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60화 (60/293)

60.

15. 알렉스 외전

누구나 인생이 바뀐 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알렉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알렉스는 가족을 가져 본 적 없었다. 집이나 부모, 세상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들.

부모님이 있다면 구걸할 필요 없겠지. 물건을 훔쳐서 할당량을 채울 필요도,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로 팔려 갈까 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날 알렉스는 시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품속에서 감쪽같이 물건을 빼내는 건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알렉스는 재주를 타고났다.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빨라서 원장은 그를 총애하는 편이었다.

“넌 얼굴이 볼만해서 잘 팔릴 거야.”

그렇게 을러대면서도 원장은 정말 알렉스를 내다 팔지는 않았다.

알렉스는 가끔 다른 애들의 할당량을 대신 채워 주기도 했다. 애들은 고마워했다. 그렇다고 알렉스가 원장에게 맞을 때 도와준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가판대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알렉스보다 몇 살 많아 보였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말끔하게 빗은 갈색 머리에 피부는 하얬다. 볕 아래서 일하는 계급이 아니었다. 귀족 도련님의 외출인가? 하인 하나 달고 있지 않았다.

알렉스는 도련님 뒤로 걸어갔다. 도련님이 움직이면서 알렉스를 쳤다.

“죄송합니다!”

알렉스는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그 사이 손은 도련님의 품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반지인가? 손바닥에 둥그런 것이 걸렸다.

수확물은 그날 저녁 원장의 손에 들어갔다. 상당히 값나가는 물건이었는지 원장은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알렉스를 치하하고 원생들이 모두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게 허락했다.

어린 원생들이 알렉스를 우러러봤다. 뭐, 이쯤이야. 알렉스도 기분이 좋아졌다. 며칠 뒤 경비대가 고아원에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분위기가 이상한 것 같아서 알렉스는 도망치려고 했다. 경비대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원장이 염소수염을 단 남자와 대화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뒷문으로 나갔다.

“그놈 어디로 갔어?”

뒤에서 원장이 소리쳤다. 누군가 대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뒷문으로 달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고발당했단 걸 알았다.

그리고 알렉스는 난생처음 왕성에 들어갔다.

염소수염 남자는 자신이 경비대장이라고 했다. 알렉스가 대단한 분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했다.

알렉스는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어제 맞고만 있지 말고 원장 한번 찔러 볼걸. 알렉스의 수입이 지금보다 조금만 못해도 어딘가 팔아넘길 인간이라곤 생각했지만, 죽으라고 떠넘기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알렉스는 울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왕성이라고 해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개구멍 하나쯤은 있겠지.

그런데 알렉스가 심기를 거슬렀다는 높으신 분은 무려 왕자였다.

알렉스는 죽은 목숨이었다.

“다른 애들은 상관없어요! 저 혼자 저지른 짓이에요! 다른 애들은 착한 애들이에요!”

알렉스는 고아원을 변호했다. 죽는 건 그 혼자로 충분했다. 왕자가 고아원 원장만 처벌한다 해도, 고아원에 남은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팔려 가거나 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다.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너희 고아원 애들한테도 아니고.”

펄쩍 뛰는 알렉스를 왕자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까맣고 예쁜 눈동자로.

알렉스는 여러 귀족을 보아 왔다. 거리에는 귀족의 마차와 하인과 마차를 빌릴 수 없는 가난한 귀족들이 돌아다녔다.

그중에서 알렉스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는 귀족은 없었다.

더러운 거리의 아이가 곁을 스쳐 가면 대번에 귀족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씻게 해 주고 새 옷을 줘. 저녁은 속이 찰 만한 게 좋겠어. 고기류로.”

왕자가 시종에게 지시했다. 예전에 알렉스는 그 시종을 귀족 도련님이라고 생각한 적 있었다. 그런 사람이 왕자 앞에서 하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알렉스는 깨끗한 물로 씻고 향기 나는 기름을 발랐다. 좋은 옷을 몸에 두르고 큰 식탁 앞에 앉았다.

그 과정에서 알렉스는 손 한번 까딱할 필요 없었다.

알렉스는 못된 짓을 저질러서 잡혔는데 너무 좋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는 더욱 두려워졌다.

왕자는 뭘 원하는 걸까? 그는 마치 좋은 사람 같았다. 좋은 사람이라서 알렉스를 죽이기 전에 맛있는 걸 줘야겠다고 생각한 걸까?

원장이 말해 준 적 있었다. 사형 집행 전에는 죄수에게 원하는 걸 먹게 해 준다고.

“도트, 알렉스의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어 줘.”

왕자가 지시했다. 시종은 불평 없이 알렉스의 접시를 가져가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작은 크기로 잘린 고기가 다시 알렉스의 앞에 놓였다.

알렉스는 눈에 힘을 주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건 뭔데 이렇게 맛있는 걸까? 거의 씹을 필요도 없이 입안에서 녹는 듯했다. 냄새만큼이나 환상적이었다.

“맛없어? 다른 메뉴가 더 좋아?”

왕자가 물었다.

알렉스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어린애처럼 울어 본 건 처음이었다. 어린애처럼 달래진 것도.

