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44화 (44/293)
  • 44.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게 졌다.

    도트가 가져다 놓은 도시락은 빵 바구니를 제외하고 비었다. 몇 시간 동안 사람을 기다리기에 뭘 먹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에드워드란 걸 알게 된 도트는, 기다린 지 한 시간이 지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에드워드 전하, 사고라도 당하신 게 아닐까요?”

    “글쎄.”

    아닌 것 같은데.

    도트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레이는 차를 마셨고 나는 책장을 넘겼다. 여기서 과제 하나를 마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다린 지 두 시간이 지나자 도트는 확신했다.

    “사고를 당하신 게 확실해요!”

    “그럴지도 몰라. 네가 찾아봐 줄래?”

    도트가 안절부절못하길래 물어봤다. 도트는 좋은 명령이시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꼭 찾아올게요! 왕자님은 먼저 들어가 계세요.”

    도트가 사라졌다. 그레이는 나를 힐끗 보고는 자기 책을 꺼내 펼쳤다.

    잠시 뒤 마구간지기도 말들을 먹이고 씻기러 들어갔다. 몇 시간째 한자리를 지키기에 마구간지기는 바쁜 사람이었다.

    나와 그레이가 앉은 나무 그늘 아래로 바람이 불었다. 도트가 우리를 위해 보자기를 깔아 줘서 피크닉이라도 온 기분이었다. 마구간에서 나는 짐승 냄새에도 익숙해져서 가까이 앉은 그레이의 체향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레이, 너 향수 뿌렸구나.

    그리고 또 한 시간이 지났다.

    에드워드는 역시 쪽지를 안 읽었을까.

    “계속 기다리실 거예요?”

    그레이가 물었다. 그는 식어서 딱딱해진 빵을 맛없다는 얼굴로 뜯어 먹고 있었다.

    “응. 넌 가.”

    그레이는 한숨을 쉬었으나 가려고 하는 듯한 동작은 아니었다.

    “안 바빠? 한가해?”

    “왕자님은요?”

    “나야 하루 종일 일정이 채워져 있지.”

    “저도 그래요.”

    “그런데 왜 안 가?”

    “전하께서는요?”

    에드워드가 늦게나마 올지도 모르니까.

    에드워드의 마음은 모르지만, 나라면 누가 준 쪽지는 뒤늦게라도 읽고 싶어질 거였다. 읽고 나면, 또 얘가 왜 부르나 싶어서 나가 보지 않을까. 조프리에게 삐친 게 있든 없든.

    흠. 잘 모르겠다.

    에드워드는 아직 열한 살인데.

    만으로 열한 살이다. 그 나이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 나이로 열두 살, 열세 살? 초등학교 고학년이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더라.

    에드워드처럼 복잡한 생각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좋으면 좋았고 싫으면 싫었다. 그레이처럼 사람 관찰하고 있지도 않았고 내 생각에 골몰했다.

    책을 덮었다. 그레이는 말 그대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까 말을 관찰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레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얜 왜 나랑 시간 낭비를 하고 있을까.

    “내가 에드워드랑 만날까 봐 걱정돼? 너 없는 데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레이가 콧등을 찡그렸다. 서운하다는 투였다. 근데 진짜 서운한 사람은 저런 눈으로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다.

    “아니면 가 주지 않을래? 바쁜 사람 붙잡아 두는 거 신경 쓰이는데.”

    “전하는 언제까지 기다리실 건데요?”

    “글쎄? 저녁 수업 전에는 돌아가야 하니까.”

    “늦잖아요. 에드워드 전하와는 내일 다시 얘기해 보시는 게 어때요?”

    그레이는 나를 설득했다. 말투가 상냥했다. 나와 에드워드를 자기 시야에 두려는 게 너무 티 났다.

    “그것도 좋지.”

    “그럼 지금 일어나시는 건가요?”

    “음. 나쁘지 않지.”

    “저 보내고 싶으시죠?”

    그레이는 귀신같이 눈치챘다. 진짜 그렇더라도 ‘응’이라고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예의상 아니라고 말해야겠지.

    “응.”

    하지만 그랬다간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그레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에드워드 전하가 안 오셔도 전 몰라요.”

    “그래.”

    “여름 감기가 기승이래요. 뭐 때문인지 몰라도 오래 기다리지 마세요.”

    “잘 돌아가.”

    그레이가 등을 보였다. 나는 그가 멀어지고, 그의 등이 건물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제 뭘 해야 할까. 도트가 준비해 놓은 책이 있었고 다른 구경거리도 있었다. 파리 떼라거나 마구간 주변을 맴돌고 있는 시종이라거나.

    그 시종은 그레이가 사라진 방향에서 나타났다. 한참 전에도 그 길을 지나치는 걸 본 기억이 났다.

    그때는 혹시나 했을 뿐인데. 시종이 마구간으로 다가왔다. 수상쩍던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

    시종은 피부가 희었고 머리는 금빛이었다. 헝클어진 금발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파랬다.

