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49화 (49/293)

49.

“누구에 대해 말하는 거요?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에드워드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두 분 싸우실 거면 우린 일어나면 안 되나?

아이들 정서에 안 좋은 집안이다.

“물론 에드워드에 대해서죠. 에드워드, 내게 불만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그대가 아픈 것도 챙기지 못하다니, 어미로서 실격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하물며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아니에요, 어마마마. 죄송합니다.”

에드워드가 입을 달싹였다.

“그대에게 사과를 들으려는 게 아니에요. 어쩌면, 자식이 아픈 것도 모르고 폐하께 듣고 있을까.”

“걱정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왕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왕은 에드워드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과정에서 식기를 건드렸다. 포크가 쨍 소리를 내며 접시와 부딪혔다.

마침 음료를 마시고 있던 나와 왕의 눈이 마주쳤다.

보지 말걸.

“출발할 준비는 다 됐느냐? 짐까지 내가 챙겨 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왕이 잘 걸렸다는 듯 물었다.

다른 건 챙겨 준 적 있었나. 나는 착하게 대답했다.

“예. 시종이 다 해 주니까요.”

왕의 눈썹이 올라갔다.

“사냥터에서도 남이 대신 해 주길 바라진 마라. 거기까지 시종을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

“예, 아바마마.”

“네 몸은 네가 챙겨라. 짐만 될 것 같으면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

“명심할게요.”

눈치를 보던 시종이 음식을 들여왔다. 만찬은 훌륭했지만 에드워드는 거의 먹지 않았다.

그나마 먹는 것도 메인으로 나온 고기류였다. 안 그래도 영양 균형이 파괴된 애인데.

나도 뭘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 가족은 가족 식사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서로를 괴롭히려고?

각자 먹고 싶은 사람과 함께하면 소화도 잘되고 좋을 텐데.

왕은 식사를 함께하고 싶은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이 사람과 앞으로 보름은 같이 있어야 한다.

내가 우울했던 건 비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 * *

사냥터로 떠나는 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넓은 공터에서 왕비님은 시녀들과 함께 왕의 일행을 배웅했다.

“다녀오겠어요. 궁을 부탁해요.”

“폐하께 무운이 함께하기를.”

왕이 왕비님의 이마에 입을 맞춰서 나는 좀 놀랐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고, 왕비님도 미소만 짓고 있었다.

“다녀오세요.”

왕이 마차에 올랐다. 왕비님은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나는 왕비님을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아요, 왕자.”

“네, 어마마마.”

나는 왕과 다른 마차에 올랐다. 내 마차가 따로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기사들은 말에 올라탔고, 병사들이 그 뒤로 도열했다. 왕의 행렬은 긴 꼬리를 가진 뱀처럼 끝없이 성문을 통과해 거리로 빠져나갔다.

행렬이 광장을 지나칠 즈음 나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기사들이 마차의 속도에 맞춰 호위하고 있었다.

내가 왕의 기사를 알 리는 없었지만, 내 옆에서 달리는 기사의 얼굴은 익숙했다. 손목 부상과 장마가 겹쳐 한참 못 보던 얼굴이었다.

“전하, 들어가 계시죠? 위험합니다.”

바움쿠헨 경이 말했다.

“경이 왜 여기 있어?”

“그야 저는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니까요? 폐하께서도 제 활 솜씨가 보고 싶으셨나 봅니다.”

“첫 참가야?”

“예, 그렇습니다.”

“올해만 초대받았어?”

바움쿠헨이 씩 웃었다.

“올해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거리로 나와 왕의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모자를 쓴 남자들과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는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손을 흔들어 줬다.

아이가 펄쩍 뛰더니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뭐라고 소리쳤다. 내 쪽에선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뒤로 잡아당겼다.

바움쿠헨 경이 눈만 움직여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쩐지 기뻐 보였다.

“왜 그렇게 봐?”

“아닙니다.”

“전하, 너무 기대지 마세요.”

도트가 마차 안에서 불렀다. 때마침 마차가 덜컹거렸다. 창틀에 머리를 받을 뻔했다. 나는 몸을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조프리가 되고 처음으로 왕성을 떠나 하는 긴 여행인데도 흥분감은 얼마 가지 않았다.

마차를 탄다. 어디선가 멈춘다. 머문다. 다시 마차에 탄다.

그런 일이 반복됐다.

몸만 지치고 할 일은 없는 여행이었다. 마차는 기차나 버스보다 훨씬 덜 튼튼한 운송 수단인 데다, 이곳은 현대의 포장도로도 깔려 있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마차는 멀미를 유발했다.

