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55화 (55/293)
  • 55.

    내가 에드워드에게 위로를 받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난 에드워드가 내게 위로받도록 할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는 이상한 곳이고, 내가 알고 있는 미래는 하나밖에 없었다.

    무력감은 내게 익숙한 감정이었다. 난 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곳에서 버티는 데 익숙했다.

    여러 번 이사와 전학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장소에 정물처럼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곳에선 적응만 해선 안 됐다. 미래를 바꿔야 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 미래의 주연인 에드워드가 날 좋아했다. 내게 애정을 갖고 매달리고 있었다.

    그 사실은 내게 위안을 줬다. 미래는 내가 아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 * *

    “으앗, 에드워드 전하. 여기서 주무셨어요?”

    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야, 에드워드가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라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옆구리가 따듯하다 했더니 에드워드가 몸을 붙이고 잠들어 있었다.

    에드워드의 속눈썹이 깜빡였다.

    “조프리, 아침이야?”

    “응. 아침 먹을래?”

    “먹을래.”

    이상한 아침이었다.

    에드워드와 나란히 양치를 하고 파이 공작의 수업에 들어갔다.

    그레이가 ‘두 분 왜 같이 오세요?’ 하면 놀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왜겠어?

    그런데 우리가 도착했는데 그레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지각은커녕 수업에 가장 먼저 들어와 앉아 있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수업 시작 시간이 됐는데도 그는 오지 않았다. 공작도 에드워드도 이유는 몰랐다.

    “아픈 게 아닐까요? 병문안을 가야 할지도 몰라요.”

    내가 말하자 파이 공작은 “친절하시군요, 전하. 병문안은 수업을 마치고 가시길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만 수업 진도를 나가다니 그레이가 소외감을 느낄 것 같아요.”

    “전하의 상냥한 마음, 그레이 군도 몹시 기뻐할 겁니다. 나중에 말씀해 주십시오.”

    파이 공작은 농담뿐만 아니라 수작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공작이 수업을 시작했다.

    공작은 시를 좋아했는데, 긴 서사시 같은 걸 읽어 줄 때는 책을 펼치고 거기에 집중했다. 난 문학적 조예가 없는 사람이었고, 저 시들이 어디에서 나온 건지만 궁금했다.

    이 나라의 역사라는 게 이렇게 잘 설정되어 있을 리가 없는데, 역사서는 방대했고 여러 사료도 풍부했다. 게임사에서 실제 어느 나라의 역사를 가져와 패러디한 거라고 해도 내가 알 방법은 없었지만.

    문득 어깨에서 무게가 느껴졌다. 에드워드가 내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정말 애정 결핍인가.

    파이 공작이 책에서 고개를 들자 에드워드는 몸을 세우고 내 손을 잡았다. 딱딱한 손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어서 불편했다.

    에드워드는 손잡는 것도 기대는 것도 좋아했다.

    내가 손을 빼내자, 에드워드가 날 쳐다봤다. 난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초등학교 때 친구랑 이러고 놀았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손을 앞뒤로 흔들자 에드워드가 웃었다. 나도 킥킥거리는 바람에 파이 공작에게 들켰다.

    “전하.”

    파이 공작이 나를 불렀다.

    “네.”

    “수업에 집중해 주십시오.”

    “네.”

    수업을 듣자. 난 책에 눈을 고정하고 인상을 썼다.

    그때 강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에드워드 전하!”

    그레이였다. 지각이었나? 자리에 앉지 않고, 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뛰어 들어와서 에드워드의 팔을 잡았다.

    “어서!”

    에드워드가 일어났다. 의자가 그의 발에 걸려 나뒹굴었다. 두 사람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일이 아니라는 게 그레이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나는 그레이를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레이는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영리하고, 건방졌다.

    그는 어느 정도 어른스러웠고, 스스로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어린애 같았다.

    그가 그렇게까지 자기 통제를 잃은 모습을 난 본 적 없었다.

    “에드워드!”

    에드워드가 나를 돌아봤다.

    “내가 필요해?”

    그레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문이 닫혔다.

    13. 수면 아래

    로제 부인의 관이 수도로 들어온 건 며칠 뒤의 일이었다.

    로제 부인이 죽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소린가 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부인은 건강해 보였다. 어둠 속이라 혈색을 확인할 순 없었고, 엄청나게 울고 있긴 했지만, 어딘가 앓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난 병을 떠올리게 되는데. 정작 부인의 사인은 마차 사고라고 했다.

    수도가 아닌 어느 소도시에서 사고를 당했고 신원 확인이 늦어져서 장례도 미뤄졌다고 했다.

