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58화 (58/293)
  • 58.

    왕비님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와서, 도트가 앉는 용도로 사용하는 의자에 앉았다. 좀 더 좋은 자리를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 정도의 성의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왕비님의 시녀가 테이블에 촛불을 내려놓았다. 기사는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방에는 나와 왕비님, 벽에 그림자처럼 붙어 서 있는 도트만 남았다.

    왕비님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계실 생각이라면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 생각했다.

    문득 왕비님은 고개를 젖히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왕자님…….”

    나는 조프리 왕자가 아니다.

    “내가 미운가요? 모두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나요? 폐하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왕비님이 질문을 하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아팠다.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고, 그냥 내 잘못이라고 빌고 싶었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다. 조프리는 슬픈 것 같다.

    난 조프리처럼 슬퍼해 줄 수는 없었지만, 왕비님이 손을 뻗었을 때 뿌리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은 모두 내 왕자를 위한 거예요.”

    왕비님의 양손이 내 얼굴을 붙잡았다. 눈과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나를 믿어요, 왕자. 내 모든 건 너를 위한 거야.”

    눈물 젖은 까만 눈이 무서웠다.

    그러더니 왕비님은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왕비님을 거의 끌어안을 뻔했다.

    왕비님의 손이 내 두 팔을 붙잡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갈퀴 같은 손가락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내일이면 멍이 남겠지.

    “에드워드가 불쌍한가요? 그 애가 약자라고 생각해요?”

    “그건 사실이니까요.”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다. 내 것이 아닌 감정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그러나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 가운데 어느 것이 내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왕비님이 쓰러질 것 같았다. 조프리는 왕비님을 이렇게 몰아붙였던 적이 없는데.

    “약자는 그대예요! 어쩌면, 하필 동정을 해도……. 어떻게 그 애를? 그 잘난 사랑의 결실 때문에, 그대는 태어나지도 못할 뻔했어!”

    비명 같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왕비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목소리를 낮추고, 나를 다그쳤다.

    “그대의 자리가 반석 위에 있어서, 그대보다 못한 것 같은 그 왕자가 불쌍해졌나요? 내 어리석고 상냥한 조프리. 동정심을 베풀 곳을 찾다 못해, 그대의 형제에게 손을 내밀어 주기로 마음먹었나요?”

    “어마마마가 그 애를 불쌍하게 만들었잖아요. 우리가 그 애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차라리 동정뿐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난 미래를 바꾸기 위해 그 애에게 접근하면서도 그 애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그 애가 답답하고 안됐다고 느꼈다.

    누구도 믿지 않을 것처럼 굴던 애가 내게 마음을 열었을 때, 게임을 클리어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내 저열함을 참을 수 없었다. 왕비님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조프리.” 나를 붙잡고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만들었다.

    “조프리, 내 아들, 잘 들어요. 동맹의 증거로 국혼이 성사되고, 난 이 나라의 왕비가 됐어요. 하지만 이 나라의 왕은 어렸고, 연인이 있었고, 그 연인과의 만남을 그만두지 않았어요.”

    한 손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서, 간지러운 감촉이 뺨을 훑었다.

    왕비님의 손이 이렇게 차가웠던가?

    “왕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연인에게서 유일한 후계자를 본다면, 이 결혼이 무효라도 될 거라고 믿은 걸까? 왕의 멍청함은 알 바 아니었지만, 왕은 자신의 비에게 최소한의 의무도 지키지 않았어요.”

    왕비님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말했다.

    “사람들은 내게 문제가 있다고 말했어요. 왕이 나를 찾지 않는데도, 내게 아이가 없는 건 내 문제라고. 이 결혼은 깨지면 안 됐는데. 내 왕국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데. 왕이 재상과 신하들의 강권에 의해 단 한 번 나를 찾았을 때, 난 궁금했어요. 다음 기회가 있을까?”

    왕비님은 더는 울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기적을 기다려야 했을까?”

    “…….”

    “그럴 리가. 이제껏 기적이 날 도와준 적이 없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나요?”

    차갑고 부드러운 손이 내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대는 왕의 아들이 아니에요. 에드워드를 동정할 주제가 아니야.”

    머리가 멍했다.

