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39화 (39/293)
  • 39.

    나보다 훨씬 먼저 준비를 시작한 왕비님은 나와 비슷한 시간에 마쳤다.

    “오늘 정말 근사하네요, 조프리 왕자.”

    왕비님이 칭찬했다.

    “어마마마께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우세요.”

    분위기를 맞춰 말하자, 주변이 훈훈해졌다. 시녀들이 입을 가리며 웃었고 왕비님은 옷이 구겨지는 걸 신경 쓰지 않고 날 껴안았다.

    왕비님이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조프리를 사랑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조프리로 왕비님을 기쁘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다.

    마차가 출발했다.

    그러고 보니 왕성을 벗어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왕성이 넓다고는 해도 어딘가 갑갑한 느낌이 있었다.

    밖을 보고 싶어 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시장을 보고 싶다. 광장이라도 상관없었다.

    “왕자, 위험해요. 너무 고개 내밀지 말아요.”

    “네, 어마마마.”

    그렇게 말하는 왕비님도 나와 다를 바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마차 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거리를 보는 눈이 이국의 보석을 보는 것 같았다.

    “궁을 떠나서 어디로 가는 건 십 년 만이네요.”

    십 년?

    그 정도면 궁에 갇혀 산 수준이었다.

    “어마마마,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구경할까요? 제가 지켜 드릴게요. 무언가 특이한 걸 팔고 있을지도 몰라요.”

    왕비님은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요. 내겐 왕자가 최고의 보석이니까.”

    맥락이 이상했지만 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왕비님이 나를 보고 있었다.

    왕비님의 몸이 내 쪽으로 반쯤 기울었다.

    “왕자, 이 어미가 무슨 일을 하든 왕자를 위해 하는 일이란 걸 알고 있죠?”

    “네.”

    “그래요. 그것만 기억하면 돼요. 그렇다면 이 어미는 안심이에요.”

    왕비님이 웃었다.

    내가 뭔가를 놓친 것 같았지만, 역시 그게 뭔지를 알 수는 없었다. 열한 살 조프리가 나보다 눈치가 좋았을까? 아니었으면 좋겠다.

    마차는 어느 저택 앞에 정차했다. 나는 먼저 내려서 왕비님을 에스코트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행사가 진행되는 살롱에는 이미 사람들이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자선 행사의 주최자인 부인이 우리에서 인사했다. 그녀는 사십 대쯤 되어 보였고 영민한 인상이었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급히 연락을 받아 준비가 미흡할지 모릅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세요.”

    “개의치 않네. 이런 훌륭한 행사에 초대해 주다니 나야말로 고맙군.”

    부인은 내게도 인사했다. 인사가 길어져서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미 도착해 있는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예의를 차렸다고 생각한 부인이 물러났다. 왕비님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몰려든 이들이 하나둘 자신을 소개했다.

    “마몽 백작입니다, 전하. 전에 뵈었는데 기억하십니까…….”

    “올가 자작입니다. 신년제에서 인사드렸는데…….”

    난 한 걸음 물러나 있다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왕비님만 타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조프리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지 굉장히 궁금해했다.

    물론 나는 조프리가 아니었고 그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지도 못했다. 사실 진짜 조프리였다고 해도 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자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수가 많지도 않았는데 절반쯤은 이곳에 몰려든 듯했다.

    난 더듬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사람이 섞일 때마다 혀가 꼬였다. ‘그러니까 그대 이름이 뭐였더라?’ 상태로 그들에게 “반갑네”, “훌륭하군”, “잘 부탁하네.” 같은 말만 하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을 비집고 한 사람이 다가왔다. 눈이 동그랗고 호기심으로 빛나는 부인이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순서를 양보해 주었다. 그녀는 왕비님과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치맛자락을 살짝 올렸다.

    “왕비님, 왕자 전하, 이런 곳에서 뵈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인사가 늦은 점 용서 부탁드려요.”

    “공작 부인. 용서라니 당치 않아. 부인을 보게 되어 기쁘네.”

    왕비님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왕자 전하와 함께 외출하셨군요? 왕자 전하, 저를 소개해 드리는 건 처음이죠? 제 아들이 왕자 전하를 잘 모시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아들? 부인에게 마주 인사를 하려다가 나는 멈칫했다.

