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68화 (68/293)

68.

하지만 사냥 대회였다. 조프리가 무슨 수로 왕에게 잘 보이겠는가?

굳이 사냥 대회가 아니더라도 조프리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왕에게 잘 보일 일은 없었지만.

왕비님이 그걸 모를까. 모르고 싶으신 건가.

다른 의도를 생각해 보자면, 사냥 대회에 참가한 귀족들에게 조프리의 활약을 보여 주려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수단이 사냥 대회?

농담도 아니었다.

난 그레이에게 말해 뒀다. 왕비님을 조심하라고.

왕비님은 무서운 분이었다. 조프리에 관해서는 맹목적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에드워드와 조프리가 함께 참가하는 대회였다. 둘이 비교될 게 명백한 대회.

에드워드의 말에 무슨 조치를 취한다거나…….

방법은 뭐든 생각할 수 있었다.

‘예. 에드워드 전하께 전할게요.’

그레이는 이상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허튼 말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전한다고 했으니, 전했을 것이다.

에드워드라면 대비하겠지.

난 밤잠을 설치고 대회에 참가했다. 대회 장소가 별궁이었다면 내 다리를 부러뜨리는 한이 있어도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사냥 대회 장소는 왕성 북쪽의 공유지였다. 험한 사냥감이 없는 안전한 놀이터. 참가자들은 안심하고 자신의 운과 무예를 뽐내면 됐다.

바움쿠헨 경이 있었다면 우승 후보였을 것이다.

이번 사냥 대회에 바움쿠헨 경은 없었다. 그는 예전에 한번 왕의 사냥터에 따라왔다가 질색한 뒤로 두 번 다시 참가하지 않았다.

왕이 불쾌해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런다고 신경 쓸 바움쿠헨 경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어쩌다 왕의 기사가 됐을까?

경의 말에 따르면 그는 충성스러운 기사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기사는 왕의 유희에 어울려 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출세할 생각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발언이었다.

왕이 좋아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명을 떨치고 있는 기사긴 했지만.

사냥 대회 참가자들은 거기서 거기였다. 왕이 어울리는 사람이라 봐야 사냥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귀족들이었으니까.

그런 귀족들은 아부에 능하고 영지는 내팽개쳐 둔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래도 부유한 귀족들이었다. 알아 두고 지내면 좋을 것이다. 귀족들과 친분을 다질 욕심이 있는 왕자라면.

조프리는 열한 살에 한번 사냥터에 따라왔다가 지금에야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귀족들은 왕 가까이 모여 있었다. 난 왕 근처도 가지 않았다.

왕의 곁에는 에드워드가 있었다.

왕은 에드워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귀족들에게 그를 소개하고 있었다. 조프리를 응원하러 나온 왕비님이 그 모습을 봤다.

왕비님은 웃고 있었다.

“정말 알기 쉬운 분이라니까.”

왕이 에드워드와 나를 동시에 초대한 첫 사냥 대회였다.

왕비님은 내게 손수건을 맡겼다.

“나는 왕자를 믿어요. 내 왕자가 나에게 가장 훌륭한 사냥감을 바치겠죠. 이 사냥터에서 왕자가 가장 돋보일 거예요.”

왕비님이 말했다.

“노력할게요.”

“아무도 저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해 줘요.”

그 말엔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불가능할 텐데.

왕비님은 내가 망신당할 짓으로 이름을 떨치지 않기를 바라셔야 했다. 사냥 대회에서 말을 잃어버리고 혼자 돌아온다든가.

난 말을 쓰다듬었다.

“나 안 떨어뜨릴 거지?”

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 떨어뜨리겠지. 그렇겠지? 지금까지 우리 잘해 왔잖아.

믿으려고 노력하면서 말에 올랐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손까지 잔떨림이 있었다.

말 위는 높았고, 내가 지지할 곳이 없었다. 떨어져서 머리라도 깨지면 어릴 때처럼 뼈가 잘 붙지도 않을 텐데.

왜 말에 탈 때마다 똑같은 공포에 시달리는지 모르겠다. 노출 치료라면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조프리, 왜 그러는 거야? 뭐가 문제야?

네 말 공포증이랑 고소 공포증 좀 어떻게 해 봐.

이게 뭐가 높아? 너 2층 테라스도 무서워하더라? 거기서 떨어져서 죽겠냐? 이 겁쟁이야.

조프리를 욕해 봤자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날 욕하는 기분이었다. 조프리라는 이름에 너무 익숙해졌다.

실은 내가 겁쟁이면서 괜히 남 탓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떠는 걸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앞만 쳐다봤다.

등을 펴고, 아무도 날 안 바라보길 바라면서.

왕비님과 시녀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녀들이 흰 장갑을 낀 손을 흔들었다. 눈을 돌리지 않아도 나풀거리는 손짓이 보였다.

왕이 이쪽에서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접시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신호였다.

귀족들이 일제히 말을 몰아 달려갔다. 장관이었다. 난 뒤늦게 출발했다.

체면치레만 하자.

조프리가 얼간이라는 소문을 낼 작정이라면 난 아무것도 못 잡으면 됐다. 그래도 귀족들이나 다른 병사들이 사슴 같은 걸 챙겨 줄 거고 그럼 아무 문제도 없었다. 왕비님이 몹시 슬퍼할 거라는 것만 빼면.

