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62화 (62/293)
  • 62.

    꼬리 내린 개가 되자는 계획이었다.

    계획을 세워도 기운이 나진 않았다. 내 계획은 지금껏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호의를 얻는 것보다 내 평판을 망가뜨리는 게 쉬울 것이다.

    좋아. 조프리 왕자의 평판을 망쳐 보자.

    일단 생각나는 방법은…….

    ‘전하께서도 은밀한 자금이 필요하신 건 아니겠죠. 그래도 거긴 피하시길 바랍니다. 평판에 좋을 거 없으니까요.’

    ‘은밀한 자금이 대체 뭔데?’

    ‘뭐,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이 있으니까요.’

    바움쿠헨 경이 대답을 피하던 이런저런 일.

    도박?

    열한 살 애를 도박판에 끼워 줄까?

    머릿속을 뒤져 봤다.

    조프리가 되고 몇 달, 내 머릿속엔 이런저런 역사 지식이 가득했다. 다 가상 게임 세계의 역사긴 하지만.

    역사서에 따르면 나라를 말아먹은 왕들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했다.

    사치와 주색.

    뒤에 건 나이 제한이 있었다. 그렇다면 사치?

    그건 나이 제한이 없나?

    * * *

    칩거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도트는 내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성내에 돈다고 말했다.

    왕비님의 시녀가 나를 찾아왔다.

    ‘친구를 만날 정도로 회복되었다고 들었어요.’

    ‘나를 만나러 와 줄 수 있나요?’

    시녀가 왕비님의 말을 전달했다.

    나는 도트를 대동하고 궁을 나섰다. 맨몸으로 볕을 받는 게 몹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종들이 길가로 몸을 피한 채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 움직이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전에도 시종들은 조프리에게 깍듯했는데, 그게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왕비님의 권위.

    시종들은 에드워드에겐 이러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들다 눈을 의심했다.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보여서.

    멀리 에드워드가 다가오고 있었다.

    난 걸음을 멈춰 섰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손에 배어서, 내가 주먹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길은 아닌 것 같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난 도트의 팔을 잡고 걸음을 돌렸다.

    에드워드가 무서웠다. 그가 내게 무엇을 해서라거나,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거라서라거나,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잠든 엄마를 버려두고 집을 나오던 밤이 떠올랐다.

    그날 이후 난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아들이었다. 공부하라는 말은 듣지 않았지만. 길에서 휴대폰 하지 말라는 말도 결국 듣지 않았지만…….

    언제나 엄마의 말은 어길 수 없었다.

    ‘널 보고 싶지 않아.’

    그 말은 주문 같았다.

    난 따를 수밖에 없었다.

    17. 그동안의 일

    15세.

    왕국 3대 상단 몽블랑의 막내 로웰 몽블랑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열 살에 첫 연애를 겪고, 로웰은 인생의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감을 잡았다.

    아버지처럼 돈을 세는 재미도 좋고 비단옷에 산해진미도 좋았으나, 사랑이 없어서야 그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진리를 깨우친 로웰은 각국에서 행복한 연애 사건을 저지르고 다녔다.

    그러나 아버지는 로웰의 인생관에 대해 견해가 달랐다. ‘이 망나니를 어디다 묶어 놔’라는 게 아버지의 의견이었고, 로웰은 몇 년간 감시인을 따돌리는 데 하루 대부분의 에너지를 사용했다.

    로웰이 15세가 되자, 로웰의 아버지는 그를 묶어 놓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인을 붙여 놓은 건 악수였다. 하인을 통해 로웰의 상대를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차라리 이놈에게 수습 가능한 사고만 치겠다는 다짐을 받고 놓아주는 게 낫지 않을까?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로웰의 아버지는 속 쓰림으로 고생하다 생각했다.

    그리하여 로웰은 15세 생일 선물로 하인 없이 혼자 돌아다닐 자유를 얻었다.

    하인 없이 자유롭게라고 해도 그가 정말 혼자 다니는 건 아니었다. 몰래 따라붙은 호위가 있을 것이다.

    로웰은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도련님이라는 느낌이 들게끔 사람들이 따라붙는 게 싫을 뿐이었다. 인생에는 낭만과 자유가 필요했는데, 이 두 가지는 구속된 상태로는 얻을 수 없다는 특징이 있었다.

    하인이 따라다니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처럼.’

    “왕……. 도련님, 그것도 사시려고요? 가져온 주머니도 가득 차서 더 넣을 곳이 없는데요!”

    “내가 들고 다니지 뭐.”

    “앗, 안 돼요. 차라리 제 목에 걸게요.”

    “됐어. 너만 짐을 지고 다니면 눈에 띄잖아.”

