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안내 직원이 로웰의 얼굴을 알아봤다.
“도련님? 어쩜 연락도 없이 찾아오셨어요.”
“그렇게 됐어. 나도 경매 구경할래. 앞에 들어간 사람 옆자리로 부탁해.”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웰이 문득 물었다.
“오늘 특상품이 있어?”
“인어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보석이 오늘 마지막 순서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 거 말고, 특이한 건?”
“어떤 종류를 말씀하십니까? 경매에 나올 물품이야 도련님도 아시잖습니까.”
“없으면 됐어.”
로웰은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실내에 높은 의자. 참가자들은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앞서 안내받고 있는 도련님과 그 하인이 보였다. 로웰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따라갔다.
빈자리가 많았다. 참가자들은 서로 간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고, 로웰이 정말 자연스럽고 싶었으면 여러 비어 있는 자리 중 하나를 골라 앉아야 했다.
하지만 로웰은 도련님 옆자리에 냉큼 앉았다. 도련님이 그를 돌아봤다.
“안녕?”
로웰이 상쾌하게 인사했다. 뺨에 보조개가 패었다.
그의 미소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얼이 빠지거나, 저도 모르게 마주 웃거나.
도련님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안녕.”
그는 낮고 부드러운 어조로 인사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어? 이게 아닌데.
로웰이 다시 말을 걸려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도련님이 대동한 하인이었다.
세상엔 나이가 들어도 천진한 인상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인은 그런 부류였다. 성인 남자의 키에 늘씬한 체격이었지만 얼굴은 소년 같았다.
로웰은 다양한 미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인에게도 웃어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지 못했던 건, 하인이 죽일 듯이 로웰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로웰은 자신의 얼굴이 주는 영향을 알았다. 그가 수작을 부려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겁게 받아들이는 건 얼굴 덕이 30퍼센트는 된다고 겸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은 로웰의 얼굴을 원수라도 되는 듯 쏘아봤다. 로웰은 신기한 나머지 화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하인이 방긋 웃는 얼굴로 “네, 도련님.” 하고 말했다. 도련님이 하인에게 뭐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목소리가 작아서 로웰에게 들리지는 않았다.
“앗. 네. 소원의 상자 말씀이시죠?”
하인이 말했다.
“목소리 낮춰.”
도련님이 주의를 줬다.
“죄송해요, 도련님.”
“그런 걸 누가 노릴까 싶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그렇군요!”
하인이 맞장구를 쳤다.
소원의 상자? 저 귀족 도련님이 노리는 물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단순히 구경을 온 모습이 아니었다.
로웰은 뒤늦게 카탈로그를 펼쳤다. 페이지를 넘겼다. 소원의 상자. 경매품 가운데 그런 물건이 있기는 했다.
중반부에 소개되는 물건으로, 당연히 특상품은 아니었다. 이름부터가 일단 수상쩍었다.
-특별한 힘이 있다고 전해지는 상자. 사용자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이게 뭐야…….”
로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런 사기 같은 물건을 보고 사러 오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실내 불이 전부 꺼졌다. 참가자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이내 경매장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켜졌다.
사회자가 걸어 나왔다. 로웰은 곁눈질로 도련님을 쳐다봤다. 조명에 흰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진심인가?
문득 저 도련님이 시장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물건을 사던 모습이 떠올랐다. 알고 모른 척해 준 게 아니라 정말 몰랐던 거 아냐?
로웰은 자신의 판단력에 의문을 품었다.
* * *
‘소원의 상자’는 게임 설정상 플레이어에게 그 순간 가장 필요한 물건이 나오는 랜덤 아이템이었다.
플레이어가 공략에 필요한 물건을 얻지 못하거나 망가뜨렸을 때 ‘소원의 상자’를 이용하면 똑같은 아이템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이 게임 세계관에는 마법이 없는 대신 연금술이 존재했다. 마법만큼이나 여기저기 갖다 붙일 수 있는 치트 키였는데, 그냥 세계관을 짤 때 말이 안 되는 내용을 말 되게 만들려고 제작자가 갖다 붙인 설정 같았다.
예를 들어 이 세계관에는 온수 욕조가 있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해 왔지만, 실은 굉장히 이상한 설정이었다.
증기 기관차도 없는 세계에 온수 욕조라는 사치품은 있는 것이다. 하긴 여주인공이 한겨울에도 찬물로 씻고 있으면 플레이어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밤새 켜 놓아도 불이 꺼지지 않는 촛불도 이 연금술의 성과였다. 이 세계에서 마법인지 과학인지 의심쩍은 건 그냥 연금술의 결과물이겠거니 생각하면 됐다. ‘소원의 상자’처럼.
