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52화 (52/293)
  • 52.

    “왕자님은 쉬셔야 해요.”

    도트는 나를 좌석에 눕히고는 체온계를 꺼냈다. 내가 아파서 슬퍼할 정신도 없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입을 벌렸다. 입술 사이로 체온계가 들어왔다. 열은 내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왕은 매번 사냥 때마다 밀회를 즐겼던 걸까? 부인을 계속 만나 왔던 걸까? 왕비님을 속이고? 언제부터?

    막장 드라마 같은 집안이라고는 생각했지만, 현재 진행형 불륜이라니 정말 드라마 같았다.

    어차피 부인을 만나러 온 거라면 에드워드를 데려와도 좋았잖아.

    품에 손을 넣었다. 로켓의 딱딱한 몸체가 만져졌다.

    이걸 얻은 것만으로도 사냥터에 온 보람이 있었다. 게임으로 치면 히든 퀘스트 아이템이 아닐까.

    로켓을 열자 로제 부인과 왕의 초상화가 보였다. 둘 다 금발의 미인인 데다 애정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어서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건 확실히 왕비님 눈에 띄면 안 되겠다.

    에드워드가 보고 싶었다. 이걸 빨리 넘겨 버리고 머리를 비우고 싶었다. 에드워드는 좋아할 것이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만.

    12. 수면

    밀회라는 단어가 다시 생각난 건 에드워드의 얼굴 때문이었다.

    왕성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에드워드에게 연락을 넣었다.

    에드워드는 오겠다고 수락했다.

    오랜만에 보는 에드워드였다. 드디어 초대를 받아 주는군, 생각하다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에드워드를 챙겨 주는 쪽은 난데 매달리는 쪽도 나였다.

    어쩌다 이런 관계가 돼 버렸는지 모르겠다. 짝사랑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에드워드는 장미 정원을 통과해 내가 기다리는 정자로 걸어왔다. 늦여름의 장미가 붉게 피어 있어서 그 곁을 걸어오는 에드워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내가 에드워드에게 약한 건 게임 엔딩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렇게 생긴 어린애한테 모질게 대하는 쪽이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성에는 이상한 사람이 많았다.

    에드워드에게 인사하려고 입을 여는데 기침이 먼저 튀어나왔다.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하자 에드워드는 걸어오다 말고 멈춰 섰다.

    “괜찮아?”

    “괜찮아 보여?”

    “아니. 많이 아파?”

    “넌 어땠는데?”

    에드워드에게 묻자 그는 잠시 생각했다.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어.”

    “나도 그래. 너한테 옮아서 그런가 봐.”

    “정말?”

    “아니. 거짓말. 이렇게 늦게 옮는 감기가 어디 있어? 이상한 데 속지 마.”

    “재미없어.”

    그러면서 에드워드는 빙그레 웃었다. 왜 웃느냐고 물어보면 웃음마저 거둘 것 같아서 난 그냥 의자를 끌어 줬다.

    “앉아. 그 전에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에드워드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뭘 기대하겠어.

    “다녀왔어.”

    내가 먼저 말했다.

    “응.”

    “아니……. 잘 다녀왔어, 라고 물어야지.”

    “잘 다녀왔어?”

    시키는 일은 잘한다. 난 로켓을 쥔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조프리의 손에 로켓이 다 담기지 않아서 줄은 아래로 늘어졌다.

    “여행 선물이야. 열어 봐.”

    에드워드의 손 위에 로켓을 얹어 줬다. 이게 뭔지 알아본 걸까? 그는 로켓이 보일 때부터 숨 쉬는 것도 잊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로켓을 열었다. 그러고는 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의 주위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나도 로켓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데, 그는 다른 걸 보는 것처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하는 걸까?

    어느새 나도 숨을 멈추고 있었다.

    “어떻게?”

    “주인에게 받았어. 너한테 전해 주래. 네 거야.”

    “어떻게?”

    이번에는 방금 전과 다른 ‘어떻게’였다. 어떻게 내가 이걸 갖게 됐냐고?

    뭘 어떻게야, 너네 아버지가 너희 어머니랑 불륜을 저지르고 있어서지.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어떻게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받을 수 없어. 왜 이런 걸 나한테 보여 주는 거야?”

    에드워드는 로켓을 처음 받은 자세 그대로였다. 오목하게 모은 손안에 로켓을 작은 새처럼 받치고 있었다. 힘을 쥐어 잡지도, 로켓에서 눈을 떼지도 못했다. 금방이라도 그게 날아갈 것처럼.

