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54화 (54/293)
  • 54.

    에드워드와 헤어져 궁으로 돌아갔을 땐 저녁때가 다 되어 있었다.

    “앗, 왕자님. 늦으셨네요. 왈츠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도트가 달려 나왔다.

    무슨 왈츠?

    “오늘 보충 수업일 아니야?”

    “앗, 왕비님께서 수업 일정을 바꾸셨어요. 왕자님은 왈츠를 배우셔야 한대요. 왕자님, 얼른 들어오세요!”

    왕이 조프리를 사냥터에 데려간 사건은 왕성에서 상당한 화제인 모양이었다. 조프리를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냥터에 동행한 게 아닌가?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고 도트가 말했다.

    그 결과 수확제 무도회에 후계자인 조프리 왕자가 참석할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소문이 발전했다.

    그럴 리 있나?

    난 듣자마자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왕비님과 도트와 조프리 궁의 시종들은 특히 그랬다.

    “어떡해요, 왕자님. 조금만 더 빨리 준비해 둘걸! 제 잘못이에요. 다들 왕자님을 주목할 텐데. 저 때문에 왕자님이 나쁜 말을 듣게 되면 어쩌죠?!”

    도트가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아. 그럴 일은 없어.”

    “왕자님은 너무 관대하세요!”

    아니. 그럴 일이 없단 건 내가 무도회에 참석할 일이 없다는 뜻이야.

    난 도트에게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궁인들이 전반적으로 들떠 있는 건 나쁘지 않았다. 모시는 왕자가 잘나가면 궁인들도 어깨가 으쓱해지는 듯했다.

    난 궁인들이 너무 기대하지 않기를 바랐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니까.

    “어쩌죠, 왕자. 왕자를 위한 무도회복을 준비하기엔 시간이 너무 빠듯한데.”

    왕비님이 나를 찾아와서 슬퍼하실 때는 좀 괴로웠다.

    어떡하지. 진짜 기대하시는 모양인데.

    도트는 자신의 기대감을 내게도 나눠 주려고 했다.

    “수확제는요, 왕자님, 중요한 행사예요.”

    “그래?”

    “귀족들도 많이 참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왕자님을 보러 올 거예요.”

    “굉장하네.”

    “왕자님이 왕실 무도회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 참가하시는 건 처음이니까, 다들 주목하겠죠!”

    “그런 행사에 삼 일 배운 왈츠로 참가해도 돼?”

    “춤은 왕비님과 한번 보여 주기용으로만 추시면 되니까요! 왕자님은 귀족들의 인사만 받으시면 돼요.”

    “다행이네.”

    조프리가 몸을 잘 쓰던 애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조프리가 춤꾼이기라도 했다면 내가 곤란했을 테니까.

    끙끙거리며 며칠간 왈츠 특훈을 받았다. 왈츠 선생님으로 온 분은 마거릿 백작 부인으로, 예술적 조예가 높은 분이었다.

    그에 반해 난 예술적인 면이라곤 아름다운 걸 보고 ‘예쁘다’고 말할 줄 아는 수준이라 백작 부인과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 춤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정도는 됐다.

    사실 삼 일 만에 춤에 익숙해지는 쪽이 이상하지 않나?

    춤 솜씨를 갈고닦아도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발전이 더 더딘 것 같기도 했다.

    백작 부인은 관대하게도 노력하면 나아질 거라고 나를 격려했다. 나는 끈기와 노력하는 자세가 있어서 좋다는 것이다.

    “얼마나 더 노력하면 될까요?”

    난 희망을 갖고 물어봤다.

    “글쎄요, 반년?”

    백작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수확제 무도회가 다음 날로 다가왔다. 왕비님은 조프리 궁을 찾아 나와 점심을 함께하고 돌아갔다.

    내 왈츠 솜씨를 구경하고는 다정하게 웃기도 했다.

    내년 수확제에는 춤에 익숙해질 거라고.

    왕비님이 돌아가고 오후 수업이 시작됐다. 내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왕의 시종은 찾아오지 않았다.

    조프리는 수확제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 * *

    상심한 도트를 달래 주다가 침대에 누웠다.

    시종들은 저마다 실망했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조프리 궁의 시종들은 나이가 어린 편이라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도트에겐 먼저 쉬겠다고 말해 뒀다. 도트는 내가 낙담했다고 생각했는지 “쉬세요. 아무도 왕자님을 방해 못 하게 할게요.” 하고 든든하게 말했다.

    도트가 문을 닫고 나가기 무섭게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에드워드가 테라스로 들어왔다.

    도트. 방해꾼이 왔는데.

    에드워드는 왜 정문을 놔두고 테라스로 다니는 걸까?

    “조프리, 자?”

    에드워드가 물었다. 난 이불을 걷고 말짱한 눈을 보여 줬다.

    “무도회 못 가서 상심했어?”

    “너까지 그 소리야?”

    다른 시종들에게 이미 충분히 시달렸다. 시종들은 내가 우울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해 위로해 주는 바람에 거부하기도 뭐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위로의 말을 들으면 멀쩡한 사람도 우울해질 법했다.

