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난 침대 위에 허물어졌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욱신거렸다. 몸이 아려서 견딜 수 없었다.
눈이 뜨거운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도트가 뭐라는 것도 듣지 못하고 잠들어서, 끝없는 꿈을 꿨다.
지금보다도 어린 에드워드에게 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갖고 싶어? 그럼 주세요, 라고 말해 봐.’
‘주세요.’
에드워드가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나는 적선하듯 장난감을 넘겼다.
‘넌 이런 거 없지?’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깜빡이자 장소가 바뀌고, 난 벽 뒤에 숨어 있었다. 에드워드가 훈육관에게 혼나고 있었다.
‘도둑질이라니! 이래서 천한 핏줄은 속일 수 없어. 어려서부터 단단히 교육해 놓지 않으면…….’
훈육관이 회초리를 들었다. 나는 벽 뒤에서 떨었다. 에드워드는 훔치지 않았다. 내가 줬다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그러면 내가 혼날 것 같았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에드워드가 칭찬받았다. 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고 에드워드는 대답했다.
어마마마께 그 얘기를 했더니 수업이 늘었다.
‘조프리 왕자가 더 잘할 수 있죠? 이 어미는 왕자를 믿어요.’
‘하지만 에드워드가 나보다 똑똑한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조프리, 내 귀한 왕자님. 그 아이가 더 똑똑하다니? 누가 그런 못된 소리를 왕자에게 했을까? 왕자가 이길 수 있어. 왕자가 이겨야 해요.’
어마마마가 우셨다. 난 잘못했다고 빌었다. 내가 잘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내 시종들은 훈육받았다. 에드워드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게 되었다.
‘재상의 아들이 오늘부터 함께 공부할 거예요. 조프리 왕자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면 좋겠네요.’
‘이름이 그레이 크래커?’
‘예, 전하.’
‘공부 잘해?’
‘예, 전하.’
그레이 크래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그런데 그는 정말 공부를 잘했다. 수업을 한번 듣고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재상의 아들과는 친해졌나요?’
어마마마가 물었다. 걘 날 무시해요,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네.’
그레이 크래커와 친해져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수업에 다시 들어갔다. 그레이는 에드워드와 대화하고 있었다. 웃고 있던 그레이는 나를 보더니 평소의 재수 없게 단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오셨어요, 전하?’
난 그를 무시했다.
그날 밤엔 조금 울었다.
에드워드가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그가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멀어지는 모습을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헐떡이며 따라갔다. 에드워드와 그레이가 탄 말이 보이지 않았다. 난 두 다리로 따라갔다. 바닥이 빙글빙글 돌았다. 난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 그걸 나만 알고 있었다. 그레이가 에드워드를 좋아하는 건 당연했다. 에드워드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걸 모두 갖고 있었다.
나도 네 걸 갖고 싶어. 내게 줘.
‘네 말을 타게 해 줘. 그러면 네 어머니를 만나러 가게 해 줄게.’
나도 네 걸 가지면 어마마마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거야.
* * *
긴 꿈에서 깨고 처음으로 본 건 곤란해하는 도트의 모습이었다.
그는 문가에 벌을 받듯 서 있었다. 이따금 그의 고개가 문을 향해 돌아갔다. 문밖에 무언가 있다는 듯이.
오른손이 답답했다. 흰 붕대가 감겨 있었다. 맞아, 다쳤지,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손에 힘을 줬다. 주먹을 쥐려고 했다. 붕대로 고정된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감각이 둔했다. 이 손을 벽에 대고 내리쳐도 아플 것 같지 않았다. 내 팔에 달려 있지만 내 손 같지 않았다.
그런데 애초에 이 생각부터 잘못된 게 아닌가.
이 손은 내 것이 아니었다. 조프리의 것이었다. 내가 새로 갖게 된 환경, 인간관계, 이상하게 생각됐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간 일들. 모두 조프리의 것이었다. 게임 설정. 정해진 일들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난 내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식은땀을 잔뜩 흘린 몸은 오한이 가시고 한풀 열이 내렸다.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고 싫은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차분했다. 조프리의 기억이 남아서 가슴이 술렁거리는 중에도 그 감정이 모두 남의 것임을 알 만큼 머리는 차가워졌다.
