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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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14. 그레이 외전

재상의 아들 그레이 크래커는 열 살에 처음 입궁해 왕자들의 공부 친구가 되었다.

그레이의 입궁을 요청한 건 왕비였다. 재상인 아버지는 그것을 따라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두 왕자님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네요.”

그레이가 대답했다. 그는 그 대답이 아버지를 만족시켰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그레이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레이를 믿었다.

그레이는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하고 책임질 수 있는 상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재상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레이는 실패해선 안 됐다.

그는 에드워드 왕자를 너무 동정하거나 조프리 왕자를 너무 싫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이 저절로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왕성은 초상 같은 분위기였다. 실제로 초상 중이기도 했다. 로제 부인은 왕실 가족의 묘지에 묻히지 못했으나, 왕은 부인의 장례를 손수 거행했다.

이런 분위기에 왕성을 찾은 건 어리석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일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조프리 왕자의 궁을 찾았다.

그레이가 왕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시종은 곤란해하면서도 그를 왕자의 침실로 안내했다.

그레이는 아버지의 지시를 어기고 왕자를 방문한 참이었다. 아버지는 일이 일단락될 때까지 수업을 듣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 말은 공부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왕성을 방문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레이는 대개의 경우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아들이었다. 그는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언행에 주의하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 왔다.

그쯤 되면 그레이처럼 똑똑한 사람은 ‘아,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혼나는 정도가 아니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여기 있단 말인가?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조프리 왕자의 시종이 문을 열었다. 시종은 며칠 밤을 새운 듯 피곤한 안색이었다.

그레이는 평소 시종의 얼굴까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 시종의 얼굴은 눈에 익었다. 조프리 왕자가 왕성 밖으로 나갈 때도 따라온 시종이었다. 충성스러운 심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종은 왕자의 변모를 알고 있을까?

그레이는 침실로 들어섰다. 파묻힐 듯 커다란 침대 위에 조프리 왕자가 앉아 있었다.

그레이는 이 구도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전에도 한번 조프리 왕자의 병문안을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조프리 왕자는 정말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였다.

조프리 왕자는 팽팽한 줄처럼 여유 없는 성격이었다. 그레이가 아무 뜻 없이 한 말에도 발끈해서 상대하기 피곤했다. 그런 주제에 돌려 말하면 의미도 알아듣지 못하고 화를 냈다.

애 보기가 이렇게 힘들다는 걸 왜 부모님은 말해 주지 않으셨단 말인가? 물론 그레이처럼 의젓한 아들을 둔 부모님은 이런 고충을 모르실 만도 했다.

그레이는 왕자가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감정 변화가 여과 없이 표정으로 드러나는데 쉽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 왕자가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된 건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왕자님.”

조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레이를 위해 몸을 바로 세우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제삼자가 왕자를 본대도 그가 그레이를 환영하고 있다는 의견은 내지 않을 것이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왕자는 일부러 의뭉스럽게 구는 것도 여유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왕자는 그래 왔다.

조프리 왕자는 변했다. 그것을 인정하니 알 수 있었다. 왕자에게 그레이는 불청객이었다.

그레이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들은 좋은 관계가 아니었지만, 왕자는 언제나 그레이와 친분을 쌓고 싶어 했다. 그레이가 말이라도 걸면 왕자의 어깨가 기대로 뻣뻣해지는 게 보일 정도였다.

“내가 일어나길 기다렸다고 들었어. 할 말이 있어?”

조프리 왕자가 물었다.

그 목소리가 몹시 앓고 난 사람처럼 쉬어 있어서 그레이는 놀랐다. 조프리 왕자의 아픔이라는 건 그레이에게 피상적으로 생각되는 데가 있었다.

“아프셨군요.”

“그렇다더군. 내가 정말 아팠는지가 궁금했던 건 아니겠지.”

왕자는 피곤해 보였다. 그레이는 왕자의 얼굴에서 원망 같은 치기 어린 감정을 찾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제가 휴식을 방해한 것 같네요.”

“아니라곤 말 못 하겠네.”

“제가 떠나길 바라세요?”

“용건을 들어 보고 생각할게.”

“제가 에드워드 왕자님에 대해 말씀드린다면요?”

그레이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무감정한 조프리 왕자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고 싶었다. 차분한 조프리를 보면 그레이는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날 비난하려고 왔어?”

조프리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표정에서 호기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불쾌감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레이가 그렇다고 대답해도, 조프리 왕자는 원하는 대로 하라고 둘 것 같았다.

“어느 불충한 자가 그런 마음을 품겠어요.”

“그래? 그런 사람이 있다면 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네가 에드워드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어.”

“왕자님을 비난해서 제가 얻을 게 뭐겠어요?”

“글쎄.”

조프리 왕자는 잠시 생각했다.

“단죄?”

그리고 입을 닫았다.

그레이는 입이 말랐다. 다시 초조해지고 있었다. 조프리 왕자를 만날 때면 늘 그렇듯.

“전 그냥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예요.”

“어떤 질문?”

“소문을 들었어요. 왕비님의 방문을 오랜 시간 거절하셨다고요.”

“이 성엔 비밀이란 게 없어? 왜 남의 가정사가 소문으로 도는 거야?”

왕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비밀로 하고 싶으셨으면 왕비님을 방문 앞에 세워 두진 마셨어야죠.”

“서 계신 줄 몰랐어.”

“왕자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왕비님을 막아섰다고요?”

