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65화 (65/293)
  • 65.

    허리에서 검을 뽑아 상자를 내리찍었다. 검 끝이 정확하게 이음매를 찔렀지만 상자는 벌어지지 않았다.

    흠집조차 없었다.

    검을 다시 넣고 상자는 서랍에 처박았다.

    혹시나 했을 뿐이다.

    현실로 돌아가는 게 간절한 소망이었던 것도 아니다. 아쉽지 않다.

    반복해서 생각했다. 문제는 없다고.

    “왕자님?”

    도트가 문밖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짐을 더 놓을 공간이 없어요. 아무래도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요.”

    “안 쓰는 방에 넣어 두면 안 돼?”

    “손님용 방이거나 용도가 달라서……. 죄송해요. 어떻게 할까요?”

    “그냥 너 가져.”

    “네?”

    “갖고 싶은 거 가져가. 시종들도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가져가라고 해. 곧 수확제네. 포상이라고 해. 필요 없으면 다 버리든가.”

    “네, 왕자님.”

    도트는 눈치를 보며 나갔다.

    소파에 등을 파묻고 상자를 쳐다봤다.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애초에 내가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머리를 헝클었다. 도트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사 놓은 물건은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포목점에서 가져온 질 좋은 옷감도 있었고 다시 시장에 되팔아도 값을 받을 수나 있을까 싶은 허접스러운 것들도 있었다.

    전부 시가보다 비싸게 주고 사 모았다. 조프리는 멍청해 보일 것이다. 어리석은 왕자라는 평판이 생기면 좋겠지.

    하지만 이걸로 충분하지 않았다. 귀족들의 사치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왕비님께 부탁해 연못을 파고 비단잉어를 데려다 놓자.

    곧 겨울이었다. 잉어를 구하기는 당연히 어려울 거고 연못을 만들기도 어려울 것이다.

    왕비님의 사재는 엄청나게 빠져나가겠지.

    정원 공사는 누가 뭐래도 사치스러운 짓이었다.

    왕비님이 허락할까.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나를 붙잡고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고 할까.

    팽팽하게 당긴 실 끝을 붙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실이 끊어질 것이다. 그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창고가 가득 차 있다는 도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조프리 궁에는 여러 개의 빈방과 여러 개의 창고가 있었다. 평소에도 그 방들은 완전히 비어 있진 않았다.

    왕자쯤 되다 보면 생일 선물로 귀중품을 받을 일도 잦았다.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거나 언젠가 사용하겠지만 지금은 쓰지 않을 물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목마 등이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다.

    새로 산 물건들은 예전에 선물 받아 방치된 귀중품들과 함께 창고에 쌓여 있었다. 귀중품 몇 가지는 궁인들이 포상으로 가져갔지만 그러고도 남은 물건이 많았다.

    “역시 버리기는 좀 그렇지?”

    “좀 그러네요, 전하.”

    도트가 맞장구를 쳤다.

    편의점 폐기 음식도 알바생 식대 대신 지급하던 알뜰한 나라에서 살다 왔다. 유통 기한도 없는 공산품을 그냥 버리는 건 기분이 찜찜했다.

    “기부를 할까?”

    “정말 좋은 생각이세요, 전하.”

    “익명으로.”

    “예?”

    “그편이 더 멋있잖아.”

    “앗. 그렇군요. 왼손이 하는 선행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하는 거군요?”

    도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말했다.

    “맞아. 그거야.”

    “정말 멋져요, 전하.”

    “그러니까 너도 소문내면 안 돼.”

    “물론이에요, 전하.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와 도트는 한밤중에 담요나 진귀한 장난감, 인형 같은 것을 묶어 정리했다. 반짝거리던 물건을 거대한 보자기에 포장했더니 보기에 영 좋지 않았다.

    수상쩍은 망태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런 걸 고아원 앞에 두면 누가 쓰레기 버리고 간 줄 알지 않을까?

    “편지를 쓰는 게 어떨까요? 쓰레기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거예요.”

    도트가 아이디어를 냈다.

    설득까지 해야 돼?

    설득이 필요한 비주얼이긴 했다.

    “그거 좋은 방법이다.”

    난 서재로 가서 편지지와 잉크를 꺼냈다. 예의를 갖춰 편지를 썼다.

    이 물건들은 쓰레기가 아니며 범죄에 연루된 물건도 아니고, 도난당한 물건도 아니며 어떤 조직의 비밀이 담긴 물건도 아니다.

    아이들이 잘 사용해 줬으면 해서 보내는 것이니, 보낸 사람의 정체는 추적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다 써 놓고 읽어 보니 어쩐지 더 수상해졌다.

    의심하지 말라고 써 놓은 부분이 특히 그랬다. 기분 탓인가?

