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67화 (67/293)

67.

16세.

로웰 몽블랑은 반년 만에 왕성을 방문했다. 상행 때문이었다.

대규모 상행이 있을 때마다 로웰은 외국에 나가 한참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 상행은 세 개 나라를 통과하는 강행군이었다.

‘일을 배우지 않으면 제 이름을 유언장에서 빼 버리시겠대요. 지독하죠? 열심히 배워 봤자 상단 저 주실 것도 아니면서.’

투덜거리면서도 상행 자체는 즐기는 모양이었다. 로웰은 기념품이라며 외국에서 유행한다는 이상한 장식품을 전해 줬다.

“선물이에요, 왕자님. 침대맡에 두면 악몽을 쫓아 준대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꿈에서 볼 수 있게 해 준다나요?”

로웰이 눈을 찡긋거렸다.

“고마워.”

설명대로라면 대단한 효능이었다. 게임 아이템도 아닌데 그런 게 가능한가?

“로웰 님은 정말 자주 뵙네요. 몽블랑 상단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한다더니 로웰 님을 보면 정말 그런가 봐요.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말이에요.”

도트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놨다. 로웰이 뺨에 보조개를 만들었다.

“전하의 시종은 눈이 나쁜 것 같은데, 제가 안경을 맞춰 드리면 어떨까요? 제가 왕성에 방문하는 게 노는 걸로 보인다니 말이에요. 마침 상단에 안경을 만드는 장인이 있답니다.”

“앗. 죄송해요. 로웰 님은 왕자님을 순전히 공적으로, 일로만 만나시는 거였군요? 제가 오해했어요.”

도트가 사과했다. 로웰의 미소가 한없이 밝아졌다.

“물론 왕자님을 뵙는 시간은 언제나 제 기쁨이지만요.”

얘들은 뭘 하고 싶은 걸까?

도트는 로웰 앞에도 찻잔을 내려놨다. 손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더니 찻물이 쏟아졌다. 로웰의 조끼에 찻물이 튀었다.

“앗, 죄송해요. 제가 실수했어요!”

도트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말 실수 같았다.

로웰이 하하 웃었다.

“전하의 시종은 실수가 잦네요.”

“그러게. 오늘 피곤한가 봐. 도트, 들어가서 쉴래?”

“앗, 전하! 죄송해요. 이제 안 그럴게요.”

“아냐. 휴식이 필요해 보여. 들어가서 쉬어. 명령이야.”

“전하…….”

도트는 휴식과 휴가를 싫어하는 특이한 시종이었다. 그래도 명령은 잘 들었다.

“손님 가면 부를게. 몇 시간만 쉬어.”

“예, 전하. 하오면 로웰 님의 조끼는 어떻게 할까요? 다른 시종을 불러서…….”

“벗으면 되지.”

“네?”

도트가 깜짝 놀랐다. 로웰은 어머나, 하는 표정으로 두 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제가 최근 운동을 쉬어서 전하께 보여 드릴 만한 몸이 아닌데요. 하지만 전하께서 꼭 원하신다면…….”

왜 헛소리일까?

“로웰, 내 조끼 입을래? 체격에 맞는 게 있을 거야.”

“영광입니다, 전하.”

로웰이 웃으며 말했다.

“됐지, 도트?”

“예. 전하.”

도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나갔다. 로웰을 어지간히도 싫어했다. 조프리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사람들은 다 싫어하는 것 같긴 했는데,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어 그레이는 조프리에게 그렇게 막 대해도 도트의 망에 걸리지 않았다. 무슨 차이일까?

도트가 나갔는데도 로웰은 옷을 벗지 않았다. 바로 벗어 던질 기세더니.

“찻물 뜨거워? 옷 벗을래?”

난 로웰에게 다시 물었다.

“사실 좀 부끄럽네요, 전하. 전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계속 입고 있어도 될까요?”

“난 상관없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로웰이 웃었다. 그는 찻물이 번진 조끼를 계속 입고서 서류를 꺼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추려 봤어요. 투자 목록이에요. 오랫동안 투자받지 못한 사업을 원하신다면서요?”

“응.”

“사실 그런 사업들은 이유가 있어서 배제된 거지만……. 전하께 생각이 있으시겠죠. 그래도 아주 허황된 건 목록에 포함하지 않았어요. 배를 타고 나가서 일확천금하겠다는 사람들 말이 허황되지 않기도 힘들지만.”

로웰이 목록을 팔랑팔랑 넘겼다.

“제가 가져온 목록의 사람들은 아주 사기꾼은 아니에요. 적어도 출항 의지는 있으니까요. 그래 봤자 어중이떠중이들, 왜 이런 사람들을 알고 싶어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로웰이 손을 멈추고 어딘가를 짚었다.

“이 사람은 배 한 척과 선원 서른 명이면 신항로를 개척하겠다더군요. 항해의 비법을 알아챘다나? 그런 사람이 왜 대함대의 함장이 되지 않고 투자를 받겠다며 빌어먹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 다음 사람은 밀과 금을 바꿔 오겠다더라고요. 그런 재주가 있으면 연금술을 배울 것이지. 그리고 이 사람은…….”

로웰의 설명이 이어졌다. 목록은 끝도 없이 두꺼웠다. 이 사람들이 전부 사업을 하겠다는 사람들이라면 이 나라는 사업가들로 가득 차 있는 셈이었다.