한숨이 나왔다. 한 마리만 잡자.

우측에서 피리 소리가 삑 울렸다. 왕이 사냥감을 발견했다.

그쪽으로 갈 필요는 없었다. 아예 멀어지는 게 나았다. 난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여우가 보였다. 사냥 대회를 위해 풀어놓은 동물이었다. 잡을 수 있을까. 활을 당겼다.

첫 번째에 맞을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제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는 과녁을 두고도 명중시키지 못하는 실력이니까.

그런데 바람의 방향이 좋았는지 화살이 여우에게 명중했다.

뭐지? 올해 운을 여기에 다 썼나?

화살에 맞은 여우는 펄쩍 뛰더니 비틀거리며 계속 달려갔다.

말을 재촉해 따라갔다. 얼마쯤 달리니 여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바움쿠헨 경이 봤다면 ‘역시 가르치는 사람의 실력이 좋아서…….’라며 잘난 척했을 텐데.

자루에 여우를 넣고 물가를 찾았다. 말이 물을 마시도록 뒀다.

조프리는 사냥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랐다. 멈춰 있는 과녁보다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더 잘 잡는 거 아닐까? 실전에 재능이 있는 거지.

헛소리였고 운이 좋았다. 빨리 사냥감을 찾았고, 쉴 수 있게 됐다.

애초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에드워드는 어디에 있을까. 얼마쯤 잡았을까. 이런 게 재미있을까?

에드워드가 조프리보다 유력한 왕자가 된 건 이런 과정을 계속 거쳐서인가.

앞으로 2년이었다. 이런 지루한 비교 과정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에드워드와 조프리를 붙여 놓고 어느 쪽이 더 뛰어난 말인지 달려 보게 하는 것이다.

왕은 확실한 방법을 골랐지만, 내게는 좋지 않았다.

에드워드를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그에게 절로 향하는 시선을 막느라 오전부터 진땀을 뺐다. 대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힘이 다 빠졌다.

그 상태로 전력을 다했어도 활약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얼마나 활약하든 에드워드를 이기긴 힘들겠지만.

순간 소리 없이 화살이 나를 가로질렀다. 내 옆을 지나쳐 무언가를 꿰뚫었다.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였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 번의 도약으로 날 덮칠 수 있는 거리였는데.

화살의 주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로 에드워드가 보였다.

그는 훌쩍 말에서 내리더니 검으로 늑대를 절명시켰다.

왕과 함께 있는 게 아니었나?

왜 이곳에…….

상대가 에드워드라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의 검이 늑대를 꿰뚫고 사라지는 걸 봤다. 늑대가 질질 끌리더니 자루 속으로 들어갔다.

에드워드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른 사냥감이 있는 걸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난 숨마저 참고 있었다. 내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 것 같았다.

에드워드가 걸음을 돌려 사라졌다.

심장 박동이 돌아왔다. 바람이 수풀을 스쳤고 새가 날아올랐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숲이었다.

난 자루를 말에 올리고 바로 숲을 빠져나갔다.

“조프리 왕자? 얼굴이 왜 이래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왕비님의 손이 내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조금……. 어지러워서…….”

“세상에. 그늘에서 쉬어요. 햇볕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볕이 뜨거운 날에 웬 사냥이시람.”

시녀들이 얼음을 띄운 주스와 부채를 가져왔다. 땀은 전혀 나지 않았는데 부채 바람이 불 때마다 오싹해졌다.

뒤늦게 웬 늑대가 사냥터에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병사들이 위험한 짐승은 몰아냈을 텐데.

하긴 사람이 하는 일엔 실수가 따르는 법이었다.

사냥 대회가 끝났다.

우승자는 에드워드였다. 그는 몇 자루나 되는 사냥감을 꺼내 쌓아 놨다. 사냥감이 작은 산처럼 쌓였다. 다른 사람을 댈 것도 없었다.

“에드워드 왕자?”

“세상에.”

귀족들이 말했다. 난 에드워드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사냥감도 볼 필요도 없었다.

에드워드의 솜씨는 본의 아니게 감상했다. 어떤 사냥감을 쌓아 놨는지 자세히 관찰하지 않아도 그가 대단한 사냥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정말 자랑스럽구나.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의 자리를 네게 넘겨도 좋겠다.”

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로제 부인의 사후 그는 항상 울적하고 신경질적인 상태였는데, 오늘은 기분 좋아 보였다.

“이렇게 압도적인 공을 세운 왕자가 또 있을까? 네게 우승 상품으로 무엇을 내리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튼튼한 활? 상아로 만든 화살통? 명마? 명검? 아니야. 너무 평범해. 내 아들의 무용에 걸맞은 물건이 없구나!”

“과찬이십니다, 폐하.”

“과찬은 무슨! 경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내 아들의 반조차 따라간 사냥꾼이 없군! 나이가 들어 기력이 떨어진 게 아닌가? 경들이 영 힘을 쓰지 못해 내 아들이 너무도 뛰어나 보이지 않느냔 말이야.”

“에드워드 전하께선 신이 이제껏 보지 못한 훌륭한 사냥꾼이십니다. 저희를 구박하지 말아 주십시오.”

에몬 경이 말했다. 그는 왕의 사냥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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