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46화 (46/293)

46.

“에드워드!”

눈에서 손을 뗐다. 난 눈을 다치지 않았다. 조프리의 눈은 멀쩡했다.

손의 압력에 눌려 뿌옇게 흐리던 시야가 서서히 명료해졌다.

“괜찮아, 에드워드. 날 봐.”

“조프리 전하. 피 나요!”

“에드워드.”

두 손으로 에드워드의 얼굴을 쥐었다. 나를 똑바로 보게 하자, 에드워드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무 놀라서 울지도 못하던 아이가 부모를 찾은 것처럼.

하지만 에드워드는 울지 않았다. 그 상태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조프리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에드워드의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심장 뛰는 소리의 주인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난 에드워드가 진정하길 바랄 뿐이었다.

“봐. 나 멀쩡하지?”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떨렸다.

내 뺨을 타고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얼얼하게 아프던 부위가 자극돼서 쓰리기 시작했다.

“조프리 전하, 피요. 피가 흐른다고요.”

그레이가 말했다.

그럴 리가.

손등으로 뺨을 닦았다. 손등이 붉었다.

정말이네.

피 묻은 손으로 에드워드를 만질 순 없었다. 거리를 두려는데 에드워드가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아파?”

“괜찮아.”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알아.”

에드워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 얼굴에 같은 상처 만들어도 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어마마마께…….”

“안 말씀드려. 너도 하지 마. 그레이도. 당연히 그럴 거지?”

그레이는 나를 부축하던 팔을 놨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금까지 내 힘으로 서 있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휘청거리는 몸을 그레이가 다시 잡았다.

“의사나 부르세요.”

“조금 이따가. 궁으로 돌아가서.”

“피 난다니까요?”

그레이는 답답한 듯했다. 내가 사태를 알면 다시 생각할 거라는 듯, 그가 내 팔목을 잡고 손등을 보여 줬다.

봐, 네 피. 내 손목이 흔들렸다.

“알아.”

“다치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그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전하께선 너무 변하셨어요.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그레이가 짜증 냈다. 심장이 덜컥거리니까 그런 말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의사 부를게.”

내가 고분고분 따르자, 그레이는 왠지 다시 짜증을 냈다.

“그냥 맞춰 주시지 말고요.”

그냥 조프리에게 짜증 내고 싶은 것뿐인가?

“에드워드나 데려가. 여기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전하 몸이나 챙기세요. 정리 같은 건 누가 해도 상관없잖아요.”

“그럼 네가 할래?”

증거 인멸을 해야 했다. 내가 다쳤다는 사실은 못 숨겨도, 에드워드랑 어울리다 이랬다는 사실은 숨길 수 있을 테니까.

“그럴 테니까 두고 가세요.”

그레이가 성을 냈다.

‘제가 왜요?’라고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알던 그레이가 아닌 것 같다. 그레이를 잘 알지도 못했지만.

“오늘 어울려 줘서 고마워. 도움이 됐어. 다친 건 네 탓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실수였다.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다면 내 책임이 99퍼센트? 나머지 1퍼센트는 에드워드의 목검에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난 그레이에게 에드워드를 챙기라는 눈짓을 보내고 내 손으로 얼굴을 지혈했다. 눈 밑에 상처가 난 듯했다. 신기할 정도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목검으로 맞았는데 어쩌다 상처가 난 걸까. 조프리는 피부가 약한 것 같다.

이런 현실 도피성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손도 여전히 욱신거리는 게 수상했다. 계속 검술 수련 할 수 있을까?

바움쿠헨 경에게 말하면 황당해할 것 같다. 왜 멋대로 대련 같은 걸 했느냐고.

아닌가. 바움쿠헨 경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오히려 재미있어할지도.

내가 다친 걸 보면 또 다를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왕비님이었다. 어떡하지, 진짜.

수업 시간에 내 얼굴을 본 바움쿠헨 경은 뜨악해했다. 도트가 내 뺨에 약솜과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 놔서 누가 봐도 심각한 꼴이긴 했다.

마주치는 궁인들마다 바움쿠헨 경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내 궁의 시종들은 어쩌다 내 얼굴이 저렇게 됐는지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은 ‘말에게 차였다’였고 두 번째가 ‘말에게 물렸다’였다.

말이랑 원수졌나?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뒷말을 엿들은 꼴이라 그럴 순 없었다.

시종들은 왜 저런 얘기를 복도에서 나누는 걸까. 역시 내 귀에 들려주고 싶은 걸까?

“……왕자님. 의욕이 생기신 건 기쁘지만, 과하셨군요.”