    이것도 게임 원작에 있던 설정일까?

    에드워드는 어릴 적 어머니랑 떨어져 살다가, 기어코 어머니를 잃는 불쌍한 캐릭터였던 걸까?

    차라리 부인이 불치병이면 더 좋았을 것이다.

    무슨 사고야. 에드워드가 그나마 좀 좋은 때에.

    개연성이 없잖아.

    차라리 병이었으면 어떻게 이해라도 하지.

    에드워드는 아직 로제 부인과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해 봤는데.

    “왕자님……. 괜찮으세요?”

    “뭐가?”

    “슬프면 우셔도 괜찮아요.”

    도트가 말했다.

    내 반응을 그렇게 해석할 수가 있나? 아무래도 도트가 아는 조프리 왕자는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잘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 슬퍼할 수 있는 사람.

    난 조프리를 도통 모르겠다.

    도트의 기대에 맞춰 주려면 슬퍼해야 했는데, 난 그럴 수 없었다. 그냥 어이가 없었다.

    게임에 들어와 로제 부인을 두 번 만났다. 처음 만남엔 대화도 나누지 못했고 두 번째 만남에선 우는 부인을 봤다.

    부인은 느낌 좋은 사람이었다. 에드워드와 내가 마을 아이들인 줄 알았을 때도 잘해 주려고 했다. 불쌍한 사람이기도 했다. 나중에 에드워드와 꼭 만나게 해 주자고 생각했다.

    여기서 부인을 사고로 죽인다고?

    부인이 마지막으로 어떻게 왕자를 만났는데, 그게 에드워드도 아니고 나라고?

    사냥터엔 내가 아니라 에드워드가 갔어야 했다.

    왕은 멍청한 거 아닌가?

    왜 에드워드가 아니라 나를 데려갔지?

    그러니까, 내가 부인을 만나고……. 그래서…….

    자꾸만 무언가가 걸렸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에드워드를 만나야겠어.”

    “왕자님?”

    에드워드가 어디에 있을까.

    도트가 나를 따라왔다. 그는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왕자님…….”

    “안내해 줘.”

    “어디로요?”

    어디겠어? 넌 에드워드를 자주 만나 왔잖아.

    “에드워드의 궁으로.”

    도착한 에드워드의 궁에는 지키는 병사가 없었다. 난 조프리의 궁을 매일 보아 왔다. 정문에 경비병이 서 있는 모습도 익숙했다.

    제정신인 침입자라면 정문으론 다니지 않을 텐데, 여기에 왜 병사를 세워 놓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곳에 병사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의문을 품어 본 적은 없었다.

    에드워드의 정문은 텅 비어 있어서 불청객이든 침입자든 마음 놓고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나는 불청객 쪽이겠지. 정문을 통과하는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그늘 아래에서 포커를 치고 있었다.

    근무 시간 아닌가?

    내가 지나치는데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트와 내가 특별히 조심하고 있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에드워드를 어디서 만났어?”

    “이쪽으로…….”

    나는 도트를 따라 정원으로 들어섰다. 조프리의 궁과 구조가 비슷했다. 이런 식이라면 정원과 이어지는 후문이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의 정원은 정원이라기보다 정글 같았다. 몇 년 방치됐다고 꽃 심는 데가 이렇게 변할 리 없을 것 같은데, 풀들이 덩굴 식물처럼 뒤엉켜 자라서 내 머리 위까지 뻗어 있었다.

    누가 수풀 사이에 쓰러져 있어도 발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 에릭. 이런 곳에서…….”

    “뭐 어때? 아무도 안 보는데.”

    이 소린 또 뭐야. 내가 고개를 돌리는데 얼굴이 빨갛게 된 도트가 내 귀를 막았다.

    “와, 왕자님. 들으시면 안 돼요! 나쁜 소리예요!”

    무슨 소리인지 나도 알아.

    “무슨 소리인데?”

    “나, 나중에 왕자님이 성인이 되면 알려 드릴게요.”

    수풀 사이로 밀회하는 연인의 차림이 얼핏 보였다. 병사와 하녀인 것 같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감정이 있고 연애를 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

    에드워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치된 어린애. 방치된 건물.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았을 뻔했다. 이 궁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도 에드워드는 혼자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도트가 에드워드에게 도시락을 전해 주던 곳이 나왔다. 폐허 같은 정자였다. 내 정원에도 같은 자리에 정자가 있었다. 그곳에는 장미와 간식과 에드워드가 있었지만,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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