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도련님?”
“도련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직원들이 옆자리에게 물었다. 난 양도서에 사인을 하고 ‘소원의 상자’를 받았다.
게임 속 비주얼 그대로였다. 상자가 행운을 가져다주는지 여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이게 게임 속 그 아이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은 갖고 있었다.
진품인 것 같았다.
어떡하지. 기대감이 생기려고 했다. 섣불리 기대하고 싶지 않은데.
아마 이 상자는 내 목적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게임 아이템 하나나 던져 주겠지.
안 좋은 생각을 계속 하려고 했다.
최악의 경우 상자에서 아무것도 안 나올지도 몰랐다.
게임 본편은 시작도 안 했으니까, 아이템도 작동이 안 될지도.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았다. 기대하지 않는다. ‘소원의 상자’에 손을 넣었는데 먼지만 나오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흠. 정체를 들켜 버렸네. 들었지? 내가 로웰 몽블랑이야.”
갑자기 옆자리가 말했다. 경매장 직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무슨 정체? 너 슈퍼 히어로야?
잠시 뒤 귀로 들은 말이 이해됐다. 얘가 로웰 몽블랑이라고?
마지막 공략 캐릭터 로웰 몽블랑은 몽블랑 상단의 막내아들로, 부자에 바람둥이라는 설정이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긴 속눈썹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눈꼬리 밑의 점.
얼굴을 보니 전부 해당되긴 했다.
능글거리는 성격인 데다 얘가 품는 연애 감정이란 게 깃털처럼 가벼워서, 플레이할 때 여주인공에게도 가장 아무렇지 않게 들이대는 캐릭터였다.
아카데미 가서야 만날 줄 알았는데.
이로써 난 공략 캐릭터를 전부 만난 셈이었다. 그렇다고 누가 칭찬해 주는 건 아니었지만.
“정식으로 인사할게. 내가 이 사기꾼 같은 상단의 아들이야.”
로웰이 손을 내밀었다.
“솔직히 말하는데, 우리 돈 되는 건 다 팔거든? 돈 안 되는 것도 될 것처럼 꾸며서 팔아. 네가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야. 내 또래기도 하고, 우리 언제 파티장에서 만날지도 모르고, 그럼 내 기분이 얼마나 찝찝하겠어?”
로웰이 장황하게 말했다. 그러는데 혀가 한 번도 꼬이지 않았다. 말 잘한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거 환불할 마지막 기회라는 거지. 내가 책임진다.”
“도련님! 사기꾼이라뇨!”
“손님 앞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직원들이 로웰을 성토했다.
“아, 사기꾼 맞잖아? 소원의 상자가 뭐야? 아예 ‘장수하는 약수’ 같은 거 만들어서 팔아 보지 그래? 돈 되겠네.”
“헉. 도련님은 천재세요.”
“위에 건의해 볼게요.”
직원들이 말했다. 로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 이런 데라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로웰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악수하자는 뜻 같았다.
날 호구 취급하고 있긴 해도 기본 심성이 좋은 애였다. 보통 돈 쓰겠다는 사람을 판매자가 저렇게 말리는 경우는 드물다.
로웰은 양심적이고 좋은 상인이 될 것 같다. 아니면 집안 말아먹거나.
난 로웰의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로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어. 나도 반가운데, 그 상자 달라는 뜻이었어.”
아, 그런 뜻? 그런데 로웰이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난 로웰을 쳐다봤다. 로웰이 보조개를 만들며 웃었다.
뭐지?
“상자는 됐어. 나도 만나서 반가웠어. 좋은 거래 감사해요.”
난 로웰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내가 환불하겠다고 할까 봐 걱정했던지 직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꼭 찾아 주세요.”
“카탈로그를 받아 보고 계신가요? 아니라면 자택 주소를 알려 주세요. 매달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왕성 주소를 알려 줄 순 없었다. 직원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객님과의 소중한 인연, 간직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왜 이렇게 멘트가 낯익지? 상자를 품에 안고 경매장을 나섰다.
소원의 상자.
다시 심장이 뛸 것 같았다.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야.
그런데 일어나면 어떡하지?
이렇게 설레면 안 되는데.
로웰의 얼굴이 불쑥 시야에 끼어들었다.
“이름 안 알려 줄 거야? 난 정식으로 자기소개까지 했는데.”
“도련님은 당신 같은 사람에게 알려 줄 이름 없어요!”
도트가 으르렁거렸다.
도트는 내 시장 외출에 자주 어울려 다녔다. 상대가 반말 쓴다고 이렇게 화낼 애가 아닌데.
“도트?”
“도련님, 저희 돌아가야죠!”
도트가 씩씩거렸다. 게임 속에서 로웰을 싫어하던 알렉스가 떠올랐다.
