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에드워드는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더니 그냥 자기가 가져온 책을 펼쳐 그 위에 표를 그렸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수업 내용을 설명하는 걸 들으며 난 약간 배신감을 느꼈다. 수업 시간에 딴짓하는 줄 알았더니 다 듣고 있었다고?
에드워드가 설명을 잘하는 건 모르겠고 수업 내용을 죄다 외운 건 알겠다.
“도움이 됐어?”
“너 혹시 천재야?”
“그건 아닌 것 같아.”
에드워드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네가 원하면 계속 도와줄게.”
“정말?”
에드워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뭐가 그렇게 즐거우세요?”
도트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천도복숭아와 샐러드, 초콜릿쿠키, 우유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에드워드는 누가 챙겨 주지 않으면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기 때문에, 이 시간에 올라오는 간식은 늘 통일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사과파이는 좀 늦을 거예요.”
“사과파이?”
에드워드가 되물었다.
“주방장에게 부탁했어. 네가 원하던 건 아니지만.”
로제 부인의 사과파이도 언젠가 먹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주는 게 내가 원하는 거야.”
에드워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도트는 테이블 세팅을 하다 말고 굳어 버렸다.
“너 노리고 그러는 거야?”
“뭐가?”
“그런 말 아무 데서나 하고 다니지 마. 오해 사잖아.”
“오해?”
도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쟤 좀 봐, 내가 예시를 가리키는데도 에드워드는 이해 못 한 것 같았다.
에드워드 덕분에 내 숙제는 금방 끝났다. 나와 에드워드는 간식을 싹 비우고 잔디 위에 누웠다.
바람이 기분 좋게 불고 있었다. 이곳의 여름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덥지는 않아서 눈을 감고 있으면 잠들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니 에드워드가 눈이 부신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안에서 로켓이 굴러갔다.
“나도 봐도 돼?”
이미 봤지만.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에드워드가 로켓을 열었다.
“엄마야.”
그가 로켓 왼편에 있는 초상화를 가리켰다.
나도 알아. 설마 오른쪽에 있는 분이겠어.
“폐하가 오실 때면 엄마가 사과파이를 구웠어. 엄마가 할 줄 아는 가장 좋은 메뉴가 그거였나 봐.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면 난 좋은 날이란 걸 알았어. 엄마가 행복해했거든.”
에드워드는 로켓을 닫더니 내게 몸을 기대 왔다.
에드워드가 애정 결핍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난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항상 만져 보고 싶었다.
만져도 되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에드워드는 눈을 감았다.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부드럽고 따듯한 모래를 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수업이 곧 시작될 거고, 에드워드는 떠나야 했다.
“두 분 정말 친해지셨네요.”
에드워드가 가고 도트는 테이블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렇게 보여?”
도트의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이었다.
“에드워드가 왕이 돼도 나 처단 안 할 것 같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왕자님? 왕자님이 왜 처단을 당해요?”
“그냥 해 본 말이야.”
도트가 정색해서 난 좀 놀랐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무슨 말씀 하셨나요?”
“아니. 아무 일 없었어. 너도 알잖아? 에드워드가 어떤 앤지.”
“에드워드 왕자님은……. 좋은 분이죠. 하지만 조프리 왕자님이 백배 더 좋은 분이세요!”
“고마워.”
“왕자님이 너무 좋은 분이라 전 걱정이에요!”
“그래. 고마워.”
난 도트가 걱정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 어떻게 할래?
난 에드워드에 대해 객관성을 잃었다. 하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봐도 나와 에드워드는 친해진 모양이었다. 제삼자가 도트라는 게 좀 불안했지만.
아무튼 이렇게 사이좋은 형제를 연인 때문에 죽이진 않겠지.
모든 일이 잘되고 있었다.
* * *
파이 공작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에드워드는 재미있는 곳을 알려 주겠다고 나를 잡아끌었다.
에드워드의 유머 감각이 나와 비슷하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에드워드가 이끄는 방향이 불길했다. 어쩐지 점점 인적이 드물어진다 싶더니 우리는 북쪽 폐궁에 도착했다.
북쪽 폐궁은 오래전에 폐쇄된 장소였다. 궁이 닫히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 아마 십 년은 되었을 것이다.
시종들은 폐궁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을 들려줬다. 도트만 해도 폐궁에서 귀신 울음소리 같은 걸 들었다고 했다.
에드워드는 귀신 체험을 좋아하나?
현실이었다면 유령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여긴 게임 속이었다. 이러다 진짜 유령을 만나게 되면 농담도 아닌데.
“……이렇게 문을 열면.”
에드워드는 폐궁의 철문 밑에 손을 넣고 어떻게 만졌다. 철컥하는 소리가 나며 뒷문이 열렸다.
사용인들이 다니는 샛길이 드러났다.
“들어갈 수 있어. 어때?”
에드워드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긴 뭘 어때, 너 한밤중에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잔소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에드워드가 기대하는 건 그런 말이 아닐 것이다.
“멋지다. 네가 직접 발견한 거야?”
“응.”
에드워드의 눈이 가느다랗게 접혔다. 뺨이 발그레해진 에드워드가 “삼 년 전에 발견했어.”라고 자랑했다.
