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41화 (41/293)

41.

조프리가 뭐만 하면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두 손을 들고 짝짝 맞부딪쳤다. 고개 숙인 여자애가 나를 쳐다봤다.

왕비님이 빙그레 웃더니 나를 따라 했다. 이내 살롱이 콘서트홀처럼 변했다.

여자애의 뺨이 붉어졌다. 박수 받으면 부끄러운 기분이 들긴 했다.

아이들은 ‘후원자님들 덕분에 겨울을 따듯하게 보냈고, 생일에는 케이크를 먹었고…….’ 같은 시를 낭독했다. 마지막은 정말 정말 감사하니까 계속 후원을 부탁드린다는 말로 끝났다.

저게 시인가?

아이들 뒤에서 누군가 그런 문구를 넣으라고 지시한 티가 났다. 아이들이 말한 원장님이 아닐까? 어쨌든 자선 행사에 참석한 귀족들은 흡족한 듯했다.

“좋은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 같구나.”

아이들을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긴장이 풀린 아이들은 핑거 푸드를 하나씩 우물거리고 있었다.

여자애가 나를 발견하고 “왕자님” 하고 부르려 했다. 왕비님이 내 팔을 잡았다.

“이만 돌아갈까요, 왕자. 저녁 수업에 늦겠어요.”

“네, 어마마마.”

왕비님은 나보다 수업 시간을 더 잘 기억하고 계셨다.

돌아가는 마차에서 왕비님이 물었다.

“오늘 행사는 즐거웠나요?”

“네, 어마마마.”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과 많이 친해진 것 같네요.”

“전보다는요.”

이전에 그레이와 조프리가 어떻게 지냈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씀드리면 왕비님이 좋아하실 테니까.

왕비님은 낮게 웃더니 “내 왕자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친구를 사귄 아들에게 하는 말로는 이상했다.

하지만 왕비님이 이상하게 행동하시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난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그레이의 호감도 올리기는 이미 글렀다는 것만 확인했지만.

* * *

그레이 크래커는 왕자가 고아원 아이들에게 웃어 주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무표정으로 왕자를 지켜보던 왕비가 말했다.

“이만 돌아갈까요, 왕자. 저녁 수업에 늦겠어요.”

왕자는 멈칫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마마마.”

왕자가 떠나자 자선 행사는 맹숭맹숭해졌다. 귀족들이 하나둘 마차를 불렀다. 공작 부인도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이만 갈까요?”

“예, 어머니.”

공작 부인은 그레이에게 신뢰 가득한 미소를 보냈다.

덜컹이는 마차에서 그레이는 생각에 잠겼다. 마차는 광장을 통과하고 있었다. 사형수들의 목이 걸린 장대가 보였다.

그레이는 이 일에 바움쿠헨 백작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재상인 아버지는 그레이에게 어떤 일도 숨기지 않았다. 그레이는 재상의 후계자가 될 테니까.

오랜 기간, 재상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레이는 기적적으로 태어난 후계자였다. 갓난아기 때 숨이 한번 멎을 정도로 앓은 적이 있었고 잔병치레도 자주 했다. 친척들은 그레이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레이는 친척 아이 누구를 데려와도 자신보다 후계자에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그는 영리했고 부모님의 기대를 받았으며 그 기대를 충족해 냈다.

부모님은 그레이를 믿었다. 재상인 아버지는 그레이가 왕성에서도 잘 해낼 거라고 믿었다.

그레이는 그럴 생각이었다. 두 왕자를 재어 보고 어느 쪽에 줄을 서는 게 옳은지 판단할 계획이었다.

심적으로는 에드워드에게 기울어 있었으나, 에드워드에 대한 동정심이나 조프리에 대한 혐오감이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지난 일 년 에드워드와 조프리 왕자를 살펴봤다. 일 년이면 어떤 사람을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을까?

최근 그레이는 자신의 판단력을 믿을 수 없었다.

‘너희는 잘할 거야. 긴장하지 말고 해. 다들 너희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조프리는 좋은 왕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전의 일들은?

일 년 전. 에드워드를 침묵시키고, 왕성의 유령처럼 만들어 버린 일련의 일들은?

그것 역시 조프리 왕자의 소행이 아닌가.

예전의 그레이라면 확신했을 것이다. 지금은 알 수 없었다.

그레이가 자신의 판단을 번복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는, 하지만…….

10. 검술 수련

바움쿠헨 경은 수련용 목검을 수업에 가져왔다.

“이게 뭔지 물어도 되나, 경?”