“아니. 그때 난 아파서 누워 있었어. 어마마마께선 내 시종에게 날 깨우지 말라고 하시고 몇 시간을 복도에서 서 계셨지.”

왕자가 조용히 말했다.

“죄책감을 느끼시나요?”

“응.”

조프리 왕자는 왕비 품 안의 아이였다.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실망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요? 왕비님을 침실로 들이셨고요?”

“응.”

“왕비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로제 부인의 일은 왕비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그 말을 믿으세요?”

“믿어.”

“진심이세요?”

대화 내내 눈을 마주치지 않던 왕자가 처음으로 그레이를 바라봤다.

그레이는 자신이 무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왕자는 지적하는 대신 말했다.

“어마마마는 믿어 달라고 하셨어. 난 나를 사랑하는 어마마마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어.”

그레이는 믿을 수 없었다. 조프리 왕자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레이의 덜떨어진 사촌들이라도 왕비를 믿진 않을 것이다.

믿어 달라고 했다고?

누군가 그렇게 부탁했다고 믿어 준다면, 세상에 믿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따져 물으려던 그레이는 왕자의 말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왕비는 믿어 달라고 했다. 왕자는 믿는다. 그 말은 왕비의 부탁 내지는 명령을 왕자가 들었다는 뜻이었다.

조프리 왕자는 왕비의 액세서리 같은 존재였다. 왕자는 늘 왕비의 손 인형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조프리 왕자의 말을 믿는다면, 왕비가 왕자에게 믿어 달라 호소했다고 생각한다면. 왕비와 왕자,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감정적 우위가 왕자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였다.

“왕비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렸나요? 왕비님이 그럴 분이 아니란 걸 믿겠다고.”

그레이는 놀라서 물었다. 왕비가 한밤중에 왕자를 찾아가 매달리듯 기다리고 애원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왕자도 로제 부인의 사고가 왕비의 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왕비를 거부했던 것이다.

“응.”

“왕비님은 왕자님의 믿음을 저버리기 싫으시겠군요?”

그레이가 중얼거렸다.

“그러면……. 에드워드 전하는 안전하겠네요?”

“그러길 바라.”

“왕자님은 에드워드 전하의 적이 아니군요?”

그레이는 거의 소리칠 뻔했다.

그가 왜 왕성에 왔을까?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레이는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조프리 왕자를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걸, 혹은 완전히 잘못 본 게 맞는다는 것을.

조프리 왕자는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에드워드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레이는 뭔가 켕기는 듯한 조프리 왕자의 표정을 보고 그가 범인이라는 걸 알아챘다.

왕비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고자질쟁이 왕자.

이전에도 조프리는 그밖에 모를 일들을 왕비에게 일러 에드워드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번 일에 비하면 그건 장난 수준이었다.

조프리는 에드워드에게 로제 부인의 로켓을 가져다줬다.

로제 부인이 왕실 사냥터 근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레이는 조프리를 떠올렸다.

로제 부인이 왕과 밀회하고 있었다면, 그 사실을 조프리 말고 또 누가 알고 있었지?

재상의 아들 그레이 크래커는 누구의 편도 아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두 왕자를 볼 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왜 저 멍청하고 못돼먹은 조프리 왕자가 왕비의 아들이란 말인가? 저런 왕자가 왕이 될 바에는 차라리 에드워드가 낫지 않은가?

재상인 아버지는 외국에서 온 왕비가 온 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불쾌히 여기면서도 에드워드의 편은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는 일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레이는 그 이유를 곧 알아낼 계획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만큼이나 조프리가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이유 역시 차고 넘치는 듯했다.

역사서에서 어리석은 왕은 나라를 망쳤다. 그레이는 훌륭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열두 가지도 넘게 댈 수 있었다. 후일 그레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을 때 왕좌에 앉은 게 조프리라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하지만 그레이가 로제 부인의 일을 전했을 때 조프리 왕자가 받은 충격은 진짜였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말했잖아. 궁금증은 풀렸어?”

“에드워드 전하는 왕자님의 뭐죠?”

“그새 잊어버렸어? 방금 네가 왕자라고 불러 놓고. 형제잖아.”

그레이는 조프리 왕자의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왕자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가능하다면 에드워드에게 전해 줘.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내가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다고.”

“저도 에드워드 전하를 뵐 수는 없어요.”

“그럼 됐어.”

시종이 문을 열었다. 그레이는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왕자는 마지막으로 본 날처럼 창백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제게 묻고 싶은 건 없으세요?”

“응.”

“에드워드 전하의 일이라든가?”

“괜찮아.”

그레이는 초조해졌다. 그는 다른 사람이 그의 가치를 재고 그를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하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조프리 왕자가 이대로 그를 내보낸다면, 왕자는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

“왜 절 만나 주셨어요?”

왕자는 그레이를 환영하지 않았다. ‘재상의 아들에게서 환심을 사겠다’는 목적이 아니라면, 왕자는 그레이를 환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레이는 조프리 왕자가 이불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았다. 왕자는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대답했다.

“네가 조프리의 병문안을 온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레이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시종이 그레이를 출구로 안내했다.

“이쪽이에요!”

시종은 피곤한 얼굴로 명랑하게 말했다. 그레이는 떠밀리듯 출구로 향했다.

수많은 시종들과 하인들이 고개를 숙인 채 바삐 지나가고 있었다. 조프리 왕자의 궁은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조프리와 큰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조프리를 떠올렸다.

조프리 왕자는 왕비의 아들이었고 손바닥처럼 읽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그레이는 예전처럼 생각해 보려고 했으나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조프리 왕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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