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61화 (61/293)
  • 61.

    16. 계획

    난 파이 공작의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내가 보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에드워드가 수업을 거부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파이 공작의 수업을 듣지 않으면 에드워드는 공부라는 걸 할 수 없게 된다.

    아프다는 핑계는 쓸 만했다. 왕비님은 내게 조심스러웠고, 괜한 문제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나를 만난 사람은 그레이밖에 없었다. 애초에 조프리의 병문안을 오는 건 그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레이는 조프리의 미래에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어떤 종류의 미래가 됐든.

    내가 한 달이 넘어가도록 수업 거부를 하고 왕비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을 무렵, 그레이가 두 번째 병문안을 왔다.

    “보충 수업을 해 드릴게요. 허락하신다면.”

    그레이는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허락이고 뭐고…….

    “네가 왜?”

    “왕자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왜?”

    “환심을 사고 싶어서요?”

    그레이가 단정한 미소를 만들며 말했다.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 안 해?”

    나한테 환심 사서 뭐하려고?

    “너무 늦은 건 없어요. 전 왕자님께 도움 될 자신이 있거든요.”

    “아, 그래…….”

    할 말이 없었다. 얜 뭘 먹고 이렇게 자신 넘치는 걸까?

    하긴 그레이가 내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건 아니다.

    그레이의 수업은 놀랄 만큼 효과적이었다. 의욕 없이 책 한 바닥을 외우고, 난 놀라서 그레이를 쳐다봤다.

    “잘 가르치잖아?”

    “그게 놀랄 만한 일인가요?”

    그레이가 불쾌해했다.

    “전에 에드워드한테 설명 들었을 땐 못 알아듣겠던데.”

    “에드워드 전하는 영민하시죠.”

    그레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좀 괴상하긴 하지만……. 모르겠어요. 어쩌면 천재일지도 몰라요.”

    “아, 그래?”

    그런데 왜 싫어하지?

    “전 천재가 아니라 확신할 수 없지만요.”

    그레이가 결론을 내렸다.

    에드워드의 보충 수업이 거지 같긴 했다. 걔가 똑똑해서 그렇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가 놀랐던 건 그레이의 입에서 겸손한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 너 천재 아니었어?”

    “저야 또래에서 견줄 사람이 몇 없을 정도로 영리한 정도죠. 별거 아니에요.”

    그레이가 겸손한 척했다. 그래, 좋겠다.

    “그래서 말인데, 왕비님과 폐하께서 크게 다투셨어요.”

    그레이가 날 힐끔 보며 말했다. 그가 천재가 아니라는 거랑 왕비님과 폐하의 관계가 순조롭게 악화되는 게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들으셨나요?”

    “응.”

    “이유도요?”

    “아니.”

    “쓸모없는 시종을 두신 것 같은데요.”

    식은 차를 가져가려던 도트가 멈칫했다.

    “내 시종 괴롭히지 말고 말해 봐.”

    “에드워드 전하께서 습격당하셨어요.”

    “뭐?”

    어쩔 수 없이 왕비님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로제 부인의 무덤에 다녀오시다가요.”

    부인의 무덤은 왕궁 밖에 있었다. 그녀는 왕실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순간적으로 온갖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는 왕궁 밖에 나가지 않는다. 위험하니까. 로제 부인을 보러 가다가 그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부인이 슬퍼할 테니까.

    하지만 이제 슬퍼할 부인은 죽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에드워드는, 무사해?”

    “예. 생채기조차 없으세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습격자는 단 세 명이었고, 에드워드 전하의 호위는 그 다섯 배는 됐거든요.”

    “다행이네.”

    “하지만 폐하께서는 몹시 노하셔서, 에드워드 전하께 스스로의 몸을 지킬 능력을 갖출 것을 명령하셨어요. 근위 기사가 전하의 검술 스승으로 붙었죠.”

    그레이가 말했다.

    이해했다. 그레이는 보충 수업처럼 친절하게 해설하고 있었다. 습격은 왕의 자작극이며 왕은 화난 척하고 에드워드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강화했다고.

    에드워드에겐 잘된 일이다.

    이 집안은 여전히 개판이다.

    “폐하께서는 에드워드를 아끼시는군.”

    “예, 그러신 것 같네요.”

    “아니면 내가 싫거나.”

    그레이가 머뭇거렸다. 거짓말을 안 하는 건 그레이의 장점이었다.

    “그럴지도요.”

    놀랍게도, 난 그레이가 조금 좋아졌다.

    조프리와 왕비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만 했다. 도트의 경우 부끄러운 정도를 넘어 가끔은 듣기 힘들 정도였다.

