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51화 (51/293)
  • 51.

    “어디 아프지는 않나요? 건강한가요? 성에서 행복한가요? 모두 에디를 아껴 주나요?”

    부인은 방금까지 왕과 함께 있었는데. 왕은 그런 얘기를 해 주지 않았나?

    나는 부인을 울릴 수도 있었다. 부인이 자책으로 견딜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은 너무 쉬웠다. 부인은 지금도 괴로워 보였으니까.

    “에드워드는 잘 지내고 있어요. 성안은 모든 게 풍족해서 아플 일도 없어요. 에드워드는 건강하고, 키도 저보다 커질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부인.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왕은 부인을 달랬을 것이다. 이런 부인을 보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인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죄송합니다. 전하께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됐는데……. 저를 뻔뻔한 여자라고 생각하시겠죠.”

    “아니에요.”

    부인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에디는 저를 기억도 못 할 거예요. 자길 버린 무정한 어미라고만 생각하겠죠. 그 아이를 성에 보낸 대가로 호의호식하면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어요. 얼마나 원망하고 있을까…….”

    “에드워드는 부인을 걱정하고 있어요.”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부인은 끝도 없는 자책을 시작했다. 열심히 굴을 파고 있기에 제지해 봤으나 부인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전하께서는 정말 상냥하시네요. 폐하와 똑같으세요.”

    부인이 애써 웃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울지 말아야지” 하고 중얼거리며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랑 부인을 만나러 간 적도 있어요.”

    부인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네?”

    “기억하세요? 네 명의 아이들이 부인의 저택을 방문한 날, 덥수룩한 검은 가발을 쓴 남자애가 부인과 얘기했잖아요. 그 애가 에드워드예요.”

    부인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이 깜짝 놀랄 정도로 에드워드랑 똑같았다. 난 에드워드가 왕을 빼닮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은 부인을 더 닮은 것 같았다.

    “에드워드가 절 찾아왔었다고요?”

    “네.”

    “어떻게……. 아니, 어째서?”

    “아이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는 게 이상한 일인가요?”

    “그 아이는 저를 만나면 안 돼요!”

    부인이 비명처럼 외쳤다. 잔뜩 숨죽인 목소리가 선뜩하게 들렸다.

    “누구에게 이 얘기를 또 하셨나요? 왕비님이 아시나요? 안 돼…….”

    “왜 그러세요?”

    부인이 휘청거렸다. 재빨리 부인의 팔을 잡았다.

    “약속했어요.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에디를 만나지 않겠다고. 에디를 인정해 주시는 대신, 폐하께서 계신 성에 발을 들이지 않고, 주제넘은 욕심을 품지 않겠다고…….”

    “누구와?”

    부인의 공포에 질린 눈과 마주쳤다. 답을 알 것 같았다. 왕비님이다.

    “아무도 몰라요. 에드워드가 부인을 만나러 간 거.”

    “그 아이들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예요. 모두 에드워드의 친구들이에요.”

    난 부인을 안심시켰다. 부인은 내게 매달린 채 간신히 기운을 차렸다. 나는 다시 나올 것 같은 기침을 참았다. 성안에 아픈 사람이라곤 없다고 말해 놓고 내가 기침할 순 없었으니까.

    “에디가……. 저를 그리워하나요?”

    부인은 대답을 듣기 두려운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부인의 사과파이가 먹고 싶다고 했어요.”

    부인은 다시 얼굴을 가리더니 미안해요, 라고 사과했다. “기억하고 있었어.” 부인은 감정을 추스르고 목에서 로켓을 빼더니 내게 건넸다.

    “에디에게 전해 주실 수 있나요? 부탁드려요. 그 아이에게 좋은 형제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좋은 형제. 양심이 아파 오려고 했지만, 난 손을 내밀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왕자님!”

    멀리서 나를 찾는 소리였다.

    “어디 계세요? 왕자님!”

    도트가 울먹이고 있었다. 온 성의 사람들을 모두 깨울 것 같았다.

    로제 부인이 내 손을 벌리고 로켓을 쥐여 줬다. 금속이 손바닥에 꾹 눌렸다. 체인이 손목으로 흘러내렸다.

    내가 고개를 드는 순간, 부인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뒤돌아 달려갔다. 나는 도트에게 붙잡혔다.

    심장이 두근거리던 게 그제야 의식됐다. 기침이 터져 나왔다. 도트가 내게 매달렸다.

    “와, 왕자니임! 괜찮으세요? 전 왕자님을 잃어버린 줄 알고…….”

    “목이 말라서 잠깐 나왔어.”

    “절 깨우셨어야죠! 혼자 나가시다니,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아니에요, 왕자님이 일어나신 것도 알아채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전 시종 실격이에요!”

    난 도트의 팔을 잡았다.

    “누구 봤어?”

