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50화 (50/293)
  • 50.

    “마차 여행 때문에 무리하셔서 그래요. 오늘 쉬시면 안 돼요?”

    도트가 물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왕비님과 바움쿠헨 경의 기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왕이 조프리를 인정하고 다정한 아버지가 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왕비님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고 그 대열에 바움쿠헨 경도 가세했다.

    노력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최근 나는 거기에 회의적인 입장이 됐다.

    어린 에드워드도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데 하물며 왕이야.

    난 에드워드가 귀엽게 굴어도 수상쩍었다. 그래 놓고 또 왜 날 걱정하네 마네 하는 소리를 할지도 몰랐으니까.

    왕은 사람들을 세워 놓고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혼자 말 위에 올라탄 채여서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가 높았다.

    왕의 말은 덩치 큰 흑마였다. 게임에서 에드워드의 말은 백마였는데 여주인공이 그걸 보고 어이없어하던 게 떠올랐다. 백마 탄 왕자님이라니 너무 전형적인 게 아닌가.

    “들었느냐?”

    고개를 들고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왕이 물었다. 그는 미심쩍은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걸 보니 왕이 뭔가 조프리에 대한 말을 한 모양이었다.

    왕이 날 사냥터로 데려온 건 ‘말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내 말대꾸 때문이었다.

    대답대로 말을 다루는 데 익숙해졌는지 확인하려는 건가?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왕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내가 “예.”라고 대답하자 왕은 기사 한 명을 내세웠다.

    “이자를 잘 따라다녀라. 왕자를 부탁한다.”

    기사가 가슴 위에 주먹을 올렸다.

    왕은 기사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이랴!”

    왕을 따라 왕의 기사들도 움직였다. 그 사이로 바움쿠헨 경이 보였다. 그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있었다. 그마저도 왕의 일행을 따라 사냥터로 사라졌다.

    난 기사와 함께 숲의 외곽에 남겨졌다. 아니, 확인은?

    잠시 뒤에 상황을 이해했다. 왕은 기어코 귀찮아진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데려오긴 했는데 얠 진짜 달고 다녀야 하나…….’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는지, 즉석에서 기사 하나를 붙이고 제게서 떼어 놓았다.

    자기가 했던 말도 잊은 듯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

    진짜 갔나?

    내가 숲 속으로 몇 걸음을 옮기자 기사가 뒤에서 말했다.

    “너무 깊이 들어가시면 위험합니다.”

    깊이?

    열 걸음만 걸었어도 덜 억울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졌다. 난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했다. 폐가 쥐어짜이는 듯했다. 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기침이 멈추자 피곤해졌다. 아침부터 뭐 하는 짓인지. 왕비님의 기대는 기대에서 끝날 운명이었다. 어쩌면 조프리의 기대도.

    조프리는 에드워드의 말을 빌려서 타 보려고 했다. 말을 무서워한다는 애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답은 뻔했다.

    조프리가 말을 타길 원한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이 왕비님은 아닐 것이다. 도트도. 당연히 에드워드도.

    조프리의 좁은 인간관계를 떠올려 보면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애초에 백치라는 소문이 파다한 에드워드에게 조프리는 왜 열등감을 갖고 있었을까? 아직 조프리는 2인자가 아닌데.

    조프리가 왕의 인정을 원했다면 이해가 됐다.

    말은 꼬리를 흔들어 날벌레를 쫓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기침을 하면서 나는 고삐를 놓지 않았다. 말의 고삐만 놓치지 않으면 말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많은 문제가 예방된다.

    조프리가 말 타는 모습 정도는 봐 주지. 나만 해도 왕이 아니었으면 승마를 배울 일도 없었는데.

    나는 말에 올라탔다. 발 디딤대는 필요 없었다.

    어떻게 올라갔어? 내가 물었을 때 에드워드가 ‘그냥’이라고 말했던 건,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익숙해지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말의 배를 발로 툭툭 차자 말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왕자님?”

    “방으로 돌아갈래. 그대도 쉬어.”

    왕이 돌아올 때까지 불쌍하게 기다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조프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야 모르겠지만.

    별궁으로 돌아가는 동안 체온이 올랐다.

    눕고 싶고 쉬고 싶었다. 조프리의 몸은 어리고 감정적이라 쉽게 마음이 물러졌다.

