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난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대.”
에드워드는 이제 정말 낙심한 듯했다. 진짜 왜 저러지?!
언어라는 좋은 수단을 두고 상대방의 표정을 살펴야 하다니 비효율적인 소통 방식이었다.
말을 해 줬으면 좋겠다. 어떤 점이 문제인지 알면 고치기라도 하게.
“더 귀한 말이 좋을까?”
“아니.”
“이 말은 별로야?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손으로는 말을 쓰다듬고 있고 눈은 말을 바라보고 있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이 말을 받으면 너한텐 뭐가 좋아?”
에드워드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넌 좋아할 건데?
“내 생일에……. 네가 선물을 줄지도 모른다는 점?”
에드워드가 깜짝 놀랐다.
“내 선물이 받고 싶어?”
“아니, 안 줘도 돼.”
네가 무슨 선물이야. 벼룩의 간을 빼먹고 말지.
하지만 깨진 컵 속의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말도 마찬가지였다.
“고민해 볼게.”
뭘?
에드워드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쓰다듬고는 한번 찬찬히 살펴봤다. 말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듯했다.
마구간지기가 설명해 줬다. 털에 윤이 돌고 상처가 없는 건강한 말이라고.
에드워드도 그렇게 판단한 듯했다.
“좋은 말 같아. 고마워.”
그가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
돌겠네.
“에드워드, 사실 마음에 안 든 거지? 백마나 흑마가 좋아? 아니면 그냥 말이 싫어?”
“아니. 말을 갖고 싶었어. 네가 보여 주기 전엔 몰랐는데, 그랬나 봐.”
에드워드는 이상한 말을 했다. 그는 빙긋 웃었지만, 그건 전에 초콜릿을 챙겨 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조프리, 고마워. 정말로 기뻐.”
진짜?
거짓말 같진 않았지만 완전히 진실 같지도 않았다.
선물이 잘못된 걸까? 괜히 조프리 때문에 말을 잃었다는 기억만 떠올리게 한 건가?
에드워드가 정말 원하는 거라면 하나 알고 있지만.
‘사과파이. 엄마가 구운 거.’
역시 로제 부인인가.
“네 생일 선물은 고민해 볼게.”
“정말 필요 없다니까? 아까 그거 농담이야.”
“하지만 난 너한테 받기만 하잖아.”
“나한테 뭔가 주고 싶어?”
“응.”
에드워드는 착하게 말했다. 등가 교환의 법칙을 아는 애였다.
“그럼 나 검 수련 하는 거라도 도와줄래?”
에드워드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떠올랐다.
“조프리, 검술 수련을 해?”
“나 말고 의욕적인 사람이 있어서.”
“그러면, 검을 맞대 주면 돼?”
“응. 실전을 경험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에드워드는 다방면으로 완벽했는데 그중 하나가 검술이었다. 승마도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능숙했으니까, 검도 그렇지 않을까.
사실 뭔들 나보다 못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검을 가져가면 돼? 언제 할까?”
에드워드는 드물게 의욕적이었다.
그런데 검을 가져간다고?
“너 검이 있어?”
“응.”
“누구한테 받았어?”
에드워드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바마마.”
왕은 에드워드를 아끼는 걸까? 난 이 아침 드라마 같은 집안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진검이야?”
“그럼?”
에드워드는 그 외에 뭐가 있냐는 듯 대답했다. 얘 위험한데.
난 그냥 내가 목검 두 자루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보아하니 왜 검술 수련에 목검이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얘 진짜 위험한데.
* * *
그레이는 이번에도 우리를 따라왔다.
‘어디 가시는데요?’
‘네? 검술 수련이요?’
‘두 분이 단둘이?’
‘……방해가 안 된다면, 곁에서 구경해도 될까요?’
아무 생각 없는 에드워드는 모든 말에 다 대답해 주고 마지막 질문에는 나를 쳐다봤다.
난 고개만 끄덕여 줬다. 구경은 무슨. 감시겠지.
온화한 미소로 그레이를 바라보자, 그레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왜요?”
아니, 잘 봐 달라고.
조프리가 에드워드를 괴롭혔다는 사연을 그레이에게서 들은 이후로, 그레이에게는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그 전이라고 그레이에게 강했던 것 같지는 않지만.
난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레이 보라고 목검을 들었다. 에드워드를 상해 입힐 구석이라곤 없는 뭉툭한 목검이었다.
“여기 목검이야.”
그레이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예, 그러네요.”
“에드워드랑 나랑 하나씩 들 거고.”
“그래요. 저도 보고 있어요.”
