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40화 (40/293)
  • 40.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레이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왜요?”

    “아니, 맞는 말이라.”

    난 아이들을 돌아봤다.

    “내 소개가 늦었네. 조프리 비스코티야.”

    아이들은 내 이름엔 관심 없었다. 그레이가 먼저 언급한 단어가 귀에 박힌 듯했다.

    “왕자님?”

    “진짜 왕자님이에요? 그런데 왜…….”

    “쉿. 하지 마.”

    애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그러더니 여자애 쪽이 남자애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남자애가 윽 신음했다.

    “왜, 뭐라고 하려 했는데? 무례하다고 안 할 테니까 말해 봐.”

    난 남자애에게 물었다. 여자애는 고개를 휙휙 내젓다가 내가 시선을 주자 멈췄다. 이쪽이 더 어른스러운가?

    긴장 풀어. 난 여자애에게 웃어 주었다. 여자애의 눈이 커졌다.

    “왕자님은 금발인 줄 알았어요.”

    그 틈을 타서 남자애가 대답했다. 여자애의 눈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커졌다. ‘멍청아!’라는 표정이다.

    “왜?”

    웃음을 참으며 묻자, 남자애는 다시 넙죽 대답했다.

    “동화책에서 읽었어요. 왕자님은 금발이었어요.”

    “맥!”

    여자애가 빽 외쳤다.

    “왜?”

    남자애가 맥 빠진 어조로 대답했다.

    “왕자님이 금발이 아닐 수도 있지!”

    “맞아. 근데 금발인 왕자도 있어.”

    “정말요?”

    “응. 폐하께서 금발이시잖아.”

    아이들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설명해 주지? 그러니까 유전이란 게 있어서……. DNA가? 생물학이? 우성과 열성이었나?

    사실 나도 모르는 분야였다.

    이런 얘기 했다가 왜 조프리는 금발이 아니냐고 물어보면 곤란하기도 하고.

    “그럼 왜 왕자님은 금발이 아니에요?”

    그런데 남자애가 물어 버렸다.

    “글쎄?”

    “넌 좀 조용히 해. 원장님이 얌전히 있으랬잖아.”

    여자애가 남자애를 찔렀다. 손을 삽날처럼 만들어 남자애를 조용히 시키기까지 동작이 신속했다.

    원장님이라는 단어 때문에 알렉스가 떠올랐다.

    그렇구나. 이건 고아원 후원을 목적으로 한 자선 행사였다.

    이 애들은 외모가 괜찮아서 참여하게 된 듯했다. 귀족들도 보기에 멀끔하고 괜찮은 아이들을 후원하고 싶을 테니까.

    “왕자. 행사가 진행될 거예요. 이쪽으로 와요.”

    왕비님이 나를 불렀다.

    “가야겠다. 여기 있는 음식 먹어도 되는 거야. 그냥 손으로 집어 먹어. 행사 중에 너희가 참가하는 것도 있어?”

    “시를 외워 왔어요. 귀족들 앞에서 읽으면 된대요.”

    여자애가 대답했다.

    “너희는 잘할 거야. 긴장하지 말고 해. 다들 너희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니까.”

    난 아이들에게 말하고 그레이를 돌아봤다. 그레이는 묘한 표정이었다.

    “왜? 너도 갈 거지?”

    “아니요……. 네. 갈게요.”

    웬일로 군말 없이 따라왔다. 얼마 빠져 있지도 못할 거면서 왜 자꾸 끌고 다니느냐고 할 줄 알았는데.

    왕비님과 공작 부인은 절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몇 미터 밖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가까이 와서 대화 내용을 들으니 예상과는 좀 달랐다.

    “우리 조프리는 얼마 전 파이 공작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해요. 학문적 성취가 어찌나 뛰어난지.”

    “어머, 대단하세요. 공작 각하께서는 칭찬이 드문 분이잖아요? 물론 우리 그레이에겐 전부터 학자가 되지 않겠냐고, 아카데미에서도 그레이 같은 인재를 놓치면 아까울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호호.”

    “하하.”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동질감을 나누기 위해 그레이를 봤는데, 그는 고개를 똑바로 든 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재상 앞에서 본 그 그림 같은 미소였다. 말이 귀를 통과하지 않는 듯한 강철 인간 상태…….

    “왕자와는 좋은 시간을 나눴나요? 왕자가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끌고 가던데.”

    왕비님이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오해가 있는 듯했다. 그레이와 내가 친한 친구라서 둘이 어디서 잘 놀고 왔다고 여기시는 것 같은데.

    “예. 왕자님께서 저를 신경 써 주셨어요.”

    “어머, 그런가요? 무슨 얘기를 나눴길래?”