    “너희 어머니가 네게 건네 달라고 했으니까.”

    “엄마를 만났어?”

    “응. 널 걱정하고 계셔.”

    “안 돼. 안 들을래……. 가질 수 없어.”

    “갖기 싫어? 네가 안 가지면 태워 버려야 되는데.”

    왕비님께 발견되면 곤란하거든?

    에드워드가 날 쳐다봤다. 딱히 비난한 것도 아닌데 죄책감이 들었다. 에드워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추기지 마. 갖고 싶어지잖아.”

    에드워드는 로켓을 닫고 그걸 내 가슴께로 내밀었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내가 강탈하고 있는 건가? 순간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가져.”

    “안 돼. 욕심이야.”

    너 욕심이 무슨 뜻인지나 알아?

    에드워드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그게 무슨 욕심이야? 너 단어 뜻 모르지?”

    “조프리, 넌 바보야.”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왔다. 에드워드는 로켓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빼앗기면 울 것이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누구 욕을 하는 거야?

    “이런 걸 보여 주면 어떡해.”

    그런데 에드워드가 웃었다.

    “그렇게 부추겨서 어떻게 하려고?”

    애정 어린 비난을 하듯이.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한번 봐줄게, 하는 것처럼.

    “가져. 네 거라니까. 나한텐 필요 없어.”

    난 홀린 것처럼 대답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의미 없는 도리질 같기도 했고 스스로는 다잡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만 부추기면 받을 거야. 확신이 들었다.

    “에드워드, 고개 숙여 봐.”

    난 에드워드가 반응하기도 전에 로켓을 그의 목에 걸어 버렸다.

    “버리려면 네가 버려. 난 이제 몰라.”

    에드워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어쩌려고 이러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원망하는 건지, 기뻐하는 건지.

    이윽고 에드워드가 한 손으로 로켓을 쥐었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욕심내도 돼?”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밝은 속눈썹이 보이고, 새파란 눈동자가 다가왔다.

    “어디까지?”

    에드워드가 내 코앞에 있었다.

    그가 내 어깨에 툭 기댔다. 고양이처럼 가벼운 접촉이었다.

    움직이면 그가 떠날까 봐, 난 온몸을 긴장한 채 대답했다.

    “그런 게 욕심이라면 마음껏 부려.”

    에드워드는 대답이 없었다. 잠시 뒤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질였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었다. 예전에 상상했던 대로.

    “정말 이상해……. 네가 너무 이상해서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고개를 든 에드워드가 웃었다. 세상을 선물 받은 아이라도 그렇게 웃을 수는 없을 거였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에드워드의 마음을 얻었다.

    * * *

    조프리의 일상은 순조롭게 재개됐다.

    달라진 건 에드워드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 정도였다.

    에드워드는 점심이면 내 궁으로 찾아와서 오후까지 머물다 갔다. 그가 정원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햇볕을 받는 고양이가 떠올랐다.

    전날 저녁 보충 수업을 가르치러 온 강사는 내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 교재를 몇 권 가져왔다. 나는 다음 수업까지 그 책들을 읽기로 약속했는데, 다음 수업은 내일이었다.

    난 매일 같은 시간 이뤄지는 수업에 ‘다음 수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슨 책이야?”

    에드워드가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보였다. 난 표지를 보여 줬다.

    “보충 수업용 보조 교재.”

    “그 옆에 건?”

    에드워드가 책 더미를 가리켰다.

    “보충 수업용 보조 교재들.”

    “언제까지 읽어야 하는데?”

    “내일.”

    “읽을 수 있어?”

    “아니.”

    난 책 위로 엎어졌다. 에드워드 덕분에 공부할 의욕이 샘솟고 있었다.

    턱을 괴고 날 내려다보던 에드워드가 물었다.

    “내가 도와줄까?”

    “무슨 수로?”

    에드워드가 책을 휙 가져갔다. 그러고는 첫 장부터 넘기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시선을 책에 둔 채 페이지만 넘겨서 난 그가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요약해 줄게.”

    에드워드가 책을 덮었다. 뭘?

    에드워드는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이 책의 의의와 진행 방향, 그리고 책에서 묘사한 전쟁의 역사에 대해 말했다. 난 이 책의 1장을 반절 정도 읽었고, 에드워드의 요약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책장을 넘기는 속도로 책을 외웠다고?

    역시 머리 좋은 거 맞았잖아.

    “너 오전 수업 내용도 기억해?”

    “응. 다시 들려줘?”

    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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