에드워드가 목검을 받았다. 그는 무게를 가늠하듯 한 손으로 목검을 어깨 높이로 들어 보더니, 천천히 제 높이로 손을 내렸다.
그가 두 손으로 목검을 쥐었다. 검 끝이 내 양미간을 겨누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바움쿠헨 경이 봤으면 바른 자세라고 칭찬했을 것 같았다.
“시작할까?”
에드워드가 물었다.
“좋아. 한쪽이 ‘그만’이라거나 ‘항복’이라고 말하면 그만두는 거야. 머리랑 급소는 겨누지 말기.”
“급소라면 어디? 명치도 포함돼?”
에드워드가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말하면 명치부터 맞을 것 같은데.
하지만 노려지는 곳을 알면 막는 것도 쉬워진다.
“아니. 고간 말하는 거야.”
“알았어.”
“잘 부탁합니다.”
내가 먼저 인사했다. 에드워드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를 돌려줬다.
에드워드의 눈이 새파랗게 나를 응시했다.
잡아먹힐 것 같았다.
하지만 위압감을 주기에 에드워드는 작았다. 난 어린아이에게 겁먹을 정도로 겁이 많진 않았다.
조프리는 에드워드보다 더 작았지만. 그래도 머리라도 성숙한 내가 유리하지 않을까.
오 분 뒤 나는 배를 쥐고 쓰러졌다.
제대로 맞았다. 저릿저릿하게 아파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내가 연무장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자 에드워드와 그레이가 달려왔다.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니다. 부상당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숨도 못 쉬고 있는 내가 너무 엄살을 피우는 기분이었다.
난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그레이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뒤로 물러났다. 에드워드는 아직 내 앞에 있었다.
“조프리, 괜찮아?”
“에드워드. 너 검은 어디서 배웠어?”
안 열리는 입을 떼고 물었다. 목소리만 냈을 뿐인데 배 근육이 욱신거렸다. 와, 죽을 것 같다.
“안 배웠어.”
“초보자라고?”
“혼자 연습해 보긴 했어.”
“독학이구나.”
고통에 몸이 익숙해졌다. 냄새처럼, 고통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 그것에 계속 나를 노출시키면 된다.
“너 강한 것 같아.”
에드워드를 칭찬했다. 그는 머뭇거렸다.
“고마워.”
내가 약하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봐줘서 고마웠다.
“한 번 더 할까?”
“괜찮겠어?”
그렇게 물어보지 마. 자존심 상하잖아. 우리 지금 오 분 대련했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가 거리를 두고 바로 섰다. 이마를 덮은 금발, 그 아래 푸른 눈이 나를 직시했다. 목검을 든 에드워드는 평소처럼 멍하지 않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인사했다.
검을 맞부딪히기 전에 무조건 인사를 하는 거였나?
나도 잘 몰랐지만, 에드워드가 예의를 차렸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딱!
에드워드의 검이 내 옆구리를 쳤다. 난 반응하지 못했다. 속도도 속도지만, 무슨 힘이!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한 걸음 물러나자, 에드워드는 가볍게 거리를 좁혀 왔다.
그의 목검이 내 팔을 노렸다. 난 손잡이를 움직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손으로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당황한 사람은 대개 멍청한 해결책을 생각해 낸다.
손을 정통으로 맞았다. 잇새로 신음이 나올 것 같았다. 검을 놓칠 뻔했지만, 힘을 주어 잡았다.
에드워드를 노려봤다.
아. 한 대만 때리고 싶어!
“그만할까?”
에드워드가 물었다.
가슴에 불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니. 계속해.”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항복하는 거야?”
에드워드는 고개를 흔들고 자세를 취했다.
이어지는 에드워드의 동작은 다시 내 손목을 노리고 있었다. 난 팔을 휘둘렀고, 에드워드의 목검은 내 목검에 맞아 이상한 경로로 이동했다.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검이 내 얼굴을 쳤다.
“아!”
“조프리 전하!”
어안이 벙벙했다. 머리가 울리고, 눈가가 화끈하게 아팠다.
마차에 앉아 있지도 않은데, 땅이 흔들리고 내 몸이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토할 것 같았다.
조프리의 눈. 내가 설마 다치게 한 건 아니겠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을 감은 채, 어두운 세계에서 조프리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가장 먼저 왕비님이 떠올랐다. 그 다음엔 에드워드. 내가 이렇게 두려워했던 순간들. 사고 같은 것들이.
그리고 다시 세상이 밝아졌다.
“……전하!”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날 부축하고 있었다. 난 그에게 기댄 자세로 선 채 얼굴을 쥐고 있었다. 내 앞에 에드워드가 넋을 놓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