“처음 두 사람으로 하자.”

들어도 모르겠다. 다 실패할 것 같은 사업인데 고를 필요도 없었다.

“예?”

“배 한 척과 서른 명의 선원. 선원들이 먹고살 만큼의 물과 식량. 약품. 의류품. 또 뭐가 필요하지? 충분한 성공 보수. 어차피 선원들은 대부분 노예로 뽑을 거잖아? 선급금은 금화 백 전으로 할까. 그 돈이면 노예 신분을 벗어나고도 남겠지. 항해에서 살아 돌아오면 또 백 전. 성공 보수는 오백 전.”

“잠시만요, 잠깐, 전하. 선급금으로요? 또 성공 보수? 그 전에 살아 돌아오면 돈을 주신다는 게 뭐예요?”

“아니면 저 정신 나간 모험에 누가 지원하겠어?”

로웰이 이마를 짚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선원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성공 보수를 후하게 약속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선수금이 많으면 노예들은 그 돈 받고 도망치겠죠!”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없어.”

“아, 전하. 제 말이 그 뜻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생존 보수는 또 뭐예요? 살아 돌아오는 것만으로 돈을 받을 수 있다면 누가 먼 바다로 나가려 하겠어요?”

내 말이 그 말이었다. 선급금 받고 다 도망치라는 거잖아.

모든 문제에는 출제자의 의도라는 게 있다. 내가 낸 문제는 아주 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난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돈으로 목숨을 사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전하, 제가 쓰레기라는 듯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로웰이 쓴웃음을 지었다.

“널 탓하는 걸로 들려? 내가 쓰레기라는 뜻인데. 목숨을 돈으로 환산하고 있는 쪽은 나잖아.”

처음 투자에 대해 알려 준 건 로웰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요즘 유행이라면 정원 꾸미기랑 투자죠, 역시. 돈 있는 귀족의 기본 소양이잖아요?”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알았다. 조프리가 사치한다는 소문이 제대로 안 퍼지는 이유를.

이 나라 귀족들 돈 너무 쓰는 거 아닌가? 내가 쓰는 정도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난 귀족들 씀씀이를 따라가는 데만도 버거웠다. 매일 어디에 돈을 쓸까 고민해야, 그 씀씀이를 반이라도 따라잡을까말까 했다.

국고엔 돈도 없다는데 귀족들은 부유하기도 했다.

하긴 왕비님도 부유하니까. 이 나라에서 돈 없는 건 백성들뿐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돈 없는 백성들은 자식을 노예로 팔고 스스로를 선원으로 먼 바다에 팔았다. 노예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성황이었다.

그 얘길 해 준 것도 로웰이었다.

이 나라는 어떻게 안 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라가 어려우니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졌고, 국경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올해 내로 출정이 있을 것이다. 바움쿠헨 백작이 내게 언질을 줬다. 곧 자기를 보기 힘들어질 거라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였다면 이 나라가 망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안 망한다는 걸 아니까 백작의 무운도 빌어 줄 마음이 드는 거겠지.

이 와중에 에드워드는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파이 공작의 애제자라는 사실은 이제 왕성에서 비밀도 아니었다.

왕비님은 물론 그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 잘 모르겠어요. 이게 좋은 투자인지.”

로웰이 한숨을 쉬었다.

“좋은 투자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 눈먼 돈이라면 네가 먼저 잡는 쪽이 낫잖아.”

“전하께서는 알기 힘든 분이에요.”

로웰이 말했다.

내가? 나처럼 쉬운 사람이 없을 텐데. 하는 족족 돈 낭비라는 걸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로웰이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기 때문일 터이다.

남을 돈지랄하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거지.

그런데 난 그런 사람이 맞았다.

도대체 소문은 언제쯤 퍼질까.

선원들이 전원 돈 들고 도망칠 즈음?

* * *

왕의 사냥 사랑은 올해도 어김없었다. 로제 부인의 사후 몇 년간 그 좋아하던 놀이도 쉬던 왕은 그동안의 휴식을 보상받으려는 듯 다시 무섭게 사냥에 빠져들었다.

국경에 무슨 일이 있든 백성들이 배를 타고 나가서 죽든, 가을 사냥 대회가 개최됐다.

왕은 성장한 두 왕자가 용맹한 모습을 보이기를 바랐다.

그 말은 사냥 대회에 에드워드가 참가할 거라는 소리였다. 난 아프다는 핑계를 댔지만, 왕은 답변이 없었다. 대신 왕비님이 조프리 궁을 찾아왔다.

“왕자, 어디가 아픈가요? 이 어미가 좀 볼까요? 고개를 들어 봐요…….”

왕비님이 밤새 나를 간호하려고 해서 난 “다 나은 것 같아요, 어마마마. 이제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냥 대회는 내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일정이 아니었다. 왕비님이 직접 찾아오는 데서 알 수 있었다.

왕이 엮이면 왕비님은 날카로워졌다. 조프리에게 관대한 평소의 왕비님이 아니었다.

왕에게 잘 보일 기회라고 생각하시는 걸까. 아니면 이 이상 조프리가 밉보이면 안 된다고 여기시는 걸까.

어느 쪽이든 빠져나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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