    “맞아. 내 왈츠 실력을 사교계에 뽐낼 기회였는데 무산돼서 너무 슬퍼.”

    내가 투덜거리자 에드워드가 빙그레 웃었다.

    “나한테 뽐내면 되잖아.”

    “너한테?”

    “사교계는 무리지만, 기회가 되면 시종들한테 소문내 줄까?”

    에드워드가 협탁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전에 봤던 오르골이었다.

    “소문낼 친한 시종은 있고?”

    에드워드가 눈을 굴렸다.

    “없지만, 괜찮아. 시종들은 재미있는 소문만 들려주면 누구든 환영하니까.”

    “경험이 있나 봐?”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더니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일 때가 아니었다. 역시 이 성은 보안이 허술했다. 아무나 시종인 척해도 안 잡혀 가다니.

    오르골의 태엽이 감겼다. 노래가 울리고 무도회복을 입은 남녀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래서, 시종들이 내가 우울해하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전해 줬어?”

    농담이었는데 에드워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정말?”

    “응.”

    “그래서. 넌 소문 듣고 위로해 주러 온 거야?”

    “…….”

    에드워드는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진짠가 보다.

    얜 어떻게 이렇게 착하게 자랐지? 왕의 유전자 덕은 아닌 게 분명했다.

    “착해.”

    두 손으로 에드워드의 머리를 헝클어 줬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바닥 아래서 엉킨 양털처럼 변해 갔다.

    신기할 정도로 마음대로 되는 머리카락이었다. 원래 목적도 잊고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내 손목을 잡았다.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에 힘을 줘 봐도 마찬가지였다.

    오르골에서 왈츠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종처럼 반짝이는 투명한 음이었다.

    에드워드의 눈이 검게 보였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것처럼.

    내가 다시 손에 힘을 주자, 이번에는 에드워드가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내 손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손목이 욱신거렸다.

    어째서인지 에드워드가 안 놓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손목을 매만지다가, 난 에드워드의 허리를 잡았다.

    “너 왈츠 이상하게 배운 거 아냐? 손 그렇게 잡는 거 아니야. 한 손은 상대 허리에 두르고, 다른 손은 상대방 손을 잡고…….”

    에드워드의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너 왈츠 배웠어?”

    “아니.”

    에드워드가 순하게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

    “스텝은 이렇게, 네모를 그리면서…….”

    시범을 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적당히 흉내 낼 수 있을 뿐, 얼마쯤 하자 발이 꼬였다. 다음 순서가 뭐더라?

    “모르겠다! 아무튼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렇게 해. 춤을 신청하고, 허락받으면…….”

    에드워드의 손을 내 어깨에 올려놨다.

    “이렇게 상대에게 어깨를 허락하고, 음악에 맞춰 도는 거야.”

    에드워드를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내게 두 손이 잡힌 에드워드는 뭔지도 모르고 나를 따라 돌았다.

    스텝이 엉망이었다. 원래 비슷한 스텝을 밟으며 서로 맞춰 가야 하지만, 아무튼 에드워드는 왈츠를 안 배웠다.

    뭐 어때. 크면 다 배울 텐데. 아카데미에서 에드워드는 무도회장을 잘만 다녔다.

    우리는 빙글빙글 돌며 방 안을 헤집고 다녔다. 이게 뭐 하는 짓일까? 발에 의자가 걸리고, 협탁이 걸리고, 러그를 잘못 밟아 미끄러질 뻔하고, 에드워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와중에도 오르골의 음색은 어이없을 정도로 예뻤다.

    “이게 뭐야?”

    에드워드가 웃고 있었다. 오르골의 예쁜 음색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상관없었다. 신기했다. 에드워드가 저런 웃음을 보여 줄 정도면, 호감도는 꽤 올린 걸까?

    하트 네 개? 네 개 반? 어쩌면……. 다섯 개?

    이어지던 노래가 뚝 끊겼다. 난 멈추려고 했지만 에드워드는 원심력을 따라 돌고 있었다. 에드워드 발에 내 발이 걸렸다.

    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에드워드는 바로 서려다가 중심을 못 잡고 뒷걸음질을 쳤다. 어어 하는 사이 그가 뒤로 넘어졌다.

    “바보 같아.”

    에드워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 바보 같은 춤 실컷 즐긴 게 누군데?

    난 에드워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내 쪽으로 엎어져서, 나를 침대로 밀어붙였다.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조프리. 왜 나한테 잘해 줘? 왜 마음이 변했어? 뭐가 널 변하게 했어?”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오르골 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사실 낙마할 때 사람이 바뀌었어. 몰랐지? 네 눈앞의 난 조프리가 아니야.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물론 그렇겠지.”

    에드워드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그가 내 가슴에 이마를 댔다.

    사실을 말해도 안 믿네.

    하루 종일 시종들에게 시달렸다. 나는 조금 우울했는지도 모른다. 에드워드의 체온이 따듯했다.

    눈이 감겼다. 정말 어린애들 체온엔 수면제 효과라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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