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왕비는 온 신경을 조프리에게 쏟고 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기본적으로 조프리 근처를 제일 조심하면 됐다.
그런데 지금 에드워드는 그 어느 때보다 조프리를 조심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조프리는 에드워드에게 위협이 됐으나, 지금과 종류가 달랐다.
에드워드는 의아했다.
조프리가 에드워드를 걱정할 수 있는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능한가의 문제였다.
애초에 그런 일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에드워드는 조프리의 걱정을 바라는 게 옳은가?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찼다. 에드워드가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생각은 에드워드의 외면과 내면을 전부 차지하곤 했다.
가끔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멈출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넋을 빼놓은 사람처럼 걸었다. 그가 어디로 걷고 있는지 몰랐다.
에드워드 궁의 궁인들의 혀를 차고 지나갔다. 어쩌다 저런 백치 왕자의 궁에 배치됐단 말인가. 쯧쯧.
에드워드가 어디에 부딪힐 거라거나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없었다. 에드워드는 그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 윗사람이 아니었다. 궁인들은 각자 살 궁리를 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를 걱정하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궁으로 돌아갔다.
* * *
생각해 보자.
조프리의 낙마는 여러 부차적인 사건을 불러왔다. 에드워드는 근신 처분을 받고 혼자 생일을 보내야 했다. 누군가에게 생일 선물을 받기는커녕 조프리를 떨어뜨린 죄로 말을 빼앗겼다.
과거를 알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산 하나를 넘으면 강이 나오고 강을 건너면 구덩이가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조프리가 에드워드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나? 의심이 들 지경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내가 조프리의 마구간을 구경하겠다고 일어서자, 어째서인지 그레이가 따라왔다. “언제부터 말에 흥미를 두셨어요?” 하면서.
마구간지기가 마사의 문을 열고 갈색 털을 가진 말을 보여 줬다.
말은 눈이 예쁘고 목이 길었다. 초식 동물이라곤 하지만 몸체가 크고 얼굴도 크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내밀기엔 무서운 생물이었다.
“이 애가 가장 뛰어난 말이야?”
내가 물어보기 무섭게 갈색 말이 고개를 들었다. 내 말을 알아듣고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백마나 흑마와 달리 갈색 말은 특징이 없었다. 나처럼 말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척 보기에 멋진 말을 선물하면 에드워드의 호감도가 확 오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 까다롭고 영리한 데다 발이 아주 빠릅니다. 왕자님이 타실 게 아니라고 해서 보여 드리는 겁니다만…….”
“응. 내가 안 타. 주인을 고르는 말이라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마구간지기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내가 승마를 배우는 모습을 보아 왔다. 내 실력이 얼마나 별로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송구스러울 것까지야.
창작물에선 흔한 일이었다. 엑스칼리버만 해도 주인을 고르는 검이지 않은가? 삼국지에서도 적토마는 여포가 탔다. 명마는 사람을 가린다.
주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들었지만 그만뒀다.
난 틀림없이 낙마할 텐데,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이 애 어때?”
기어코 따라온 그레이에게 묻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살폈다.
말과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했다. 영리하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말이 빤히 그레이를 보는 모습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레이가 자기 평가하는 걸 아나?
“정말 말을 선물하시게요?”
“응.”
“왜요?”
“전에 내가 탔던 에드워드 말, 어떻게 됐는지 알아?”
그레이가 나를 쳐다봤다.
“네.”
“그래서야.”
그레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좋아하시겠네요.”
“그럼 다행이네.”
“그 말을 아끼셨거든요.”
비꼬는 건가?
“폐하께서 생일에 선물하신 말이니까요.”
그건 의외였다. 왕은 에드워드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소중한 말이었네.”
“네.”
그레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듯이.
하지만 말이든 사람이든 눈을 봐서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식이었다면 난 진작에 왕비님께 조프리가 아니란 걸 들켰을 것이다.
“그레이, 에드워드 삐친 거 풀어 본 적 있어?”
“네? 누가 삐쳐요?”
“에드워드.”
“아, 에드워드 전하가. 네?”
그레이가 되물었다. 도움이 안 될 듯했다. 혼자 준비하는 수밖에 없나.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아뇨, 무슨 일인지 정말 궁금한데요.”
그레이는 특유의 청개구리 기질을 발휘해서 에드워드가 삐쳤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캐묻기 시작했다. 귀찮은 녀석이다.
난 그레이를 무시하고 마구간지기에게 물었다.