마차 안에서는 별달리 할 일도 없었다. 난 도트와 수다를 떨다가 그마저도 몇 시간 만에 질려 버렸다.

그 다음은 자기만 했다.

길고 지루한 여행 끝에 일행은 별궁에 도착했다. 낡은 별궁보다 시선을 압도한 건 끝도 없이 펼쳐진 숲이었다.

왕국은 며칠을 이동해도 산이랄 게 보이지 않았다. 평지로만 이루어진 나라 같았다.

높은 봉우리 같은 것도 없이, 나무만 무성히 펼쳐진 숲은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산이라면 한국에서도 매일 봤지만 그 산들은 짐승이 살 수 없는 장소였다.

왕비님의 걱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치지 말고 조심해라 거듭 말했던 건 과보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모두 여행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첫날은 일정이 없었다.

물론 시종들과 병사들은 쉴 새 없이 바빴다.

만찬을 준비하고 숲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사냥일에는 숲에 위험한 짐승이 없어야 했다.

도트는 사냥에 따라갈 수 없었다. 왕은 너무 많은 사람이 주변에서 북적대기를 바라지 않았다. 짐승들은 기감이 예민해서 도망간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병사들이 숲을 통제하고, 실력 있는 기사들이 왕을 호위했다.

왕의 취미 생활에는 여러 사람의 노력이 필요했다.

난 침대에 축 늘어졌다. 도트가 짐을 정리한다는 걸 말리고 그도 누워 있게 했다.

도트는 내 침대에는 절대 누울 수 없다며 의자를 가져와서 그 위에 늘어졌다.

식사 전에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됩니까?”

바움쿠헨 경이었다.

“들어와.”

“주무십니까?”

바움쿠헨 경은 우리 꼴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좀 진지한 이야기인데요.”

난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내일 폐하께 잘 보이시려면 역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별로 잘 보이고 싶지 않은데.”

“왜요? 폐하 싫어하십니까? 좀 짜증 나는 분이긴 하지만 왕이시잖아요?”

“경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혼내실 겁니까?”

“아니.”

난 한숨을 쉬고 다시 베개를 머리 밑에 받쳤다. 조프리 주변에 불경한 사람들이 모이는 건 천성일까? 조프리는 포지션부터 잘못돼 있는 게 아닐까?

“제가 뭐 특별히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전하께서 수련하시는 모습을 봤으니까요. 영 마음이 없으셨다면 추가 수련을 하지도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바움쿠헨 경이 머리를 긁적이며 내 표정을 살폈다. 경은 아직도 오해하고 있었다. 그냥 에드워드와 놀다가 다쳤을 뿐인데.

사실 낫고 나면 경에게 말할 생각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통증이 오래가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다.

지금 와서 “사실은…….” 하는 것도 없어 보이고.

난 그냥 웃으며 물었다.

“경의 말이 맞는다고 하면?”

“병사들을 시켜 작은 짐승을 몰아 보겠습니다. 한 마리 잡아서 폐하께 바치면 기뻐하실 겁니다.”

“정말?”

사냥 성공 여부야 둘째 치고 바움쿠헨 경이 왕을 알고 하는 말인지 궁금했다. 그 사람 조프리 싫어하던데.

“그럼요. 알렉스 녀석을 가르치다 느낀 건데 그놈이 저 생각해서 뭐 하나 하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더군요. 전하께서 첫 사냥감을 바친다는데 폐하께선 얼마나 기특하고 흡족하시겠습니까?”

역시 모르는 게 맞았다.

“경, 폐하랑 친한가?”

“대답하면 저 불경죄로 잡혀가는 겁니까? 제 주인이시고 심장이신 폐하를 마땅히 존경하고 따를 뿐입니다.”

“안 친하군?”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죠.”

“내일 봐. 저녁 맛있게 먹고.”

“예? 전하?”

“내일 보면 알게 될 거야.”

왕과 조프리의 관계는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모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고, 왕비님은 조프리를 사랑하지만.

왕은 에드워드를 사랑할까? 난 그게 궁금했다.

* * *

다음 날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사냥터로 나섰다.

하늘에 구름이 보이지 않았다. 낮이 되어 기온이 오르면 그림 같은 휴일 날씨가 될 거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숲은 생동감이 넘친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싱그러운 공기를 품고 있었다.

정작 내 상태는 좋지 않았다. 밤부터 온몸이 쿡쿡 쑤셔서 성장통이란 건 언제 끝나는 건가 생각했는데 새벽에 눈을 떴을 땐 속까지 안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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