“보시다시피 목검입니다, 전하.”

“크기가 작군.”

“예, 전하께서 작으시니까요.”

목검은 어린아이 손에 맞을 크기였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조프리 손에 맞았다.

승마 수업에 왜 목검이 필요한 걸까?

“경, 난 이게 정말 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야.”

“그러십니까? 충직한 신하를 놀리는 취미를 가지셨군요.”

“경의 말에 오류가 있군.”

“오류 말씀이십니까? 알려 주시면 시정하겠습니다.”

“일단 그대가 언제부터 충직한 신하였나?”

“전하께서 사냥터에서 활약하시기를 바라는 제 충심을 몰라주시는군요.”

“그것참 미안하군.”

난 어처구니없다는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황공한 말씀입니다, 전하. 충신이 충성심을 시험받는 일이 제게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만 한 사람을 승마 선생으로만 쓰기는 아깝지 않습니까? 제가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하. 검을 배워 두시죠.”

바움쿠헨 경이 씩 웃었다.

바움쿠헨 경은 내가 왕에게 인정받기를 바랐다. 경 성격에 이상한 뜻은 없을 테고, 나에 대한 호의일 것이다.

경이 권하는 대로 검을 들었다. 목검은 막상 들어 보니 무거웠다. 길이 때문인 듯했다. 검 끝이 허공에서 혼자 흔들렸다.

“잘 어울리시는군요.”

바움쿠헨 경이 웃었다. 킬킬거리고 싶은 걸 참는 표정이었다. 지적하고 싶었지만 봐줬다.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바움쿠헨 경은 내게 내려치기 동작을 알려 줬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서서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동작이었다. 검도의 기본 동작 같은 느낌이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섯 번은 내리쳤나 싶을 때부터 팔이 뻐근했다. 존재를 모르던 근육이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조프리는 정말 근육이란 게 없다.

팔을 흐느적거리며 카운트를 마치자, 바움쿠헨 경이 손뼉을 쳤다. 시종 흉내를 내는 데 재미 들린 듯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스무 번 반복해 볼까요.”

바움쿠헨 경이 이전 세상의 사람이었다면, 아마 정신론으로 뭐든 이겨 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체육 선생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선수들을 혹사시킨다는 논란에 시달리는 야구 감독이거나.

난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연무장을 달리던 알렉스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우리가 있는 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는 이 주 만에 붕대를 전부 풀고 수업에 따라 나왔다. 부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건데, 벌써부터 무슨 생각인지 자기 몸을 학대하고 있었다.

바움쿠헨 경은 알렉스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데려왔다고 했다. 알렉스는 지금은 확실히 멀쩡해 보였다. 내일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몸 써도 돼?”

“문제없습니다. 저만 믿으십쇼. 다리가 부러져도 검 수련을 하는 놈들도 있잖습니까?”

믿음이 전혀 안 가는 태도로 바움쿠헨 경이 말했다.

내가 스무 번의 내려치기를 끝냈을 때 알렉스는 요상한 체조를 하고 있었다. 팔다리를 위아래로 휘적거렸다. 전체적으로 국민 체조랑 비슷했지만 그것보다 율동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저것도 도움이 되나?”

“재활입니다, 재활.”

바움쿠헨이 이젠 숨기지도 않고 킬킬거렸다.

그냥 즐기는 것 같은데. 수상쩍었다.

발레리노처럼 제자리를 핑그르르 돌던 알렉스가 이제는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기 시작했다. 펄쩍 뛰어올라서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아 떨어졌다.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대단했다.

바움쿠헨 경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저것도 재활이야?”

아니, 대단하긴 한데. 사람 몸 근육이 어떻게 되어 있으면 저런 동작을 성공시킬 수 있지?

바움쿠헨 경은 대답 없이 킬킬댔다. 아니잖아?!

알렉스는 내가 깨달은 것보다 좀 늦게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우리가 자신을 구경하는 걸 눈치채고 동작을 멈췄다.

“제가 뭐 잘못했어요?”

알렉스가 바움쿠헨 경에게 물었다. 경은 일어나서 목을 가다듬더니,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하면 완성되겠다.”

뭐가. 서커스 동작이?

“뭔데요?”

알렉스가 내 눈치를 봤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네?”

“너 기사가 되는 수련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요?”

이상한 게 나뿐인가?

“기사가 전장에서 공중제비를 돌아?”

잠시 뒤 알렉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럴 줄 알았어!”

그가 바움쿠헨 경에게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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