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42화 (42/293)

42.

“말에서 멋지게 착지하는 동작이라면서요! 진지하다면서!”

바움쿠헨 경은 으학학 웃으며 피했다.

“속을 줄 몰랐지!”

알렉스가 휘두르는 목검은 바움쿠헨 경을 스치지도 않았다.

“갑옷을 입고 말에서 그렇게 뛰어내리면 목부터 떨어지지 않겠냐? 기사가 되려면 생각하는 법부터 배워라! 교훈이 됐지?”

“교훈은 무슨! 이 사기꾼!”

“으학학!”

얄밉다. 바움쿠헨 경은 알렉스를 휙휙 피해 움직이더니 되레 알렉스의 허리를 붙잡아 들었다.

알렉스의 두 다리가 허공에 떴다.

“내려 줘요!”

“싫어. 내려 주면 때릴 거잖아?”

바움쿠헨 경의 입이 귀에 걸릴 듯했다. 알렉스를 엄청 귀여워한다.

잘 어울린다 싶었다. 둘은 부자라기보다 형제지간 같았다. 나이 차 나는 형제지간. 정신 연령은 알렉스 쪽이 높을지도 몰랐다.

그때 시야에 반짝이는 금발이 들어온 건 우연이었다. 멀리서 금발의 시종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멀리서 나를 보는 시종을 발견하면, 난 신경이 곤두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시종의 얼굴을 봤다. 왕비님의 시종일까?

시종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원망 서린 얼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에드워드?”

금발의 시종이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한눈에 들어오는 인형 같은 얼굴. 에드워드가 맞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노려보더니, 등을 돌려 가 버렸다.

응?

병간호 이후 에드워드와는 분위기가 좋았다. 오늘 수업 때 에드워드는 나를 보고 약간 웃기까지 했다.

또 뭔데?

“에드워드!”

에드워드가 멈춰 섰다. 그는 뒤를 돌아보려다가 멈칫하는 듯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아무 관계도 아니라며.”

“뭐?”

“거짓말쟁이.”

알렉스가 말한 사기꾼, 처럼 귀여운 어조가 아니었다. 죄목을 말하는 것처럼 ‘거짓말쟁이’라고 내뱉은 에드워드가 나를 두고 가 버렸다.

“조프리 전하?”

바움쿠헨 경이 연무장에서 불렀다.

뺨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바움쿠헨 경은 알렉스를 한 팔에 끼고 있었다. 머리가 헝클어진 알렉스가 바움쿠헨 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난 그 옆에서 알렉스가 안됐다고 생각한 죄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관계로 보이는데?

넌 여자 친구 말고 형제한테도 질투를 하냐?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맥락이 이해라도 됐다. 상대가 여주인공이었으니까.

질투심이 강한 캐릭터인가 보다, 게임이니까 과장했네, 네가 2D 세계의 인물인 걸 다행으로 여겨라, 현실에서는 정상 참작도 안 되는 범죄자야, 뭐 그렇게.

그런데 직접 겪으니 어이가 없었다.

에드워드가 알렉스를 목격한 날 이후, 알렉스는 오늘 수업을 포함해 딱 두 번 입궁했다. 저번은 잠깐 있다 가 버렸고 오늘은 그보다 약간 오래 버텼을 뿐인데.

자기가 타이밍을 잘못 잡아 놓고.

아니, 왜 이 시간에 그런 차림으로 왕성을 돌아다녀? 그런 복장이면 사람들이 널 못 알아보겠어?

“무슨 일이십니까?”

바움쿠헨 경이 알렉스를 놓고 다가왔다. 난 얼이 빠져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방금 전에 못 봤어?”

“시종 말입니까? 왕비님의 시종이었습니까?”

“아니. 왕비님의 시종은 저렇게 안 생겼잖아.”

답답해졌다. 경, 혹시 시력이 나빠?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에드워드의 얼굴은 다른 누군가로 착각할 종류가 아니었다.

“바움쿠헨 경. 그대 에드워드 왕자의 얼굴을 알던가?”

“예. 이전에 뵈었습니다. 폐하를 꼭 빼닮은 분이더군요.”

바움쿠헨은 그 얼굴을 담백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방금 에드워드를 못 알아봤다고?

“알렉스. 넌 봤어? 방금 그 시종.”

“네. 그 시종이 왜요?”

알렉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내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그가 에드워드를 알아봤다면 저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종 복장만 해도 사람들이 에드워드를 못 알아본다고? 그 얼굴을?

엄청난 설정이다.

아무리 그래도 제작자가 게임을 너무 쉽게 짠 거 아닌가?

다음 날 수업 시간에 에드워드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멍하니 시간을 버리다가 넋 나간 사람처럼 수업에서 나갔다.

