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47화 (47/293)

47.

왕비님의 자리는 그늘 아래였다. 그러나 내가 다가갈수록 왕비님의 얼굴이 환해져서, 마치 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어마마마.”

다음 순간 왕비님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왕비님은 내 뺨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어깨를 펴고 모른 척 다가갔다.

“어마마마, 제가 말을 타고 달리는 데 성공했어요! 바움쿠헨 경도 능숙하다고 칭찬했어요. 어마마마께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어머나, 왕자. 대단하네요. 그런데 그 얼굴은…….”

“지금 보여 드려도 될까요? 호수 근처를 달려도 되나요? 말을 데려왔어요. 이 애가 얼마나 잘 달리는지 몰라요. 폐하께서도 이걸 보면 인정하실 수밖에 없을걸요!”

난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발을 굴렀다. 왕비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요. 꼭 보고 싶네요. 내게 보여 주겠어요, 왕자?”

“예, 어마마마!”

난 말을 쓰다듬어 주고, 실수가 없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여기서 실수하면 큰일이다.

말에 훌쩍 오르자 그것만으로 왕비님의 시녀들이 “어머나” 하고 감탄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동요해선 안 된다.

말은 가볍게 달리다가 내가 발로 신호를 주자 속도를 올렸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는데도 몸이 들썩였다.

왕비님의 표정을 볼 틈은 없었다. 호수 주위를 빙 돌아 다시 정자에 도착했다. 난 말에서 미끄러지듯 몸을 떨어뜨렸고, 약간 어정쩡한 자세로 착지했다.

숨이 가쁘고 얼굴이 뜨거웠다. 시녀들이 박수를 보내고 한껏 웃으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굉장하세요, 왕자님.”

“눈이 환해진 것 같아요.”

뭐라 대답하기 힘든 찬사가 들려왔다. 대답해야 할까?

난 왕비님만 바라봤다. 왕비님은 기쁨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마마마, 이만하면 저도 사냥터에서 활약할 수 있겠죠?”

흥분한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왕비님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물론이에요, 조프리 왕자. 왕자는 폐하만큼이나 훌륭한 사냥꾼일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지.

왕비님은 자기 아이에게 좀 더 엄격할 필요가 있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사냥터에서 길이나 잃지 말라고 하실 때가 아닌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난 왕비님을 즐겁게 만들어야 했다.

내 얼굴을 가리키며 ‘이 상처는 어쩌다 생긴 건가요?’ 하셨을 때 ‘앗, 언제 다쳤지? 연습이 즐거워서 몰랐어요.’라고 대답하더라도 넘어갈 만큼.

난 표정 관리에 실패하려는 얼굴을 움직여서 활짝 웃었다.

“기대하세요! 첫 사냥감을 어마마마께 바치겠어요!”

“마음만으로도 기뻐요, 왕자. 하지만 이 어미에게는 왕자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랍니다.”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나는 선택지를 잘못 골랐다.

“사냥터라니. 폐하께서는 왕자가 얼마나 어린지는 생각지도 않으시는군요. 야속하신 분.”

왕비님은 시를 읊는 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릴 적부터 말과 개와 뿔피리 소리가 그분의 벗이었으니. 왕자도 이제 소개받게 되겠군요.”

“어마마마…….”

정말이지 왕은 도움이 안 됐다. 사냥 말고 다른 주제를 고를걸.

왕비님은 나를 가만히 보더니 물었다.

“왕자가 처음으로 폐하께 받은 선물 기억나나요?”

기억날 리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사슴이었죠. 폐하께서 잡은 사슴. 날렵한 사슴처럼 건강한 아이가 되라고 선물하셨다고 했어요. 안 그러시던 분이 왜 갑자기 마음을 쓰셨을까? 사냥 때문에 왕자의 생일 축하연을 뒤로 미룬 게 신경이 쓰이셨나? 왕자의 생일이 가을이라 사냥철과 겹친다며 폐하께서는 늘 못마땅해하셨죠.”

왕비님이 웃었다.

“왕자가 훌륭한 사냥꾼으로 폐하께 인정받길 바라요. 하지만 사냥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해요. 참으로 이기적인 어미가 아닌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왕비님의 시녀들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기 시작했다. 눈물짓는 시녀들을 양옆에 두고 왕비님은 따듯한 손으로 내 뺨을 만졌다. 상처 난 곳을 피해서.

소중하고 귀한 것을 만지는 손짓이었다.

왕비님의 눈은 웃고 있었고 속눈썹은 젖어 있었다.