바움쿠헨 경은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사냥터에서 활약할 욕심에 추가 수련을 하다가 몸을 다쳤다고.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아.”

“예. 보기로는 마차에 치인 것 같으니까요. 의사가 이렇게 치료해 놓은 겁니까?”

“아니, 급한 대로 도트에게 맡겼어.”

“뭐가 그리 급하셔서요?”

“그대 수업이 있잖아.”

“제 수업이 그렇게 기대되셨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바움쿠헨 경은 어디 가서 심약하다는 말은 안 들어 봤을 것이다.

수업에 늦지 않는 건 학생의 기본 아닌가? 학생일 적 내 수업 태도가 좋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수업에 늦어 본 적은 없었다.

바움쿠헨 경은 기분이 좋아져서 물었다.

“상처를 확인해도 됩니까?”

남의 기분을 굳이 망칠 필요는 없겠지.

난 눈을 감고 바움쿠헨 경에게 얼굴을 내줬다.

경은 테이프와 약솜을 차례로 떼어 냈다. 얼굴에 붙어 있던 두툼한 덩어리가 사라지자 답답한 기분이 한결 가셨다.

상처 부위가 솜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피부가 시원해졌다.

“베인 것처럼 그어 놨네요. 깊은 상처는 아닙니다. 지혈도 됐고 며칠이면 아물겠군요.”

“그럼 의사 안 불러도 되는 거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사들은 할 일을 하라고 하세요.”

“하지만 의사에게 보이면 왕비님 귀에도 들어갈 거 아니야.”

“숨길 생각이셨습니까?”

바움쿠헨 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억지로 수업에 따라온 도트가 우리의 만행을 발견했다.

“왕자님, 왜 붕대를 풀고 계세요! 그렇게 막 상처를 노출시키시면 안 낫는다고요!”

“바움쿠헨 경이 더 전문가야. 괜찮다고 했어.”

“정말요?”

도트가 바움쿠헨 경을 쳐다봤다. 경이 대꾸했다.

“괜찮다고는 안 했는데요. 이렇게까지 덕지덕지 붙여 놓을 필요는 없다고 했죠.”

“봐, 도트.”

“예. 의료용 테이프로 조치해 드릴게요!”

상처를 노출시킨 건 내 잘못이 아니란 뜻이었는데.

도트는 품에서 의료용 테이프를 꺼내서 작은 크기로 잘라 냈다. 내 뺨에 작은 테이프가 붙여졌다.

내가 뺨을 만지려고 하자, 도트는 “건드리시면 안 돼요!” 하고는 거울을 꺼내 내 앞에 놓았다.

눈 밑에 흰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만화에서 사고 치는 캐릭터가 코에 붙이고 다니는 것과 비슷했다.

순식간에 도련님 같은 인상이 변했다. 개구쟁이 같았다.

더불어 상처가 정말 별것 아니게 보였다.

“역시 왕비님께 말씀드려야겠지?”

“물론이죠.”

바움쿠헨 경이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말했다.

경도 저렇게 말하니까 말씀드려야겠지.

사실 왕비님은 상대하기 힘들었다.

왕비님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도 안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만, 왕비님은 조프리를 사랑하니까.

그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왕비님은 조프리에게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시큰거리는 오른 손목을 만졌다. 붕대로 고정시켜 놓긴 했지만 여기도 문제였다.

사실 제일 큰 문제였다. 펜을 못 쥐면 필기를 못 하니까.

“경. 오늘 수업 좀 일찍 끝내도 돼?”

“예. 어차피 수업할 상태도 아니시니까요.”

“도트, 지금 출발하면 왕비님 티타임에 늦을까?”

“연락해 볼게요, 왕자님.”

바움쿠헨 경이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자수하러 가는 게 기쁜 모양이다.

좋은 사람이지만 이상한 사람이기도 했다. 왕비님은 싫어하면서, 조프리가 왕비님께 잘하는 건 좋아한다니.

난 마구간지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말을 빌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보여 드리고, 괜찮다고 말하자.

왕비님은 조프리가 뭔가를 잘 해내는 걸 좋아하니까.

마구간지기가 순한 말을 데려다줬다. 이제 난 말을 타고 달리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근처에 장애물이 전혀 없어야 하고, 너무 속력을 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왕비님의 티타임은 호수가 보이는 정자에서 이뤄졌다. 대리석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돌기둥이 하얗게 빛나고, 기둥 사이 거미줄처럼 얇게 펼쳐진 차양이 바람에 부풀었다.

늦은 오후의 햇볕이 내리쬐는 장소에서 왕비님은 시녀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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