귀족의 아이들은 15세가 되면 외부 활동을 시작했다. 왕비님은 조프리 역시 그 일정에 맞춰 여러 파티에 보내려 하고 있었다.
외부 일정이 잦아지다 보니 자연히 조프리의 자유도는 늘었다. 조프리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계획을 시작할 때였다.
사치와 주색.
그런데 주색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혀서 일단 사치부터 해 보기로 했다.
난 시장에 나가 이상한 물건을 사들이고 궁에 쌓아 두는 일을 반복했다.
왕비님이 어디다 돈을 쓰고 다니느냐고 한번 부르실 줄 알았는데, 그럴 기미는 없었다. 언젠가부터 왕비님과 내 관계는 상당히 조심스러워져서, 껄끄러운 화제가 생기면 서로를 약간 피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싸우고 싶지 않다. 왕비님을 울리고 싶지 않다.
그 생각은 왕비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왕비님은 내가 아무리 이상한 짓을 해도 내버려 뒀다.
그렇다고 조프리를 포기한 건 아니어서, 내가 참석해야 할 파티와 모임의 명단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모두 참여한다면 과로사도 가능할 듯했다.
15세에 과로사라면 예상 수명이 3년이나 줄어드는 셈이다. 왕비님도 그건 바라지 않을 것 같아서 난 많은 파티에 불참했다.
왕비님은 그런 일에 대해서도 별다른 말씀이 없었다.
‘소원의 상자’는 내가 사치를 즐기다가 알게 된 정보였다. 지금껏 경매는 시간이 맞지 않아 참석할 일이 없었는데, 이번 경매에는 ‘소원의 상자’가 출품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원의 상자’가 내게 필요한 물건을 꺼내 줄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게임 속 아이템. 퀘스트를 위한 일회용 만능 치트 키.
내가 원하는 건 퀘스트를 해결할 물품이 아니지만.
조프리는 뭐든 살 만한 돈이 있으니까.
“다음 경매 물품은 ‘소원의 상자’입니다. 이 물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위대한 연금술의 산물이죠. 가지고 있으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거부 안젤레오스의 소유물로, 그의 사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물건입니다. 소원이 있으십니까? 소원을 이루고 싶지 않으십니까? 5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소원의 상자’는 볼품없는 외향이었다. 빛 속에서 작은 갈색 상자는 더 초라해 보였다.
내가 원하는 물건이 맞았다.
난 가격을 열 배로 올렸다. 사회자가 되물었다. “열 배? 열 배 맞으십니까?”
따라붙는 사람은 없었다.
낙찰됐다.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너 제정신이야?”
도트가 숨을 들이켰다. 왕자님께 불경하게, 라고 생각하는 게 뻔했다. 그를 가로막고 옆 사람에게 대꾸해 줬다.
“모르겠는데.”
조프리가 미쳤다는 소문이 도는 게 좋을까? 왕비님이 참아 주기에 좀 심한 소문이 아닐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럴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옆 사람은 내가 조프리라는 걸 모른다.
“저딴 걸 그 돈 주고 사? 그만한 돈은 있어? 아니, 오해하지 마. 널 무시하려는 건 아니야. 그런데 너 호구 같아.”
옆자리 사람은 조프리 또래로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잘난 얼굴이었고 옷차림도 멀끔했다.
귀족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매에 찾아올 정도니 아마 귀족이겠지.
조프리 왕자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기억을 심어 주기도 뭐해서 계속 아닌 척하기로 했다. 도트 때문에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돈은 있고 호구도 아니야.”
“경매는 처음이지? 괜찮아. 내가 취소 절차 밟는 법을 알려 줄 수 있어. 어렵지 않아.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니까, 나랑 잠깐 가자.”
옆자리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왜? 소원을 들어주는 상자라는데 헐값에 산 거 아냐?”
“으흠. 맞는 말이야. 소원을 들어주는 상자라는 게 있겠냐?”
“맞는 말이라며?”
“그냥 맞장구친 거야. 진짜 소원을 들어주는 상자 같은 게 있으면 그 가격으로 살 수 있겠냐?”
옆자리는 내가 호구인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좋은 거래를 한 거지.”
“이 호구를 어떻게 설득하지?”
저게 혼잣말인가?
적당히 상대해 주면 갈 줄 알았는데 옆자리는 내가 경매품을 받고 값을 계산할 때까지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