    “그러니 그대가 에드워드보다 우수해야 하는 거예요. 그대의 편을 만들고, 그 애의 존재감을 지워야 해. 이 성에서 누구도 그 애를 찾지 않게. 누구보다 그대는 왕자다워야 하는 거야.”

    심장이 뛰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맥박이 느껴지는 게 정상은 아닐 텐데, 피가 빠르게 몸을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조프리가 모르던 사실이었다.

    아니면 이렇게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리 없었다.

    그러니까 출생의 비밀을 열한 살 아들에게 알려 주는 타이밍이…….

    “그래서 부인을 해치셨어요?”

    멍하니 물었다.

    왕비님의 손이 멈칫했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도…….”

    “저를 위해서 로제 부인을 해하셨어요? 전 줄곧 그걸 묻고 있어요. 왕비님은 대답해 주시지 않았잖아요.”

    왕비님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피하기 위해 조프리를 괴롭히는 게 아니길 바랐다.

    게임에서, 조프리의 ‘출생의 비밀’이 나오는 부분은 어처구니없었다.

    뭐야, 열등감 강화가 심한 거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했고 조프리가 된 뒤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왕비님은 지금 알려 주셔야 했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좋았을 텐데.

    다른 날. 조프리가 조금쯤 성장하고 왕비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그때 말해 주셨다면.

    난 왕비님을 위로할 수 있었을 텐데. 왕비님의 선택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어마마마.”

    “아니에요.”

    왕비님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누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아시냐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쳤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본 왕비님은 더욱 겁에 질렸다.

    “믿어 줘요, 왕자. 내 왕자마저 날 버리면 안 돼…….”

    왕비님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

    변명하고, 겁을 주고, 다시 조프리의 반응에 겁을 먹는 왕비님은 거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어마마마가 하신 일이 아니라고요.”

    “아니에요.”

    왕비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게요.”

    그 말은 한숨처럼 나왔다.

    난 왕비님을 믿었다. 왕비님이 조프리를 위해 무엇이든 하리라는 것을 믿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왕비님은 그랬다. 에드워드가 내게 해를 끼쳤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손을 들었다.

    왕비님이 부인을 해쳤을까? 난 왕비님을 의심하고 있지만, 사실이 그럴지라도 왕비님은 결코 내 앞에서 그것을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

    그렇다면 이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여전히 왕비님의 아들 역을 맡고 있고, 왕비님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며, 조프리의 미래는 구렁텅이에 처박혔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머릿속에 벌레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정해진 길을 따라 기어가고 있었다.

    평소엔 우울한 속도로 자극을 심으면서, 이따금 나를 충동질했다.

    왕비님은 조프리의 침실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자는 걸 보고 가겠다고 왕비님이 말했다.

    왕비님의 눈물이 이불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무거웠다. 난 누군가의 전부가 되고 싶은 적은 없었다.

    왜 난 조프리가 된 걸까.

    도망치고 싶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예전에 난 한번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은 빚더미에 처박혀,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숨어 살아야 할 때.

    난 엄마를 버리고 도망쳤다.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을 가서 바다에서 내렸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죄책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에 난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게 내 기억 속 유일한 여행이었다.

    울다 지친 왕비님을 내 침대에 눕히고 의자에 앉았다. 에드워드는 지금 자고 있을까?

    도트가 얇은 담요를 내 등에 덮어 줬다.

    “왕자님, 다른 방을 준비할까요? 조금이라도 쉬시는 게 좋겠어요.”

    “들었어?”

    왕비님은 도중에 도트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정신없는 밤이긴 했다.

    도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제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킬게요.”

    “목숨 거는 거 왜 그렇게 좋아해?”

    “죄송해요. 제 목숨은 아무 가치도 없겠지만…….”

    “누가 그런 말을 해. 내 말이 오해할 만했어? 네 목숨은 더 중요한 데 걸어.”

    조프리 같은 거 말고.

    조프리가 아무리 불쌍한 척을 해도 그에게 별 감정이 들지 않는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조프리는 에드워드가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에드워드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부모마저 잃었다.

    내가 에드워드의 친구였다면, 어쩌면 형제마저.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다는 감각은 예전부터 익숙했다. 왕비님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산에라도 들어갈까.

    불가능하겠지만.

    조프리는 대체 왜 아직 열한 살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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