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48화 (48/293)
  • 48.

    에드워드의 등 뒤로 활짝 열린 창과 창백한 달이 보였다. 달빛이 에드워드의 맨발을 비추고 있었다.

    나무를 기어오른 걸까? 에드워드는 테라스를 통해 들어온 듯했다.

    그렇구나. 경비병이 내 침실 테라스를 전혀 감시하지 않아서 에드워드가 들어올 수 있었구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성의 보안 시스템이 허술하거나 에드워드가 대단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난 어느 쪽도 아닐 것 같았다.

    그냥 이 게임 설정이 허술한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예의 시종 복장이었다.

    “오는 길에 아무도 안 만났어?”

    “잘 피해서 왔어. 너한테 피해 안 갈 거야.”

    머리가 아파 오려 했다.

    “에드워드, 너 내 말 기억 안 나지?”

    “무슨 말?”

    에드워드는 세 살 때 헤어진 어머니는 기억하는 애였지만 세 달도 되기 전에 내가 한 말은 까먹는 애였다.

    “밤에 다니지 말랬잖아.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 안 했어.”

    “했어.”

    “아니야. 넌 ‘너무 어두울 때 돌아다니지 마. 걱정되잖아.’라고 말했어.”

    “기억하잖아?”

    “응.”

    “네 기억력 칭찬하는 거 아니거든? 지금이 밝아?”

    에드워드는 빛을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럴 것도 없이 한밤중이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조프리의 침실은 초가 밤새도록 켜 있었지만, 그래도 어둡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해석에 따라선.”

    에드워드가 결론을 내렸다. 해석 같은 소리 하네.

    “어둡잖아. 밤이야.”

    “다친 건 넌데 왜 나를 걱정해?”

    걱정하는 줄은 알아?

    그래. 솔직히 이렇게 했는데 모르면 안 되지.

    “왜일 것 같아?”

    “모르겠어. 넌 너무 이상해졌어.”

    “네가 더 이상해.”

    “조프리, 아파?”

    에드워드는 자기 말만 했다. 난 얇은 이불을 내리고 손목을 보여 줬다.

    “얼굴은 괜찮고, 손목은 아파. 너 제대로 때렸더라.”

    “손목 부러졌어?”

    에드워드의 시선이 흰 붕대에 고정됐다.

    “부러지라고 쳤어?”

    웃으며 묻자, 에드워드가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흔들었다.

    “그런데 왜 부러지겠어.”

    “조프리. 내 손목 부러뜨릴래?”

    “너 이상한 책 읽었어?”

    에드워드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함무라비 법전 같은 거 읽은 것 같은데.

    “졸려?”

    다시 묻자 에드워드는 맹하게 대답했다.

    “아니.”

    “졸려서 헛소리하는 것 같은데.”

    “방금 전까지 자던 건 너야.”

    “그래. 너 때문에 못 자고 있잖아.”

    “조프리, 정말 괜찮아? 나한테 보복하지 않아도 돼?”

    에드워드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나 네가 뒤늦게 보복하면 싫을 것 같아.”

    “에드워드.”

    얘 진짜 졸린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자.”

    “……응.”

    에드워드는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멍하니 일어났다.

    그는 테라스로 나가서 난간을 훌쩍 넘었다. 이내 곡예단처럼 몸을 가볍게 놀려 사라졌다.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걸까. 독학?

    조프리가 질투심을 느낄 만도 했다. 조프리 입장에선 자긴 한 달에 몇백만 원짜리 과외를 받고 있는데 교과서만 공부한다는 애가 전교 1등인 상황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데 타고나길 뭐든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유연호도 그런 부류였다.

    운동은 잘 못했지만.

    상대가 나와 너무 다르면, 질투심 같은 건 생기지 않는다.

    조프리는 2등은 할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을 것이다.

    조프리를 힘들게 한 일등 공신은 물론 왕비님이라고 생각하지만.

    11. 사냥터에서 생긴 일

    손목 통증은 예상보다 오래가서 난 한참 동안 바움쿠헨 경의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사냥일은 하루하루 다가왔다. 계절은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초가을의 장마가 찾아왔다. 더불어 난 발목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조프리의 성장통이었다.

    짧은 통증은 그냥 잊고 넘길 만했는데, 하루 내내 욱신거리다 잠까지 깨우는 건 어떻게 대처할 수 없었다. 뼈 마디마디가 신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조프리와 에드워드는 나중에 엄청나게 크던데, 난 이 몸으로 그 성장기를 다 맞게 될까?

    현실을 수긍하고 어디서나 잘 적응하는 게 내 장점이었다. 나는 언제나 깊게 생각하는 법이 없어서 몇 번이나 이사를 가고 주변 환경이 바뀌어도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었다.