말을 걸어도 못 들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제 왜 그랬어? 난 에드워드에게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인사도 못 하고 수업이 끝난 교실에 앉아 있었다.

“안 가세요?”

그레이가 책을 품에 안으며 물었다. 이 세계의 공부하는 사람들은 책을 가방에 넣지 않고 품에 안는 게 법칙이었다.

그래야 더 학구적으로 보여서일까? 그레이도 책을 어디 넣고 다니지 않았다.

“에드워드 오늘 이상하지 않아?”

“에드워드 전하께서는 늘 저러시잖아요.”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런데 왜 난 찜찜하지.

나를 위아래로 살펴본 그레이가 물었다.

“전하, 키 크셨어요?”

“몰라?”

발목이 시큰거리긴 했다. 조프리의 성장기일지도 모른다.

“저보다 시야가 높은 것 같아서요.”

“내가 너보다 작았어?”

순수한 질문이었는데 그레이는 심사가 꼬인 듯했다.

“비슷했던 것 같은데요. 하긴 전하도 곧 열두 살이 되시니까요.”

조프리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세계의 생일은 어떻게 치를까? 왕비님이 조프리의 생일을 가볍게 넘길 것 같진 않았다.

역시 파티를 열게 될까. 사람을 초대하려나. 왕비님을 따라서 갔던 자선 행사가 떠오르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생일 파티에 초대하면 올래?”

그레이라도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웃으며 묻자, 그레이는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영광이에요.”

‘제가 왜요?’라고 되물을 줄 알았는데.

난 얼떨떨하게 “초대장을 보낼게.”라고 대답했다.

위화감을 느낀 건 그 다음이었다. 조프리는 에드워드보다 4개월 늦게 태어났다.

그렇다면 에드워드의 생일은 언제지? 조프리의 생일이 앞으로 다섯 달쯤 남은 게 아니면 이미 지났다는 건데.

“그레이, 에드워드의 생일이 언제지?”

“지난달이요?”

그레이는 왜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바로 전달이었잖아?!

내가 생일 선물을 줬던가? 물론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생일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갔다. 파티도 없었고 있었더라도 조프리는 초대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지난달은 사건이 있었다. 조프리의 낙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에드워드가 그때 근신 중이었나?”

그레이는 잠깐 생각했다.

“그랬던 것 같네요.”

망했네.

* * *

파이 공작의 수업이 끝났다. 에드워드는 조프리를 쳐다보지 않고 교실을 나갔다. 조프리에게 실이 묶인 것처럼 등 뒤가 신경 쓰였다.

조프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실은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람들의 잡다한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그게 에드워드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에는 에드워드가 반드시 알아야 할 생각이 존재했다. 그 외의 것은 부차적이었다.

복도 맞은편에서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맨 앞에서 걸어오는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했다. 사슴처럼 슬픈 눈을 가진 우아한 여성이었다. 왕비는 에드워드를 보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어머나, 에드워드. 이런 곳에서 보네요.”

왕비는 에드워드를 ‘에드워드 왕자’라고 부르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아들인 조프리에게 꼬박꼬박 왕자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과 다르게.

왕비에게 에드워드는 왕자가 아니었다.

‘나의 조프리 왕자.’ 왕비는 소유권을 주장하듯 조프리를 그렇게 불렀다.

실제로 조프리는 왕비에 속해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비는 에드워드의 적이었다.

에드워드가 누군가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면, 그 사람은 왕비일 것이다. 왕비는 언제든 에드워드를 위협할 수 있었다. 왕비의 생각은 에드워드에게 해가 된다.

에드워드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속이는 데 익숙했다. 무력하고 연약한 생물인 것처럼. 왕비의 자비가 에드워드를 살리고 있다는 것처럼.

“어마마마.”

에드워드가 공손히 대답하자, 왕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요. 그대가 감기에 걸렸다고 들었는데. 혹시 벌써 나은 건가요? 튼튼하군요. 왕성은 귀인들의 공간. 왕실 의사가 병균을 옮기도록 허락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에드워드는 자신을 병균체 취급하는 왕비에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하고 대답했다.

멍한 얼굴로 비꼬는 말도 못 알아듣는 에드워드를 왕비는 오래 상대하지 않았다.

“그래요, 사흘쯤 더 궁에서 쉬는 게 어떤가요? 교실은 좁고 병이 옮기 쉬우니까요. 그렇게 해요, 에드워드.”

혼자 결정한 왕비가 웃으며 통보했다. 에드워드는 눈을 깜빡였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속도가 남들의 두 배는 느렸다. 답답해진 왕비가 재촉하려 할 무렵,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예, 어마마마.”

왕비는 미소를 짓고 에드워드를 지나쳤다.

왕비에게 에드워드의 존재는 해충과 비슷했다. 눈에 띄면 거슬리고 처리하고 싶지만, 보이지 않을 때면 어디에서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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