“에드워드에게 말을 선물하려고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있어? 깜짝 파티를 하려고. 사례는 할게.”
내가 말을 선물한다 해도 그 말을 에드워드 궁으로 끌고 갈 순 없었다. 마구간에 두고 에드워드가 데리고 나갈 수 있게 조치할 뿐이다.
에드워드에게 호의적인 나이 지긋한 마구간지기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제 에드워드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일만 남았다.
* * *
연애 공략 게임에서 생일 선물은 중요했다. 공략 캐릭터의 생일을 챙기는 건 물론이거니와 생일 선물 역시 캐릭터가 좋아할 만한 것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생일 선물을 챙기는 건 가장 쉽게 호감도를 올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에드워드의 생일은 진작 지났지만.
파이 공작의 수업 시간. 난 준비한 메모지에 메시지를 적었다.
-수업 끝나고 마구간으로 나와. 줄 게 있어.
이쯤이면 됐겠지.
에드워드의 의자를 툭툭 치고 메모지를 그에게 넘겼다. 파이 공작은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못 봤기를 바랄 뿐이었다.
에드워드는 메모지를 잠깐 보더니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수업 끝나고 읽으려는 건가?
하지만 수업이 끝난 뒤 에드워드는 바로 일어났다. 그는 파이 공작의 뒤에 붙어 교실을 나갔다.
그레이가 나를 돌아봤다.
“두 분 싸우셨어요?”
“아니.”
그레이 눈에도 그렇게 보일 정도인가?
“우리가 싸우면 넌 좋잖아.”
괜히 시비를 걸었다. 그레이는 다 안다는 눈으로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저한테 화풀이하지 마세요.”
“왕자님. 오늘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도트가 점심 메뉴를 물었다.
“간단히 부탁해. 샌드위치나 빵 같은 거. 그냥 있는 거? 아무거나 줘. 나 빨리 나가 봐야 돼.”
“네? 왕자님?”
“어서.”
“앗, 네! 얼른 다녀올게요!”
도트가 달릴 자세를 취했다. 그가 넘어질 미래가 보였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에드워드는 메모를 안 읽었을지도 모르는데. 오늘이 가도록 안 읽을지도 모르고.
“아니, 뛸 필요는 없고.”
“급하신 거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까 아닌 것 같아.”
“정말요?”
“응. 그냥 점심은 안 먹을게.”
“네? 그러시면 안 돼요!”
도트가 무슨 일이시냐고 매달렸다. 기세에 못 이겨서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에드워드 전하와요? 궁으로 초대하시면 되잖아요. 자주 그러셨잖아요?”
도트가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에드워드는 날 모른 척하고 있었다.
도트는 좋은 시종이지만 조프리 편을 과도하게 드는 데다 아직 어렸다. 조프리의 교우 관계를 상담하긴 좀 그런 상대다.
“다른 데서 만나기로 했어.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가 가야지.”
“그럼 제가 도시락을 싸서 갈게요. 에드워드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신 거죠? 왕자님은 가셔야 하고요? 그래도 빵으로 식사라니요. 도시락을 두 개 싸서 가져갈게요!”
도트가 활달하게 말했다.
에드워드가 안 오면 어떡하지? 솔직히 안 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도트가 허락해 달라는 듯 눈빛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내 팔을 놓아주지 않을 듯했다.
“그럼 부탁해.”
“네!”
도트가 기어코 달려 나갔다. 이번엔 용케 넘어지지 않았다. 웬일이람.
그를 대견해하다가, 그런 내가 이상해졌다. 저게 신기하다니. 이 세계에 너무 익숙해진 게 아닌가?
의문을 느끼며 마구간으로 갔다.
어째서인지 그레이가 먼저 와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조프리 전하가 오실 것 같아서요.”
그레이가 책을 덮었다. 그는 마구간지기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마구간지기가 서 있었다.
마구간지기는 노인이었고, 그레이는 마구간지기보다 쉰 살은 어렸다.
그레이, 너 되게 재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지적하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서 있자, 그레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앉을 수 있게 몇 걸음 비켜섰다.
난 앉지 않았다. 그러자 그레이도 앉을 수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 멀뚱히 서서 서로를 바라봤다.
마구간지기에게 자리를 돌려주려면 나랑 그레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준비는 다 됐어?”
“예, 전하.”
마구간지기가 대답했다.
생일 선물 증정 파티 준비는 대충 된 것 같았다. 축하 행사치고는 조촐하지만 요지는 에드워드가 기뻐하는 거니까.
이제 에드워드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사실 그게 가장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