    거울을 보면 어린 조프리가 있고, 그 모습이 이젠 익숙했다.

    겉도는 옷을 입은 느낌은 처음 일주일 만에 사라졌다. 이제는 누가 뒤에서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위화감 없이 돌아봤다.

    이래도 괜찮을 걸까?

    빗방울이 창문을 때렸다. 이유 없이 우울해지는 건 장마 때문일지도 몰랐다. 한국의 장마처럼 거세지 않은데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우울한 사람이 왕성에는 나 말고도 더 있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어서, 궁인들은 책잡히는 일이 없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넓은 왕성이 최근에는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그 심사 불편한 사람은 왕이었다. 비 때문에 사냥이 취소될 위기였던 것이다.

    왕은 성내의 천문박사들을 수차례 불러 닦달했다. 과거의 기록과 대조해 기후를 예측한 죄밖에 없는 천문박사들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슈퍼컴퓨터도 날씨 예측에 실패하는데 사람이 하는 일이 그보다 나을 리 있나.

    몇 명의 천문박사가 사직서를 제출하고 성을 탈출한 뒤에야 남은 천문박사들은 사냥을 취소할 필요 없다는 보고서를 작성해 왕에게 올렸다.

    왕의 기분은 다시 정상 상태를 회복했다.

    여기까지가 시종들이 물어 온 소문이었다.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왕의 기분은 그보다 좀 더 좋아져서 떠나기 전에 가족들과 식사나 한번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 듯했다.

    식당에는 왕비님과 에드워드가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맞은편에 두고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왕비님의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떠올라 있어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 모습을 전에도 본 적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게 낯설었고 두 사람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 모습이 얼마나 이상한 모습인지 안다.

    보는 사람까지 멍해지는 얼굴을 하고 있던 에드워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시선을 돌렸다.

    에드워드의 눈을 마주 보고 있다간 무심코 ‘편식하지 마’라고 말해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동안, 그는 점심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그동안 바움쿠헨 경도 못 만났기 때문에 내겐 심심한 시간이었다.

    도트를 통해 에드워드에게 보낸 도시락은 한 칸만 빼고 비었다. 그 칸은 샐러드와 채소 칸이었다.

    에드워드는 자기가 먹는 음식밖에 안 먹었다.

    샐러드를 싫어했고, 특히 드레싱이 없는 샐러드는 먹지 않았다. 야채주스는 물론이고 당근스틱 같은 건 한 조각도 입에 넣지 않았다.

    저번에는 스튜는 다 마시고 거기 들어간 브로콜리만 남겨서 돌려보냈다.

    옆에 있으면 편식 습관을 잡아 줄 수 있는데. 에드워드는 잔소리를 하면 그래도 듣는 시늉은 했다. 내가 안 지켜보면 또 그대로였지만.

    네가 그러고도 키가 180 넘게 클 것 같아?

    크겠지만.

    “뭐 하는 거냐? 자리에 앉아라.”

    왕은 마지막으로 식당에 도착했다. 그의 지적을 듣고 난 에드워드 옆에 앉았다.

    식당은 조용했다.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들이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전채가 앞에 놓이는데 왕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안색이 나쁘구나, 조프리. 건강은 괜찮으냐?”

    “예?”

    “감기가 유행한다더군. 건강 조심하거라. 내일부터 궁을 떠나 있을 텐데 아파서야 쓰겠느냐?”

    네?

    되물을 뻔한 걸 참았다.

    왕은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 같았을 것이다.

    사냥일이 정해져서 왕의 기분이 좋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좋다고?

    난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럴게요.”

    왕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에드워드, 너도 조심해라.”

    “네, 아바마마.”

    식탁 위에 침묵이 흘렀다. 왕은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했지만 흐름이 어색했다.

    에드워드는 이 식탁에서 투명 인간 역할이었다. 저번 가족 식사에서는 그랬다.

    왕이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그는 에드워드에게 말을 붙여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왕비님에게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 안색이 안 좋네요. 어디 아픈가요?”

    에드워드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왕비님을 쳐다보자 왕비님이 미소 지었다.

    에드워드의 뺨은 뽀얗게 살이 올라 발그레한 혈색을 띠고 있었다.

    왕비님은 색맹이 아니었다. 물론 에드워드를 걱정하고 있지도 않았다.

    “옮는 병은 아니겠죠?”

    왕의 표정이 굳었다.

    “의사를 데려오렴.”

    왕비님이 시종에게 명령했다.

    “밀라네. 내 눈에 왕자는 괜찮아 보이는데요.”

    왕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폐하, 저는 에드워드가 걱정되는걸요.”

    “식사 중에 의사를 부를 필요가 있겠어요? 끝나고 해도 되잖아요.”

    “그러다가 에드워드가 쓰러지면요? 폐하께서는 아들들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세요.”

    왕이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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