    “네 말이 맞아. 넌 내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내가 인정하자, 그레이는 들뜬 듯이 웃었다.

    “제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요.”

    말은 얄미웠지만.

    그레이의 방문은 놀랍게도 정말 도움이 됐다. 그는 거의 매일 찾아와서 수업 내용을 알려 줬다.

    새로운 선생님을 알아보려던 왕비님은 일단 그레이를 두고 보기로 한 듯했다. 왕비님은 내게 그레이라는 친구가 붙어 있는 걸 마음에 들어 했고, 그레이는 그 사실을 십분 이용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내 학습 능력을 지켜본 다음, 습득 능력은 나쁘지 않지만 요령이 없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무식하게 공부해 오셨어요?”

    그는 자기가 무례한 말을 하고 있다는 의식도 없는 듯했다. 그의 손에서 내 깜지가 팔락팔락 넘어가고 있었다.

    “음. 내가 좀 무식하지.”

    “제가 뭐라고 말했나요?”

    “내가 무식하다?”

    “수식의 목적어를 잘못 이해하신 것 같은데요.”

    그레이가 눈을 굴렸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왕자님의 공부법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거죠. 일일이 쓰면서 외우다 손목이라도 부러지면 웃기지도 않을걸요.”

    “왜, 재미있을 것 같은데. 내가 공부하다 손목 부러졌다고 말하면 왕비님이 공부 그만두라고 하실까?”

    그레이가 조용해졌다. 그가 꽤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아서 나도 생각해 봤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 조프리 손목이랑 공부가 동급인가?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레이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자꾸 방해하지 마세요.”

    “네, 선생님.”

    “그렇게 부르시지도 말고요.”

    “그럼 널 뭐라고 불러?”

    그레이는 조프리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매일 꾸는 꿈속에서 봤다.

    “이름으로 부르시면 되잖아요.”

    그레이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말했다.

    “그레이.”

    “네.”

    “그레이.”

    “…….”

    불러도 안 쳐다보길래 다시 불렀다.

    눈이 마주쳤다. 빤히 쳐다보자 그레이가 먼저 눈을 피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요.”

    그레이는 몇 번째인지 모를 말을 반복했다.

    오늘 안에 중요한 게 뭔지 들을 수 있는 건가? 나랑 비슷한 의문을 그레이도 품은 듯했다.

    “이제 방해하지 마세요. 왕자님 좋으라고 제 비장의 공부법을 알려 드리는 거잖아요?”

    “고마워.”

    “사실 공부하기 싫으신 거죠?”

    그레이가 정답을 맞혔다.

    어쨌거나 사태는 최악이 됐고 조프리의 미래는 암울했다. 난 에드워드의 호감도를 사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생존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다.

    ‘왕자님을 믿어요.’

    언젠가의 방문에서, 그레이는 그렇게 말했다.

    ‘왕자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걸 믿어요. 에드워드 전하께서 왕자님을 원망하는 건 옳지 않아요.’

    그레이는 옳은 말만 했다.

    그런가?

    에드워드는 날 원망할 자격이 있었다. 설정상 그는 조프리에게 배신당할 필요까지는 없었으니까. 그냥 조프리를 미워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런 에드워드가 조프리에게 마음을 열도록 한 건 나였다.

    에드워드가 날 원망하는 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겐 자격이 있었다.

    아니, 중요한 건 에드워드가 아니었다. 그레이의 말대로, 내 미래였다.

    난 살고 싶은가?

    당연하지.

    게임 속에서 조프리가 배드엔딩을 맞은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내가 또 한 번의 배드엔딩을 맞으면, 난 두 번의 삶 모두 열여덟에 끝난 게 됐다.

    역시 싫었다.

    내가 이렇게 간절히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인 줄 몰랐는데. 죽기는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번 생각했다. 도트가 말을 걸어도 바로 듣지 못할 정도로. 해가 지고 커튼이 닫히고, 시종들이 초를 켜 놓고 나갈 때도. 계속해서 생각했다.

    내 계획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왕비님과 왕, 로제 부인의 사연은 조프리가 건들 수 없는 영역이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고, 내가 노력해도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본인들의 문제는 아이들 손에 쥐여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르긴 했다.

    그레이에게 했던 질문의 연장선이었다.

    내가 기대할 구석이 조금도 없는 형편없는 왕자여도, 왕비님은 조프리를 왕으로 만들려 할까?

    에드워드의 적대자로 세울까?

    아니길 바랐다. 왕비님 이전에, 왕비님의 추종자들이 먼저 약해질 것이다.

    아무도 조프리를 지지하지 않으면, 에드워드는 손쉽게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