왕비님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무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아원 일을 처리하며 바움쿠헨 경은 왕비님을 언급했다.

그곳은 왕비님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된 게 아니라 어떤 계획 속에서 유지되었는지도 모르고, 그 모든 일의 배후는 왕비님일지도 모른다.

왕비님은 그 외에 내가 모르는 다른 나쁜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상당했지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상 나쁜 일 모두가 왕비님 탓일 리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바움쿠헨 경은 이런 왕비님을 모르니까.

“어마마마, 날도 좋은데 나들이를 하시지 않겠어요? 기분이 나아지실 거예요.”

마차 창밖을 바라보던 왕비님의 눈이 떠올랐다.

이국의 정경을 보는 것처럼 생소한 표정.

“시장을 구경할까요? 제가 모실게요.”

왕비님께 기사처럼 손을 내밀자, 왕비님의 얼굴에 지어낸 게 아닌 미소가 번졌다.

소리 내서 웃음을 터뜨리는 왕비님은 마치 소녀 같았다. 왕비님이 왕국에 시집온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위로해 주려는 건가요? 작은 기사님.”

“예. 나가서 놀아요, 어마마마. 틀림없이 즐거울 거예요.”

왕비님이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 * *

왕비와 왕자의 시장 구경은 일대에 혼란을 가져왔다. 병사들이 시장을 봉쇄했고, 사람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에서 왕비님과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병사들의 긴장한 태도,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고 가슴이 뜨끔거렸다. 시장의 가게들은 다른 손님은 전혀 받지 못했다.

왕비님과 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이었다.

엄청난 민폐였다. 누가 왕족이 시장 구경을 한다는 아이디어를 낸 걸까?

정말 멍청한 사람이라고 욕하며 난 보이는 가게마다 잡히는 대로 물건을 샀다. 이러면 적어도 상인들에겐 덜 욕먹겠지.

물론 그 멍청한 사람은 나였다.

난 사실 몰래 나가자고 제안을 했다.

왕비님이 “네? 몰래? 왜 그런 위험한 짓을?”이라고 정색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시장이 파하고 왕성으로 돌아와서, 왕비님과 저녁 식사까지 함께했다. 산 물건들은 하나를 제외하고 다 내 궁으로 가져갔다.

왕비님은 내가 고른 목걸이 하나만 간직하겠다고 했다.

조개껍질을 끝에 매단 어린애 장난감 같은 목걸이였다. 예쁘지만 조악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왕비님은 “이걸로 충분해요.” 하더니 내게 선물을 골라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난 지친 몸을 끌고 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궁에는 도트가 부른 의사가 그때까지 퇴근도 못 하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미안해.”

“아, 아닙니다. 전하. 황송합니다.”

의사는 내가 손목을 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손목에 붕대를 단단히 감아 줬다.

“지속적으로 냉찜질을 해 주시고, 손의 사용을 최소화하셔야 합니다.”

“제가 왕자님의 손발이 될게요!”

도트가 말했다.

여기서 더? 도트는 지금도 조프리를 과보호하고 있었다.

조금 더 가면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보살핌을 받을 수도 있겠다.

왕비님 앞에서 멀쩡한 척했던 게 무색하게, 바움쿠헨 경의 수업은 한동안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도트는 평소에 해 주지 않던 일을 자청해서 했다. 물수건으로 조프리의 몸을 닦아 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손 하나 못 쓴다고 씻을 수 없는 것도 아닌데, 솔직히 편해서 도트에게 몸을 맡겼다.

조프리가 된 뒤로 점점 게을러지고 있었다.

몸이 편해서 마음의 불편함마저 잊을 정도였다.

이대로 괜찮은 건지. 갑자기 두근두근 뛰곤 하던 가슴도 오늘 밤은 잠잠했다.

설핏 잠이 들었을 때, 커튼이 흔들렸다.

여름이라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잠든 차였다.

달그림자가 시야를 가렸다. 누군가 내 위에 있었다.

“괜찮아, 조프리?”

누구?

“…….”

눈이 떠졌다.

에드워드가 내 침대 옆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심장 마비를 노린 거라면 거의 성공할 뻔했다.

푸른 눈동자만 살아 있는 에드워드가 나를 봤다.

“에드워드?”

“걱정돼서 왔어.”

에드워드가 말했다.

아니, 걱정이고 뭐고……. 너 어떻게 들어왔냐?

조프리 궁의 보안이 걱정됐다. 조프리는 대접받는 왕자가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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