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66화 (66/293)
  • 66.

    “정말 소문이 빠르네.”

    “그야 소문이 안 퍼질 만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레이가 내 혼잣말에 반응했다.

    “웬 정원 공사세요? 핑계가 이상한데.”

    “핑계라니? 훌륭한 정원을 갖는 건 교양 있는 귀족들의 꿈이잖아.”

    “전하께서 그런 꿈을 꾸실 줄은 몰랐는데요.”

    “네가 날 알아?”

    그레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대충 6년쯤 알고 지냈으니 전하를 한참 모르죠.”

    “한 사람을 이해하기엔 정말 짧은 시간이네.”

    “네. 저희가 살아온 시간의 절반이 좀 안 되니까요.”

    그레이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렇게나 돼?

    우리 왜 그렇게 어려?

    이 나라는 여름도 겨울도 날씨가 맹숭맹숭했다.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운 날씨가 아니라 눈이 내리는 게 용할 정도였다.

    그래도 초겨울이라 바람이 불면 쌀쌀하긴 했다.

    이 날씨에 야외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봐, 오렌지 백작도 정원 자랑하려 열심이잖아. 정원을 꾸미고 싶어 하는 건 사람의 본성이야.”

    꽃이 지고 낙엽이 진 쓸쓸한 계절이었지만 돌로 장식한 정원은 남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귀족들이 말했다. 내 안목으로는 그런 매력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냥 휑한 정원인데.

    내 눈에는 사실 정원보다 백작의 매력이 돋보였다.

    오렌지 백작은 대단한 부자가 틀림없었다. 외국에서 들여온 기묘한 정원석은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들었다.

    여기에 돈을 얼마나 들였을까?

    백작은 귀족들의 찬사를 받으면서도 나와 그레이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정원을 칭찬할 말을 준비해 둬야겠다.

    그레이도 시선을 눈치챘다.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백작이 야외로 행사 장소를 바꾼 건 전하 때문일걸요?”

    “그래?”

    “전하께서 정원 조경에 관심이 많으시다니까 부랴부랴 바꾼 거잖아요.”

    “겨울 정원에 볼 게 뭐가 있다고?”

    그레이는 그 말을 네가 하냐는 듯이 쳐다봤다. 겨울에 정원을 갈아엎는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했다.

    “뭐, 모든 사람이 전하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내 의도가 뭔데?”

    놀라서 묻자, 그레이는 질색했다.

    “제 입으로 듣길 바라세요? 악취미시네요.”

    악취미라고 할 만한 거린가? 나쁜 평판을 만들고 싶다는 게?

    그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찬사를 듣고 싶으시면 저쪽에 기대하시는 게 어떠세요? 오렌지 백작이 곧 올 것 같네요. 말씀 나누세요.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조프리 전하!”

    그레이가 물러났다. 빈자리로 오렌지 백작이 풍채 좋은 배를 내밀며 다가왔다.

    “제 정원은 둘러보셨습니까? 전하께서 최근 정원 조경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이 정원을 보여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오래전 셔벗 왕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가, 그곳의 바위 정원을 본 뒤로 큰 감명을 받았다고요. 이 나라에서 이만한 규모의 바위 정원을 꾸민 장원은 이곳밖에 없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백작이 뭐라고 말했다. 난 웃으며 오렌지 백작을 맞았다. 사치를 누리기도 쉽지 않았다.

    백작은 정원 조성에 얼마를 썼다는데 평민 가정이 삼십 년은 풍족하게 살 만한 금액이었다.

    나 정도의 사치로는 눈에 띄지도 않는 거 아닐까?

    오렌지 백작은 자신의 정원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나를 끌고 온실까지 들어갔다. 그레이는 내가 어디로 끌려가든 모르는 척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뭘 모르는 척이야. 날 도와.

    내가 그레이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자, 오렌지 백작은 그레이의 존재를 눈치채고 훌륭한 리액션으로 맞이했다.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 아니십니까! 정원 구경을 하고 싶으셨던 거군요? 이거,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께서도 정원을 꾸미는 데 아주 조예가 있으신 분이죠. 제가 말씀드렸습니까? 공작 저에 방문했다가 그 푸른 정원을 보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그레이가 표정으로 내게 욕했다.

    난 무시하고 그레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맞아. 그레이가 잘 꾸며진 정원에 관심이 많지.”

    “역시 그렇군요! 제 회심의 역작을 보여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치의 세계는 넓고도 심오했다.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내 생각이 얕았음을 깨달았다.

    역시 돈도 써 본 사람이 잘 쓰는 모양이다. 난 재주가 없었다.

    “이런 이상한……. 아니 독특한 바위는 어디서 구매했는지 실례가 아니라면 묻고 싶군.”

    오렌지 백작에게 물었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물어보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물론 몽블랑 상단입니다, 전하. 그곳 말고는 이런 상등품을 얻기 힘들지요.”

    또 몽블랑인가?

    행사가 끝나고 나는 다시 로웰 몽블랑에게 편지를 썼다. 이상한 돌……. 아니, 독특한 정원석을 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로웰은 원하는 종류와 모양, 크기를 말해 달라고 답신했다.

    난 가장 비싼 거라고 답장했다.

    며칠 뒤 로웰이 조경 전문가와 함께 왕성을 찾아왔다.