    “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전 왕자님의 시종이잖아요, 왕자님이 어디 계실지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자책하는 와중에도 도트는 자부심 넘치게 말했다.

    아, 그러냐. 난 도트를 달래서 침대로 돌아갔다. 온몸이 아팠다. 눈 감으면 기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트가 물을 가져왔다. 난 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가슴께가 체한 것처럼 더부룩해졌다.

    로제 부인, 왕비님, 왕, 에드워드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품에 넣은 로켓이 차가웠다. 내게 열이 있는 걸까?

    난 그 상태로 잠들었다.

    꿈을 꿨다. 말을 탄 에드워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넘어진 채였다.

    질투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역광을 받은 에드워드의 금발은 끝부분만 빛에 녹아들듯 반짝이고 있었다.

    넌 왜 그렇게 아바마마를 닮은 거야. 왜 너만 닮은 거야.

    에드워드는 왕과 꼭 닮은 눈으로 나를 힐끗 보고는 지나쳤다.

    ‘괜찮으세요?’

    그레이가 손을 내밀었다. 공손한 말투였으나 눈은 나를 깔보고 있었다.

    난 나를 무시하는 그레이보다도 에드워드가 미웠다.

    별궁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왕은 나를 사냥에 동행했다. 나는 왕이 날린 화살 때문에 놀라 날아오른 새를 바움쿠헨 경이 쏘아 맞히는 모습을 봤다.

    왕은 바움쿠헨 경의 솜씨를 칭찬했지만 표정은 숨기지 못했다. 바움쿠헨 경은 왕의 불편한 심기를 달랠 생각이 없었고, 사냥은 끝내주는 분위기로 파장했다.

    난 말 위에서 곡예를 하는 기분이었다. 열과 두통이 지속됐다. 내 몸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았다.

    더워서 땀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 추워서 떨었다. 발목에 추가 매인 것처럼 무게 중심이 아래로 향했다.

    기침 소리가 신경 쓰이는지 왕의 기사들이 나를 간혹 돌아봤다. 왕은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무시받고 있다. 조프리는 무시당하고 있다. 내가 말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더라도 왕은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았다.

    바움쿠헨 경이 속도를 늦춰 내게 다가왔다. 그가 나를 따라 왕을 쳐다봤다.

    “사냥은 기대만큼 즐거웠어, 경?”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바움쿠헨 경은 내 속도에 맞춰 말을 몰았다.

    “현실은 늘 기대에 못 미치는 법이니까요. 뭐……. 죄송합니다.”

    “경이 내게 잘못한 일 있어?”

    바움쿠헨 경은 어깨만 들썩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냥은 끝났다.

    * * *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움쿠헨 경은 내 마차에 올라탔다. 밖에서 훌륭한 기사인 척하고 있기도 질린 모양이었다.

    도트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그가 가져온 이야기는 도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바움쿠헨 경은 도트가 없는 사냥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들어 댔다.

    “너무하시네요! 왕자님께서 얼마나 노력하셨는데! 아픈 왕자님께서 그토록 의연하게 행동하셨는데 폐하께서는 어쩌면 그렇게 무정하실 수 있죠?”

    도트는 진심으로 분개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좀 어색했다. 얘는 왜 이렇게 충성스러운 걸까? 조프리가 얘한테 뭘 해 줬다고.

    사람이 한결같기는 어려운 법인데 도트는 시종일관 충성스러웠다. 그야 시종 캐릭터니까 당연하겠지만.

    “이렇게 훌륭한 왕자님이신데요! 마음이 좀 여리시고, 가끔 혼자 사라지셔서 제 심장을 떨어뜨리곤 하시지만!”

    “그러게 말이야.”

    바움쿠헨 경이 맞장구쳤다. 도트는 진심이었지만 경은 아무래도 날 놀리려 드는 것 같았다.

    한결같기로는 이 사람도 만만치 않았다. 하긴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랬다. 열심히 노력해서 폐하 눈에 들어 보자거나, 헛소리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바움쿠헨 경은 이상했다.

    “폐하께선 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요?”

    도트는 우울해졌다. 바움쿠헨 경의 맞장구는 나쁜 효과를 가져왔다.

    그대가 저렇게 만들었잖아, 수습해 봐. 난 눈짓으로 지시했다. 바움쿠헨 경은 갑자기 바쁜 일이 떠올랐다며 마차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 폐하께서 그러시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그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왕자님이 얼마나…….”

    도트가 입을 다물었다. 난 그가 왜 저렇게 상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상관없어.”

    난 진심으로 말했다.

    왕이 조프리를 무시하든 말든 조프리는 잘 자란다. 난 조프리가 아카데미에서 잘 지내는 모습을 봤다. 지금은 친구 하나 없어도 그때쯤엔 인기인이 될 거고 여주인공에게 반하기도 할 거다. 그러면 안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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