전날 낮까지, 난 조프리에 대해 거의 몰랐다. 열한 살 어린 조프리에 대해서라면 그랬다. 그 애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 애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 애가 사라졌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그 애의 어머니도 가장 가까이 붙어 지내는 시종도.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조프리는 죽은 건가? 사라졌나? 사라졌다면 어디로?
아니면 이 몸 안에 있는 건가.
“도트.”
“왕자님? 일어나셨어요?”
도트가 달려왔다. 나는 그가 무심결인 듯 문을 돌아보는 모습을 봤다.
“밖에 무슨 일 있어?”
“예? 아……. 왕자님…….”
도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왕비님이 밖에 계세요.”
“왜 들어오시지 않고?”
“왕자님께서 문을 열어 주실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꿈속의 왕비님은 조프리에게 심한 말은 하지 않았다. 조프리를 괴롭히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왕비님은 조프리에게 기대했고, 그가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면서도 그를 보호하려고 했다.
지금은 조프리가 죄책감을 느꼈으면 하시는 모양이다.
“얼마나 기다리셨어?”
“밤새도록……. 죄송합니다. 왕자님을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 죄송합니다…….”
도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왕비님의 구두가 떠올랐다. 그 고문 같은 구두를 신고 문 앞에서 기다릴 왕비님이.
구두를 벗고 복도에 앉아 있는 모습 같은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왕비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네가 왜? 왕비님이 원하신 일인데. 너도 밤새 문 앞에 서 있었겠네. 들어가서 쉬어.”
“그러면 왕자님은…….”
“기다리셨다며, 열어 드려야지.”
“제가 곁에 있을게요.”
“필요 없어.”
도트가 움찔했다. 내가 줄곧 무감각하게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어린아이처럼, 조프리처럼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이제 난 조프리가 어떤 애인지 조금 알 것 같지만, 오늘은 그 애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네가 있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다는 뜻이야. 쉬어. 내일 휴가 줄게. 늦잠이라도 자.”
“하지만 왕자님…….”
충성스러운 시종이란 피곤한 존재였다. 도트 자신도 피곤할 테지만 나도 피곤했다.
“여기 있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도트가 왕비님의 눈에 띄어 좋을 게 없을 텐데. 왜 고집을 부리는 걸까?
문을 열었다. 왕비님의 창백한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파리한 피부, 붉게 칠한 입술이 나와 마주한 순간 파르르 떨렸다.
“들어오세요.”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옆으로 비켜섰다. 왕비님이 지나갈 수 있게.
왕비님의 뒤에는 초를 든 시녀와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평소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이 수행원으로 있었던 걸 생각하면 단출한 일행이었다.
얼마나 서 있었는지 시녀는 한 발 떼자마자 비틀거렸다. 시녀가 문을 잡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걸 난 못 본 척했다. 호위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왕비님은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왕비님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왕비님을 바라보자 눈을 피했다.
늘 높이 올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애잔하고 죄송스러운 마음. 그러나 이것은 내 마음이 아니었다. 조프리의 마음이었다.
왕비님이 조프리에게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난 왕비님께 잘하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조프리는 좋은 아들이었을 테니까. 난 조프리의 몸을 이용하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 이전에, 왕비님을 볼 때마다 엄마가 떠올랐다. 두 분은 조금도 닮은 데가 없었지만, 왕비님을 볼 때마다 내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왜 이런 감정이 들까. 내가 왕비님을 어마마마라고 부르고 있어서? 엄마에게 저질렀던 죄가 왕비님에게 투영돼서?
왕비님의 손은 너무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내가 기억하던 엄마의 손과는 전혀 달랐다.
난 그런 손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나를 만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이 나를 만진다는 상상도 한 적 없었다.
왕비님의 손이 따듯해서. 그게 애정인 것 같아서.
접촉에 굶주렸다. 왕비님의 애정과 관심이 이상하고 민망하다고 느끼면서도 마음이 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