    “에드워드, 왔어?”

    시종 차림으로 근처를 맴돌던 에드워드가 내 앞에 섰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내 옆자리를 툭툭 쳤다.

    “오래 기다렸잖아. 뭐 해, 와서 앉아.”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

    “왜 몰라? 내가 네 얼굴을.”

    “이상하다. 이렇게 입고 있으면 아무도 못 알아보던데.”

    에드워드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런 설정이더라. 김이 빠졌다.

    어쩐지 시종 옷을 좋아하더라니.

    왕성 사람들이 단체로 눈이 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에드워드를 몰라볼 수 있는지 난 그게 더 신기했다.

    “나 어제도 너 알아봤는데.”

    “그러네.”

    “내가 못 알아보길 원했어?”

    “모르겠어.”

    “아니겠지. 그럼 안 다가왔을 거 아냐.”

    에드워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수긍했다.

    “그러네.”

    그러고는 내 옆자리에 오도카니 앉았다. 두 발을 모으고.

    왜 저렇게 외톨이처럼 앉는 걸까.

    “그레이랑은 언제 친해졌어?”

    에드워드가 물었다. 내외하는 거리가 신경 쓰였다.

    “안 친해. 요즘에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감시하는 게 유행이야?”

    “모르겠어. 유행에 밝지 않아서.”

    “진짜 유행인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 아니야.”

    “그래?”

    “그래. 너도 유행의 선두 주자가 될 생각은 마.”

    감시하듯 맴돌지 말란 뜻이었는데, 에드워드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하더니 자기 무릎을 끌어안았다.

    “나 왜 불렀어?”

    그 상태로 나를 보느라 한쪽 뺨이 무릎에 눌렸다. 이상한 얼굴이었다.

    왜 불렀긴. 네가 어제 이상하게 굴었잖아.

    “몰라서 물어?”

    “응.”

    에드워드가 시치미를 뗐다.

    얼굴이 멍해서 진짜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생일 선물 주려고 그랬지.”

    “생일 선물?”

    에드워드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무릎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이 풀렸다. 에드워드의 자세가 어정쩡해졌다.

    “응. 얼마 전에 너 생일이었는데 내가 못 챙겼잖아.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네가 나 때문에 근신을 받았다는 일이 있어서.

    “뭘 좋아할지 몰라서 고민해 봤는데, 일단 들어가서 봐. 너는 말을 좋아하니까…….”

    그때 마구간지기가 마사 안에서 나왔다. 작업이 끝났는지 땀투성이였다.

    “아, 마침 부르려고 했는데. 에드워드가 왔어.”

    마구간지기는 다행이라는 표정이 됐다. 그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오래 기다리시더니 만나셔서 다행이네요, 그런 얼굴로 마구간지기가 에드워드를 환영했다.

    “오셨군요, 전하. 왕자님이 에드워드 전하 기쁘게 하실 생각에 목이 빠져라 기다리셨습니다.”

    “맞아, 진짜 목이 빠질 것 같아.”

    “깜짝 축하를 해 주신다고 이렇게 말도 꾸미시고요.”

    “리본까지 묶어 줬어.”

    되는대로 생색냈다. 내가 이만큼 너 생각하고 있어.

    에드워드의 얼굴이 더 멍해졌다.

    “상인에게 제값 이상을 쳐 주고 데려온 명마입니다, 전하. 이놈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마구간지기가 에드워드를 갈색 말에게 데려갔다. 내가 빗질을 해주고 당근도 먹인 말은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갈기에 붉은 리본을 묶은 말이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에드워드도 말을 쳐다봤다. 두 생물이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슷한 행동을 그레이도 했던 것 같은데, 느낌이 달랐다. 에드워드는 그저 눈앞의 말이 너무 생소하고 이상한 존재여서 손을 못 대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에게 말이 생소할 리는 없었다.

    마음에 들었나? 아닌가?

    말이 콧김을 뿜더니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가 말에게 다가갔다. 말의 왼편에 서서, 손으로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말은 얌전하게 에드워드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에드워드의 손이 말의 얼굴로 올라갔다. 뺨과 콧등, 그보다 위, 귀 쪽을 만져 주고, 신기한 듯 손을 멈췄다.

    “내 생일 선물이라고?”

    “마음에 들어?”

    “조프리, 너한테 소중한 말이야?”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나? 그럼 에드워드에게 더 점수를 딸 수 있을까?

    하지만 난 이 말의 이름도 몰랐다.

    “아니.”

    에드워드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실망한 건가? 그는 의문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럼 왕비님에게 소중한 말이야?”

    왕비님?

    그런 게 왜 궁금한 거지?

    난 마구간지기를 돌아봤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마구간지기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비싸게 구입하긴 하셨습니다만……. 구입하고 한 번도 안 보러 오셨습니다. 그래도 가격이 있으니 아끼시지 않을까요?”

    마구간지기가 자신 없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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