    “자기소개를 잘해야 한다는 충고를 해 주셨어요. 어른들 틈이라 민망해서 혼자 있기 힘들었거든요.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하는 티가 너무 났나 봐요.”

    그레이는 강철 미소로 대답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얘기는 다 나를 비꼬고 있었다.

    그레이의 화술 레벨은 만렙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듯했다. 게임 상태 창이 안 보여도 짐작 가는 사실이었다.

    “소공작은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인가 봐요.”

    왕비님이 공작 부인에게 말했다. 공작 부인이 손을 내저었다.

    “어려서 피아노를 가르쳐서 그래요. 예술가들이 그렇잖아요, 워낙 성품이 섬세하다 보니…….”

    날 비꼬려고 꺼낸 얘기가 그레이까지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레이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수줍게 미소 지었다. 어머나, 왕비님이 감탄했다.

    “조프리 왕자도 피아노를 가르칠 걸 그랬나 봐요. 역시 예술적 감성은 어릴 적에 길러 둬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다.

    발소리 없이 자리에서 벗어났다. 왕비님은 대화에 열중하느라 내가 사라지는 걸 보지 못했다.

    두 분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 찬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기서 폭소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사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상태였다.

    그레이가 내 옆에 등을 기대고 섰다. 이번에는 그에게 따라오라고 하지 않았는데. 제 발로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짜증을 참고 있는 듯했다. 얼굴은 무표정한데 이마만 벌겠다.

    너 스트레스 받으면 이마가 빨개지는구나.

    엄청나게 눈에 띄었다. 그래도 모르는 척하는 게 예의겠지.

    왕비님과 공작 부인은 비슷한 부류의 부모님이었다. 자식들에게 비슷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조프리가 어릴 적에 에드워드를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조프리와 그레이는 잘 지낼 수 있었을 것 같다.

    “왜요?”

    그레이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모른 척해 주려고 했더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실 말씀 하세요.”

    “할 말 없다니까.”

    “있으시잖아요?”

    “혹시 듣고 싶은 말 있어?”

    괴롭힘 당하는 거 좋아해?

    이런 대화 전에도 한 것 같은데.

    “이미 눈빛으로 말하고 계시잖아요.”

    “뭐가 문제야? 예술적이고 섬세한 그레이 군.”

    “그 말 하실 줄 알았어요.”

    그레이가 짜증 냈다. 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레이가 귀여워 보였다. 눈이 어떻게 된 건가?

    그레이는 골이 나서 내게 등을 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레이와 아까 대화를 나눈 아이들은 크게 나이 차가 나지 않았다. 어린애였다.

    괜히 놀린 것 같다. 그레이를 달래 주려고 다가갔다.

    “재상도 공작 부인도 널 굉장히 믿고 계시네. 부담감이 크겠어.”

    다 이해해. 그런 어조로 말했다. 기대받는 부담감에 대해서라면 조프리도 경험자였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겸사겸사 조프리에 대한 호감도 좀 올리고.

    그레이는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이었다.

    “부담스럽진 않은데요? 그거 맞춰 드리는 게 뭐 어렵다고.”

    아, 그래?

    “말씀하신 대로 부모님은 절 믿고 계세요. 그래서 걱정스러운 거죠.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하실 분들이니까. 전 실패하면 안 돼요. 제가 잘못 판단하더라도, 부모님은 절 믿으실 테니까.”

    그레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다. 내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는 느낌이었다. ‘조프리’를 평가하고 있는 건가. 이미 쓰레기라고 결론 내린 것 같지만. 그레이는 조프리와 다른 사람이었다.

    어른스럽다는 건 놀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그레이는 정말 어른스러운 데가 있었다. 사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공략 캐릭터들은 다 그런 면이 있다. 에드워드도 알렉스도 그랬다.

    아닌 건 조프리뿐인 모양이다.

    조프리는 왕비님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이 열등감으로까지 발전한 캐릭터였다. 여주인공에게 가장 괜찮은 공략 캐릭터를 골라 주려고 했는데, 가장 별로인 캐릭터를 붙여 준 셈이 됐다.

    조프리보다 그레이가 더 괜찮은 캐릭터였다니.

    내 안목에 충격받고 있는데 행사가 진행됐다. 주최자가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덜덜 떨며 살롱 한가운데 섰다. 사람들의 주목이 아이들에게 모였다.

    “저, 저희를, 후원해 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저, 저희가 시를 썼습니다.”

    “나, 낭독하겠습니다.”

    여자애와 남자애가 차례로 말했다. 뭔가 하려나 보다.

    귀족들은 점잖게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애가 입을 떼려다가 머뭇거렸다.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긴장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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