    익명이라 더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가명이라도 쓰면 어떨까요?”

    도트가 제안했다.

    “그거 괜찮은데.”

    기부자의 이름은 익명의 부자 라인 씨로 정했다.

    이미 이름을 붙인 데서 익명이 아니었지만.

    이름 짓는 재주는 없어서 도트의 이름을 변형했다. 기초 영어를 공부하는 느낌으로. 도트가 옆에서 “멋져요, 왕자님. 어떻게 생각하신 이름이에요?” 하며 칭찬했다.

    진심인가?

    대단한 뜻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익명의 부자 라인 씨는 앞으로도 고아원에 여러 물품을 기증할 예정이었다.

    이걸로 창고 과포화 문제는 해결된 듯했으나, 또 문제가 있었다.

    “이 물건들을 누가 운반해 주죠?”

    짐마차 몇 대가 필요한 양이었다. 도트와 나는 다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믿을 만한 배달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운송 서비스는 상단이 도맡아 했다.

    몽블랑 상단?

    다시 서재에 앉아 편지를 썼다. 로웰 몽블랑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일이 커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다. 로웰을 끌어들여도, 이 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도트와 로웰 정도였다. 게다가 두 사람은 내 진짜 목적을 알지도 못했다.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왜 세상엔 쉬운 일이 없을까?

    * * *

    티타임 시간에 맞춰 왕비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파이 공작이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파이 공작의 이동 반경은 조프리와 겹치는 데가 있었다. 공작의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은 조프리 궁과 왕비궁 중간에 위치했다. 신경 써서 피하지 않으면 이런 곤란한 사태를 맞이하곤 했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난 먼저 인사했다.

    파이 공작은 십 미터 앞에서부터 날 발견한 게 분명했다. 눈이 마주쳤다. 피하면 티 날 것이다.

    “조프리 전하. 격조했습니다.”

    파이 공작은 나를 천천히 살펴봤다. 그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그랬는데, 내가 키가 크고 나이를 먹은 게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안경을 쓴 냉정한 얼굴이지만 표정에서 놀라움이 느껴졌다.

    “예. 그간 잘 지내셨어요?”

    “걱정해 주신 덕에 잘 지냈습니다. 전하께서는 잘 지내시는 것 같더군요.”

    “소문이 거기까지 닿았나요?”

    “예. 소문이란 것은 대개 믿을 것이 못 되고, 전하에 관한 소문은 너무 많아 사소한 것까지 세자면 손발이 모자를 지경이지만 말입니다. 사람의 눈과 귀를 피해도 함부로 놀리는 입은 피할 수 없어서 소문은 귀에 들려옵니다.”

    파이 공작은 웃음기 없이 대답했다.

    “예……. 제 소문이 많군요?”

    난 이해한 것만 물었다.

    “그렇습니다.”

    파이 공작이 대답했다.

    “무슨 소문일까요?”

    원하는 소문이 벌써 났을까 싶었는데 파이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안 좋은 소문인 모양이었다.

    공작은 안경 너머로 나를 찬찬히 바라봤다.

    하기야 사치스럽고 어리석다는 소문을 당사자 앞에서 말하긴 껄끄러울 것이다.

    기온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연못을 만들 인부를 모으고 조경에 사용할 꽃나무를 구매했다.

    조경 담당자는 정자가 보이는 곳에 연못을 만들려면 장미의 위치를 옮겨야 한다고 했다.

    난 허락했다.

    정원을 갈아엎는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왕자가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순조롭게 퍼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 소문인지 알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자도 아닌데요.”

    “전하의 스승이길 포기한 기억은 없습니다.”

    파이 공작은 뜻밖의 말을 했다.

    “음. 제가 제자이길 포기했다는 뜻도 아니었어요.”

    “기쁘군요.”

    정말요? 되물을 뻔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파이 공작은 정 많은 선생님은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따듯한 말이었다.

    소문이 많이 안 좋은가.

    성 밖의 소문은 듣기 어려웠다. 왕성에 살면서 불편한 점은 성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거였다.

    정보의 접근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도트를 비롯한 이 성의 시종들은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은 들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소문이 돈다고 시종들을 처벌할 것도 아닌데.

    회유해도 통하지 않았다. 하기야 궁인들은 눈칫밥을 먹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윗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쁜 소문은 나도 듣고 싶지 않았다.

    누가 날 욕하리라 예상하는 것과 진짜 욕하는 소리를 듣는 건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시종들은 눈치가 빨랐다.

    * * *

    “정원 공사를 하신다면서요?”

    그레이가 물었다. 야외 자선 행사장은 사람으로 가득했지만 그레이와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상의 아들과 같이 다니면 좋은 점은 그 외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왕자와 소공작에게 인사하러 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둘 사이에 끼어서 대화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