왕자는 알렉스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시종이 알렉스를 침실로 데려다줬다. 알렉스는 침대에 누워서 뒤척였다. 등과 머리가 너무 푹신했다. 그를 여기로 데려다준 시종도 그를 씻겨 준 하인들도 그가 물건이라도 되는 듯 대했다.

하지만 왕자는 계속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도 나중에는 알렉스가 아는 귀족들처럼 변하는 걸까?

저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고아원 원장마저도 왕족을 경외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사람이 왕이 되는 거구나. 심장이 괜히 두근거렸다. 알렉스는 왕자를 만났다.

심장이 계속 뛰어서 그는 그날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왕자의 말처럼 왕성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알렉스는 돌아가야 했다. 그가 없으면 빌어먹을 재주도 없는 어린 원생들은 어쩌겠는가?

알렉스는 왕성 안을 헤매고 다녔으나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지 못했다. 그는 금발의 인형 같은 소년에게 붙들려서 다시 왕자궁으로 끌려왔다.

금발은 마른 주제에 힘이 세서 도통 이길 수 없었다. 금방 뿌리치고 도망칠 계획이었던 알렉스는 몇 대 얻어맞고 질질 끌려갔다.

턱을 제대로 맞아서 머리가 흔들렸다. 이 자식은 뭐지?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왕자가 저 금발도 왕자라고 말했다.

뭐? 이런 게?

알렉스는 드잡이질이라면 또래 중에 적수가 없었다. 그런 알렉스를 금발은 아무렇지 않게 제압했다.

게다가 금발은 알렉스의 손목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자가 어떻게 저만큼 자비가 없을 수 있는가?

“넌 내일 날 밝자마자 나가야 돼. 밥 든든하게 먹어 두는 게 좋을걸. 소원 성취해서 좋겠다.”

진짜 왕자가 말했다. 그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친 알렉스를 처벌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왕자는 알렉스를 자신의 침실로 데려갔다. 알렉스는 믿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 정도로 경계심이 없을 수 있지?

알렉스는 소매치기였다. 손버릇이 나쁘기로는 수도에서 손꼽힌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왕자는 경계심이라곤 조금도 없이 알렉스를 침대에 눕히더니 그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알렉스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밤중에 알렉스는 신음 소리를 들었다. 고아원에서 악몽을 꾸는 어린 원생들이 그러는 것처럼 왕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알렉스는 왕자의 품에 안긴 채 그가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애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왕자를 깨울까?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부를까?

그 순간 왕자가 눈을 떴다. 그는 헉 숨을 들이켜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아.”

왕자가 탄식했다. 알렉스는 눈을 감았다.

왕자가 알렉스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이 간지러웠다. 알렉스는 기침을 참았다.

잠시 뒤 왕자는 알렉스를 끌어안고 고른 숨을 내쉬었다.

알렉스는 또 밤을 지새웠다.

그건 뭐였을까?

다음 날 새벽 왕자는 떠나는 알렉스를 배웅했다. 알렉스는 배웅 같은 건 받아 본 적 없었다.

선물이나 걱정도 마찬가지였다.

왕자는 이슬이 차다며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알렉스에게 둘러 줬다. 그는 완벽한 왕자였다.

알렉스는 수중에 왕자가 준 것만 지니고 있었다.

그는 왕자의 침실에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 슬쩍해도 아무도 모를 만한 작고 귀한 물건이 침실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아무것에도 손대지 않고 왕성을 떠났다.

왕성은 마치 천국 같았다. 그곳에 왕자가 살고 있다. 그런 사람이 있음을 안 것만으로도 알렉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왕자는 왕이 될 것이다. 알렉스는 그런 왕이 다스리는 왕국에 사는 것이다.

왕자의 선물 보따리를 들고 돌아간 알렉스를 맞이한 건 원장의 발길질이었다.

알렉스는 이번에야말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찬 복도에서 걷어차이고 있었고 긴 복도의 모든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문 안에 누가 있기는 한지 궁금했다.

“얼마나 손해를 본 줄 알아! 너 같은 새끼 때문에!”

원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소리를 듣고 있는 건가?

차라리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원장이 다 노예로 팔아 버린 거였으면.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의 생각에 놀랐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알렉스는 죽지 않았다. 짐마차에 실려 어딘가로 이동하는 중에도, 어두운 지하 창고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죽지 않고 산다면.

이번에도 그가 살게 된다면.

알렉스는 미로 같은 왕성과 그곳에 사는 완벽한 왕자를 떠올렸다. 왕자에게 무슨 악몽을 꿨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왕자라면 건방지다고 혼내지 않았을 텐데.

“네가 알렉스냐?”

창고 문이 열렸다.

거대한 남자가 물었다. 남자의 뒤로 들어온 빛이 알렉스의 눈을 찔렀다.

“왕자 전하께서 너를 찾고 계신다.”

알렉스에겐 집도 가족도 없었다. 그를 보호해 주고 그가 보호할 어떤 것도.

고아원은 알렉스의 집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누군가를 지키고 싶었는데 아무도 그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알렉스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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