    외로웠다. 혼자 사냥터에서 돌아가는 것뿐인데.

    아파서일 것이다. 아프면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난 아팠을 때 늘 혼자였으니까.

    조프리가 된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난 예전에 아프다고 앓은 적이 없었는데 조프리가 되어서는 내가 괜찮아도 주변에서 먼저 걱정이었다. 그래서 난 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가자 도트는 잘 생각하셨다면서 날 침대로 떠밀었다. 난 그가 주는 대로 수프와 따듯한 차를 마시고 체온계를 입에 물었다.

    잠들 때까지 난 손 하나 까딱할 필요 없었다. 내가 기침을 하자 도트는 물에 적신 수건을 내 목에 감아 줬다.

    따듯했다.

    이런 일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나를 간호하다 잠든 도트가 보였다. 그는 의자에 기댄 채 목을 옆으로 꺾고 있었다. 목을 바로 세워 주고 담요를 덮어 줬다.

    목이 마른데 물병은 비어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식당이나 어디쯤에는 물이 있겠지.

    밤의 복도는 왕성과 달리 잘 관리되어 있지 않았다. 난 초를 들고 움직였다. 걸을 때마다 작은 불꽃이 휘청거리는 데다가 촛농이 손등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길을 찾는 데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몇 번이나 복도를 돌다가, 난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종이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아무도 없었다. 난 멈춰서 기침을 했다. 목이 마른 것보다 이제는 아파졌다. 물을 마셔야 하는데.

    그 순간 촛불이 꺼졌다.

    나는 잠시간 멈춰 있었다. 당황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길을 잃었고, 난 어둠 속에 남겨졌다. 곤란한데.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 손을 벽에 대고 앞으로만 걸으면 어딘가는 도달하지 않을까? 미로에서 길 찾는 법이 떠올랐다. 동시에 미아가 되었을 때의 행동 양식도 떠올랐다.

    열한 살의 조프리가 취할 행동은 후자여야겠지만, 난 조프리가 아니니까. 벽을 짚고 걷기 시작했다. 궁에 사람이 없을 리가 없었다. 깊은 새벽에도 순찰하는 병사는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마주치겠지.

    잠시 뒤에 불빛을 발견했을 때 난 역시라고 생각했다. 초를 든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빛에 비친 얼굴이 낯익었다.

    장식처럼 화려한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섬세한 이목구비와 몸에 걸친 로브가 보였다.

    그 사람은 긴장한 채 걷고 있었다. 밤의 왕성을 몰래 돌아다니는 사람을 나는 한 명 더 알고 있었다.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의 어머니 로제 부인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부인을 따라가고 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부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떤 문을 두드렸다.

    문은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그곳에서 왕이 나왔다.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인이 들어올 수 있게 문을 붙잡고만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불안해지고 가슴이 뛰었다. 나는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문이 닫히고 빛이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내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밀회?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른다. 심장 소리가 잦아들고 숨쉬기가 편해질 때까지 난 쭈그려 앉아 있었다.

    복도에 사람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왕이 사람들을 물린 것이다. 나는 운이 나빴다. 어쩌면 너무 좋았거나. 이번이 아니었다면 나는 로제 부인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집안의 아침 드라마 같은 사연을 상상하며 난 부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왕은 사냥을 하러 별궁에 온 게 아니라 바람을 피우러 온 거였을까?

    왕비님은 이 사실을 아실까?

    여름이었다. 밤은 짧았다.

    해가 뜨기 전에 로제 부인은 왕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다가 나와 마주쳤다.

    로브를 쓴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돌렸다. 필사적으로 자기 얼굴을 숨기는 게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 같았다.

    왕은 누굴 마주쳤을 때의 대처 방식도 안 알려 주고 뭘 한 걸까?

    난 그녀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녀가 필요했다. 에드워드를 위해서.

    에드워드가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

    “에드워드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

    로제 부인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넌 누구니?”

    “에드워드의 형제예요, 부인.”

    초가 올라왔다. 촛불이 내 얼굴을 비췄다.

    “조프리 왕자.”

    부인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 * *

    난 로제 부인에게 에드워드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 애가 잘 지내고 있나요? 정말로 잘 지내고 있나요?”

    부인이 내게 매달려 묻지만 않았어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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