은 이미 알고 계셨겠죠. 폐하의 진위를요. 아무렴, 대규모 출전을 앞두고 기사의 용맹을 뽐낼 대회를 여실 이유가 그 외에 더 있을까요?”

    왕은 멍청이가 아닐까?

    명분을 준 건 왕이었다. 그 명분이 통할 거라는 뜻은 아니지만.

    이곳은 왕의 진영이었다. 왕의 수하들과 기사들, 병사들이 이곳에 있었고 왕비님의 편은 없었다.

    명분의 옳고 그름과는 관계없었다.

    상황에 따라 통할 수작이 있고 어떻게 해도 불가능한 수작이 있기 마련이었다.

    에드워드를 출전시킨다고? 불가능했다.

    에드워드가 싫다고만 말해도 왕비님은 억지로 에드워드를 출전시킬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에드워드를 위기 상황으로 밀어 넣는 데 왕이 동의할 리 없었다.

    왕의 총애는 명백했다. 왕을 따라온 신하들이 왕비님의 손을 들 리도 없었다.

    왕비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고민하는데 귀족 한 명이 “과연…….” 하고 입을 열었다.

    과연?

    “혜안이십니다, 폐하. 인재를 모으기 위해 뛰어난 기사들을 모아 사냥 대회를 여신 거였군요! 신, 이제야 깨달았나이다. 이 훌륭한 기사들 중에서도 왕자 전하께서 가장 훌륭한 무용을 보이시니 나라의 홍복이옵니다.”

    저 사람은 바보인 걸까, 뛰어난 연기자인 걸까?

    귀족은 진심으로 감탄한 것처럼 보였다.

    왕비님께 매수된 사람인가 알고 싶어도 내 내공으론 꿰뚫어 볼 수 없었다.

    한 명이 감탄을 하자 동요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런 거였나?”

    “허어, 폐하께서…….”

    “왕자 전하께 힘을 실어 주시려…….”

    왕의 기가 막힌 표정은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정말 재미있는 나라였다. 왕은 자기 사람도 제대로 관리 못 하는 모양이다. 그런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무심코 에드워드를 바라봤다. 이런 수작에 넘어가진 않겠지. 이미 그레이를 통해 경고도 했다.

    에드워드가 출전을 거부하면 평판은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목숨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에드워드와 눈이 마주쳤다.

    “아바마마. 승자의 권리를 청하겠습니다. 아바마마의 말씀대로 명마도 명검도 제게 걸맞지 않으니 다른 것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착각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에드워드 왕자. 내 아들아. 네가 이 대회의 승자니 원하는 것을 말해 보거라.”

    왕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출전을 허락해 주십시오.”

    “에드워드?”

    “제가 왕국에서 가장 훌륭한 사냥꾼이고 기사입니다. 하오니 나라의 명운이 제게 달렸군요. 어찌 왕자의 의무를 저버리겠습니까?”

    “에드워드!”

    왕과 내가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데, 지금만큼은 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에드워드의 이름만 부르고 있었지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돌았느냐?’일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미친놈이었다.

    귀족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왕자처럼 멋있게 말했다.

    “연약한 동생이 하지 못하는 몫까지 의무를 다하고 오겠습니다. 아바마마의 정전에 승리와 영광을 바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에드워드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데 왕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아,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밖에 없구나. 하지만 그러다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저 말에 감동했다! 감동할 포인트가 어딘데? 왕의 눈이 붉었다.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오오, 에드워드 전하…….”

    귀족들이 감탄했다. 미친 것 같다.

    “에드워드. 그대에게 무운이 있기를.”

    왕비님이 웃으며 축복했다.

    사냥 대회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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