“사람들이 아무도 드나들지 않길래 들어와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놀랐어. 홀도 크고 정원도 커. 예전에는 아마 중요한 궁이었을 거야. 버려지는 건 한순간인가 봐. 나밖에 안 와. 내가 정리하고, 비밀 장소로 삼았어.”
그가 종알거렸다. 난 그래그래, 하고 들어 줬다. 귀신의 정체가 너였냐.
“궁에 있기 싫으면 여기로 와도 돼.”
넌 궁에 있기 싫어? 왜?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정말?”
웃으며 묻자 에드워드는 관대하게 허락했다.
“응.”
그런 질문의 답은 천천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홀을 비추고 있었다. 두꺼운 깔개와 벽면에 걸린 태피스트리가 보였다. 버려진 성당처럼 먼지가 부유했다.
건강에 좋을 것 같은 장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숨겨진 장소라는 느낌이어서, 에드워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은 비밀 장소를 좋아하니까.
“넌 여기 자주 와?”
“최근에는 잘 못 왔지만…….”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소개해 줄게. 필요한 물건은 다 있어. 저쪽에는 침대 매트를 가져다놨고, 이쪽엔 찻잔도 있어. 밖으로 나가서 우물 긷는 곳을 알려 줄게. 여기서 자도 괜찮아. 지낼 만해.”
“여기서 잔 적도 있어?”
“아무 문제도 없었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무도 널 안 찾아?”
에드워드는 멀뚱히 나를 보더니 “응.” 하고 대답했다.
그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방치된 장소를 찾아서 쏘다닌 거겠지.
“내가 찾아 줄게. 너 사라지면.”
에드워드는 웃으며 내게 기대 왔다.
“기다릴게.”
유령 소문의 주인공은 에드워드가 확실했다. 그는 홀에 모든 물건을 가져다 두고 아지트로 사용하는 듯했다.
내가 대련 때 빌려준 목검도 어째서인지 벽 한구석에 서 있었고 식당용 트레이도 홀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난 트레이를 가리켰다.
“저건 왜 저런 애매한 위치에 있어?”
“물건 옮길 때 편해서.”
에드워드가 트레이를 끌었다. 바퀴가 귀신 곡하는 소리를 냈다. 만들어진 지 백 년 된 트레인가?
나 귀곡성의 정체도 알아 버린 것 같은데.
에드워드는 이런저런 물건을 소개하다가 어디서 주웠다는 오르골을 내게 보여 줬다. 동그란 유리 구체 안에 무도회복을 입고 손을 맞잡은 남녀 인형이 있었다.
“작동돼?”
“응. 보여 줄까?”
에드워드의 흰 손이 태엽을 감았다. 한 번, 두 번, 태엽이 돌더니 느리고 반짝이는 음이 오르골에서 흘러나왔다. 남녀 인형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부유하는 먼지 속에서 그 모습은 환상적으로 보였다.
에드워드는 이러고 노는 건가.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조프리, 수확제는 어떻게 할 거야?”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게 뭔데?’라는 게 속마음이었지만 난 어깨만 으쓱했다.
“내가 거기 나가?”
“폐하께서 사냥터도 데려가셨으니까, 수확제 파티도 혹시 모르잖아.”
사냥터랑 수확제. 둘이 연관 있나 보다.
“아닐걸?”
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프리를 싫어하는 왕.
“참석하고 싶어 했잖아, 조프리.”
“내가 참석하면 좋겠어?”
“그게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에드워드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일에 관심 갖는 애가 아닌데.
“내가 바라는 건 이뤄진 적이 없지만, 넌 다르니까.”
“그런가?”
에드워드는 조프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조프리가 아니었고, 바라던 건 늘 많았다. 그건 전부 이뤄지지 않았다.
아닌가. 어느 날 하늘에서 돈이 떨어졌으면 했고 누군가 곁에 있어 줬으면 했다.
생각해 보면 두 소원 모두 이루어졌다.
게임 속에서 이뤄 달라는 뜻 아니었는데.
“넌 소원 빌 때 이 세계에서 이뤄 달라는 말도 꼭 덧붙여서 빌어.”
“이 세계가 아니면, 저승에서 이뤄져?”
“그럴지도 몰라.”
“참고할게.”
에드워드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너 소원이 뭔데?”
에드워드는 궁을 떠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자신을 인정받고 어머니를 궁으로 모셔 오고 싶을까?
에드워드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대답이 정해져 있을 때 에드워드는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에드워드의 표정에서 얼이 빠져나가더니 그는 입을 다물었다.
“모르겠어.”
모르긴 뭘 몰라.
“네가 바라는 건 이뤄진 적 없다며. 그때 빈 소원이 있을 거 아냐.”
“이제 그건 됐어.”
에드워드는 멍한 채로 대답했다.
“정말?”
“응. 간절하지 않아.”
“지금은 다른 게 간절해?”
에드워드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것 같아. ……조프리, 날 버리면 안 돼.”
“뭐? 당연하지.”
에드워드가 내게 몸을 기대 왔다. 내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있었다.
“알잖아. 로제 부인은 널 버린 게 아니야.”
“알아. 기억해. 상황이 날 버리게 만들었지. 그렇지만 조프리, 넌 그러면 안 돼.”
나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돼도 나 죽이지 마라.
에드워드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의 등을 두드려 줬다.
춤추는 오르골이 빙글빙글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