로웰은 성실한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어그로를 끄는 타입인지도 모르겠다. 첫눈에 불성실한 성격이 보이나?
로웰이 웃었다. 보조개가 움푹 들어갔다.
“너 되게 사랑받는구나? 하인이 지극 정성으로 방어하는데.”
“너 나 공격했어?”
“아니, 그 뜻이 아니라…….”
로웰은 당황하더니 갑자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인사할래?”
“방금 했잖아.”
인사 못 해서 한 맺힌 귀신이 들렸나. 아까 전에 내가 악수했을 때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더니.
“난 네 이름 못 들었잖아.”
“도련님! 이 사람 상대하지 마세요!”
도트가 말했다. 그냥 상대하고 보내는 게 더 빠를 텐데.
“조프리.”
이름을 알려 줬다.
“조프리 왕자랑 이름이 같네. 흔한 이름이 아닌데. 설마 조프리 왕자가 암행을 나왔는데 나랑 우연히 마주친 거 아냐? 막 이래.”
로웰이 하하 웃었다.
나랑 도트는 웃지 않았다.
“……정말?”
로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무릎 꿇었다.
“조프리 전하. 미천한 신이 전하를 알아보지 못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벌해 주십시오.”
얜 어디 가서 눈치 없어서 곤란할 일은 없겠다. 로웰이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자 우리를 구경하던 직원들도 전부 무릎을 굽혔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머리꼭지만 보였다.
어떡하죠? 당황한 도트가 눈으로 물었다. 지금껏 외출 중에 왕자라는 사실을 들킨 적은 없었다.
뭘 어떡해.
“몽블랑 상단은 돈이 되든 안 되든 팔 수 있는 건 다 판다며.”
로웰이 한 말을 인용했다.
“예, 예. 전하.”
“카탈로그는 왕성으로 보내 줘. 내가 관심 가질 만한 물건이 있으면 왕성으로 직접 와서 소개해 줘도 좋고.”
“관심 가질 만한 물건이라면 어떤 물건을 말씀하시는지……?”
“글쎄? 비싼 거?”
정확한 말을 떠올렸다.
“진귀한 것. 보기 드물고 신기한 것.”
게임 아이템 같은 거.
혹시 모른다. 몽블랑 상단은 발이 넓었다. 왕자로 살면서도 발견하지 못한 게임 아이템들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그런 걸 가져와. 네 무례를 용서해 줄게.”
겁먹었나 싶던 로웰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예, 전하. 왕성에는 전하의 부름으로 방문했다고 전하면 될까요?”
“그래야겠지?”
로웰은 활짝 웃더니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관대한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트가 투덜거렸다.
“정말 무례한 작자네요! 몽블랑 상단의 막내아들에 대해 돌던 소문이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어요.”
“그래? 좋은 상인이 될 것 같던데.”
양심적인 성격이었다. 장사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앗. 그렇군요.”
“로웰이 마음에 안 들어?”
“왕자님, 모르셨어요?”
되레 도트가 물었다.
“뭘?”
도트가 눈을 굴렸다. 그가 배시시 웃었다.
“모르셨군요! 생각해 보니까, 왕자님이 아실 필요 없는 사안 같아요.”
“그러니까 뭐가?”
“앗. 왕자님. 저 짐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도트는 티 나게 화제를 돌리더니 내 앞에서 사라졌다. 곧이어 호위 기사들이 짐을 방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기사들은 언짢아 보였다. 물론 짐꾼 역할은 기사들의 일이 아니었다.
언제쯤 소문을 내 줄까. 기사들은 인내심이 좋은 편이었지만, 왕자의 시장놀이에 어울려 주며 즐거워할 정도로 관대한 성품은 아니었다.
멍청한 왕자가 말도 안 되는 물건에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 있더라는 식의 소문을 내 주면 좋을 텐데.
기사도 시종도 사라진 방에 혼자 남았다. 난 ‘소원의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잠시 쳐다봤다.
이 아이템이 정말로 사용자가 원하는 걸 가져다준다면, 내가 꺼낼 물건은 하나밖에 없었다.
현실로 돌아갈 열쇠.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존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혹시나…….
‘소원의 상자’는 갈색 가죽으로 만든 작은 상자였다. 세공도 장식도 없고 크기는 두 손 안에 들어올 정도였다. 들어 보면 겉면은 단단했고 안은 텅 빈 것처럼 가벼웠다.
자물쇠는 없었고, 형식적인 잠금쇠가 걸려 있었다. 거는 부분을 위로 올리면 열리는 형식이었다.
잠금쇠를 올렸다.
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팔에 힘줄이 설 정도로 당겨도 마찬가지였다. 상자 윗면과 아랫면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이게 뭐야. 허탈해져서 테이블에 던져 놨다.
퍽 소리가 났지만 상자는 상하지 않았다. 테이블에 긁힌 자국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