    귀족 도련님과 하인처럼 보이는 말쑥한 두 소년이 시장 대로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도련님 쪽은 곱게 자란 인상이었고 많은 미인들을 보아 온 로웰의 심미안에도 상당한 미인으로 분류될 만한 소년이었다.

    하인은 도련님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는데 귀여운 인상의 얼굴이었다. 명망 있는 가문쯤 되면 가까이 두는 사용인 역시 외모를 따지기 마련이었다. 자세가 바르고 발음이 좋은 걸 보아 대귀족의 하인이 아닐까 싶었다.

    도련님과 하인은 되도 않는 주제로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하인은 ‘도련님이 짐을 드는 게 더 눈에 띈다.’고 주장했고 도련님은 ‘넌 물건을 더 들 손도 없잖아.’라고 반박했다.

    로웰이 보기에 두 사람은 이미 눈에 띄었다. 뭘 하면 눈에 안 띌 수 있는 조합인지조차 의문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갔다. 무시하고 지나치기에 두 사람이 너무 눈에 띄는 외모를 지녔다. 게다가 둘은 어떻게 봐도 귀족 소년과 그 종자였다.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류는 아니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로웰의 눈에는 두 사람을 호위하는 기사의 모습도 보였다. 기사는 고급 로브를 두르고 두 사람에게서 두 칸 떨어진 가게에 서 있었다.

    로웰의 호위는 자신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이라도 했는데 저 기사에게서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기사를 의식하지 않았다. 기사의 호위가 공기처럼 익숙하거나 아니면 아예 기사의 존재를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시장 구경에 빠져 있는 듯했다.

    흥미가 생긴 로웰은 두 사람에게 슬쩍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도련님은 멀리서 관찰한 것보다 더 미인이었다.

    피부가 깨끗하고 검은 머리카락은 부드러워 보였다. 더 다가가면 좋은 향이 날 것이다.

    그사이 노점 주인은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질러 보고 있었다.

    “그건 하나에 금화 1전입니다.”

    도련님이 집어 든 건 싸구려 담요였다.

    “이건?”

    도련님이 거대한 인형을 가리켰다.

    “2전만 받겠습니다.”

    상인이 인심 쓰듯 말했다.

    로웰은 내심 혀를 찼다. 도련님이 웃는 걸 봐서였다. 상쾌한 미소는 아니었다. 쓴웃음에 가까웠다.

    저 도련님은 덤터기 썼다는 걸 알고 있다.

    저만한 귀족 가문의 소년이었다. 노점 주인이 잘못 걸렸다고 생각했다.

    “도트, 계산해 줘.”

    “예, 도련님.”

    그런데 도련님은 군소리 없이 하인을 불렀다. 시장 가격을 알기로는 도련님보다 더할 하인도 별말 없었다.

    뭐지?

    로웰에겐 고칠 수 없는 기질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지독한 호기심이었다.

    도련님과 하인은 결국 짐을 나눠 들기로 합의한 듯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나눠도 짐이 많았다.

    거대한 인형을 들고 고민하던 도련님이 문득 로웰 쪽을 바라봤다.

    로웰은 움찔했다. 나를 알아챘나?

    아니었다. 로웰의 뒤에서 ‘나 호위 기사요’ 하고 티 내고 있던 기사가 도련님에게 다가갔다.

    잠시 뒤 기사는 거대한 인형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호위가 있는 걸 알았구나?

    로웰은 점점 재미있어졌다. 저 도련님은 로웰 또래로 보였다.

    로웰 몽블랑이라는 이름을 걸면 수도의 파티는 대부분 참여할 수 있었다. 왕실 주최의 파티까지는 무리였지만, 그런 고급 파티는 로웰도 관심 없었다.

    로웰은 재미있을 만한 파티는 웬만해서 빠지지 않았다. 덕분에 수도의 어지간한 귀족 자제들과는 안면이 있었다.

    그런데 저 도련님은 어떤 파티에서도 본 기억이 없었다.

    “이쪽이지?”

    “예, 도련님. 대로를 따라 쭉 가면 나온다고 했어요.”

    짐을 정리한 도련님과 하인은 이제 길을 찾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 걸까?

    로웰은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당황한 로웰의 호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련님, 저쪽도 호위가 붙어 있습니다.”

    “알아. 조금만 구경할 거야.”

    “마찰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잘 무마해 봐. 돈 뒀다 어디 써?”

    “도련님…….”

    호위는 앓는 소리를 냈으나 결국 로웰의 뜻을 따랐다.

    귀족 도련님과 하인은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로웰에게는 의외이면서 익숙한 장소였다.

    몽블랑 상단 소유의 건물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늘 몽블랑 상단이 주최하는 경매가 열렸다.

    경매 참가자였나?

    로웰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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