    “정원석 이야기는 이분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왕자 전하께서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로웰이 보조개를 만들며 말했다.

    그래. 내가 도움이 안 될 것 같긴 했다.

    그래도 로웰은 그레이처럼 “전하, ‘가장 비싼 거’는 종류나 모양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닌데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역시 좋은 상인이 될 것 같다.

    * * *

    봄이 되어 날이 풀리자 정원 연못에 사는 잉어도 활동을 개시했다.

    왕비님은 정원의 첫 손님이었다. 왕비님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정원 자랑을 할 생각이 없으니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 될 거였다.

    왕비님은 정자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가다가 잠시 멈춰 섰다. 왕비님의 뒤를 따라가던 시녀들과 기사들, 하인들이 차례로 걸음을 멈췄다.

    시녀가 왕비님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게 양산을 높이 들었다.

    왕비님은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 옆에서 잉어를 구경했다.

    왕비님과 대화를 해야겠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된 지 몇 년 지났다.

    수면 아래서 잉어 그림자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겨울은 다 지났는데 동면이라도 하나 싶었다.

    꼼짝도 않는 그림자를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멍해졌다. 잉어 한 마리에 얼만지 들으면 시녀들도 멍해지지 않을까.

    그런 거금이 드는 것치고 비단잉어를 구경하는 건 재미있지도 않았다.

    생명에 값을 매기고 그 생명체가 내게 가격만큼의 기쁨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건 야만적인 일이지만.

    “아름답네요.”

    “네, 어마마마.”

    왕비님은 구두를 한번 내려다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방금 전 멈춰 선 것도 연못을 구경하기 위해서라는 듯이.

    왕비님의 걸음걸이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등을 곧게 펴고 얼굴에 미소를 띤 모습 그대로였다.

    전날 왕비님의 일정이 떠올랐다. 국빈이 방문해 밤까지 바쁘셨을 것이다. 그 말은 하루 종일 구두 벗을 시간이 없었을 거라는 뜻이었다.

    발이 아플 텐데.

    내가 손을 내밀자, 왕비님은 웃으며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체중은 싣지 않았다.

    조프리의 키는 왕비님을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왕비님이 기댄다고 휘청거릴 정도로 약하지도 않았다. 왕비님을 업고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도 왕비님은 조프리에게 기대지 않았다.

    발이 아프면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될 텐데.

    “정자에 앉을까요? 어마마마를 위해 차를 준비했어요. 차향을 함께 즐기면 정원이 더 아름다울 거예요.”

    “어머나. 기뻐요, 왕자. 그럼 그렇게 할까요.”

    난 왕비님을 정자로 안내했다. 도트가 차를 내왔다.

    손님을 초대한 이상 정원 소개를 안 할 수는 없어서, 나는 아는 대로 얘기했다.

    “연못을 새로 파고 잉어를 입주시켰어요. 잉어가 숨을 만한 공간도 돌과 수풀로 만들었대요. 공사를 하는 김에 장미를 정리하고 주변을 완전히 바꿨어요.”

    정원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하는 건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런 건 오렌지 백작 같은 사람이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난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범주만 설명하고 있었다.

    “자세한 건 조경 담당자가 알 거예요. 누구에게라도 자랑할 만한 정원이래요.”

    그 막대한 돈이 다 어디로 들어갔냐고 물어보실 것 같아서 덧붙였다.

    “그래요. 멋지네요.”

    왕비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왕자는 만족했나요?”

    “네.”

    “그렇다면 됐어요. 왕자는 정원을 좋아했군요. 몰랐네요.”

    왕비님이 말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난 잠자코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왕비님이 다시 찻잔을 들었다.

    “더 필요한 건 없나요? 희귀한 나무라든가. 꽃이라든가. 온실을 꾸며 보는 건 어떤가요, 왕자. 요즘 온실에 새를 기르는 게 유행이라던데.”

    꾸중을 듣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사치를 적극적으로 장려받을 줄도 몰랐다.

    왕비님은 조프리를 뭐로 만들려는 걸까?

    “와. 정말 좋아요.”

    “어머, 별것도 아닌걸요. 왕자가 기뻐해 주니 좋네요.”

    왕비님이 수줍게 웃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조프리 평판은 알아서 나빠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왕비님은 망설이다가 내 손을 잡았다. 머뭇거리는 동작에서 왕비님이 망설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간만의 접촉이었다. 왕비님의 손이 뜨거웠다. 부드러운 살갗에 찻잔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왕자가 정원을 꾸민다는 얘기를 듣고 궁금했어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이 어미를 가장 먼저 초대해 줘서.”

    마시던 차가 명치에 걸린 것 같았다.

    누군가를 아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건 내게 낯선 감정이었지만.

    난 왕비님을 싫어할 수 없었다. 왕비님은 언제든 내 계획을 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왕비님과 보내는 시간은 싫지 않았다. 몇 년 전, 모든 일이 끝장나고, 왕비님이 나를 티타임에 불렀을 때.

    대화 없이 차만 마시고 헤어지던 그때도 알고 있었다. 왕비님이 조프리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서 마음 졸이고 있다는 걸.

    미움받기 싫어서 안간힘 쓰는 상대를 미워하기는 힘들었다.

    이제 곧 왕비님은 내게 실망하게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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