    부인의 뒤로 누군가 걸어왔다. 부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그 남자애는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그레이?”

    그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조프리 전하. 오실 줄 알았으면 인사를 나갔을 텐데요.”

    나도 네가 있을 줄 몰랐어. 그러니까 얼굴 좀 펴 줄래?

    눈이 동그란 부인의 정체는 크래커 공작 부인이었다. 그레이의 얼굴은 재상의 유전자를 100퍼센트 물려받아 나온 듯했다. 부인 쪽은 동글동글한 인상인데 그레이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공작 부인이 두 손을 모았다.

    “마침 잘 왔어요, 그레이. 왕자 전하께서 오셨답니다. 그레이가 처음 참여한 자선 행사에 왕자 전하께서도 처음 참석하시다니 굉장한 인연이죠?”

    “네, 정말 그러네요.”

    그레이가 나를 힐끗 봤다. 정말 우연이냐는 시선이었다.

    “부인, 죄송한데 그레이를 빌려가도 될까요? 전에 못다 한 얘기가 있어서요. 물론 내일 수업 때도 볼 수 있겠지만 수업 시간엔 수업을 들어야 하니까요.”

    “아아, 왕자 전하. 그러세요! 제 아들이 왕자 전하께 도움이 되다니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난 그레이에게 여길 벗어나자고 손짓했다. 좋은 핑계가 생겼다. 사람들 이름을 너무 많이 들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일부러 성큼성큼 걷자 사람들이 길을 터 줬다.

    살았다.

    그레이가 잘 따라오고 있을까? 테이블에 가까워져서야 그 사실이 궁금해졌다.

    뒤를 돌아봤다. 그레이는 내 뒤에 있었다. 언짢은 표정이었다.

    테이블에 도착하면 한 소리 듣겠다.

    살롱 곳곳에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핑거 푸드를 올려놓은 자리였는데, 한 테이블만 사람이 적었다.

    그곳에는 어린아이 둘만 서 있었다. 여자애랑 남자애. 조프리와 그레이 같은 처지의 아이들인가? 나이는 더 어려 보였다.

    “안녕?”

    인사하자 아이들은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둘이 작은 소리로 뭔가 속삭이고 있더니 비밀 작전이라도 세웠던 모양이다.

    “괜찮아. 무슨 말하는지 안 들렸어. 왜, 여기 빠져나가게?”

    난 장갑을 벗고 당근 케이크를 한 조각 입에 넣었다. 핑거 푸드의 배치를 보니 내가 처음 손댄 듯했다. 네모나고 긴 접시에 두 줄로 핑거 푸드를 배열했는데, 내가 먹은 자리만 비어 있었다.

    얘네는 왜 안 먹고 있었지?

    두 아이가 뒤로 물러났다. 나를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괜찮아. 나도 도망치고 싶어.”

    “그러시면 안 되죠.”

    언짢은 목소리로 그레이가 끼어들었다.

    “알아. 그러니까 얌전히 있잖아.”

    “방금 도망치셨잖아요. 저는 왜 핑계로 쓰세요?”

    “몰라. 저택 밖으로 도망친 건 아니잖아? 좀 봐줘.”

    그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까지 할 모양이다.

    그제야 아이들의 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두 아이는 조프리보다 체구가 작아서, 테이블에 붙어 있을 땐 몸이 테이블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얼굴이 귀여운 상이었다. 보기 좋은 외형인데 말랐고, 옷은 품이 컸다.

    에드워드의 첫인상과 비슷했다. 옷이 귀족의 복장이 아니라는 게 달랐을 뿐이다.

    아이들의 조끼는 거친 재질이었고 셔츠도 그래 보였다. 흰 양말은 약간 누런빛을 띠었고 구두는 키에 비해 작았다.

    “후원받는 아이들이잖아요. 왕자님이 그렇게 대뜸 말을 거시면 어떻게 대답하겠어요.”

    그레이가 옳은 말을 했다.

    그레이가 조프리를 싫어해서 그렇지, 말은 항상 옳았다.

    그가 조프리를 싫어하는 이유도 에드워드를 괴롭혀서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다가 조프리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거 아닌가. 놀랍게도 그레이는 좋은 녀석이었고 조프리가 나쁜 놈이었다.

    에드워드는 보살이라 조프리를 받아 준 거고 그레이는 그 정도 수양이 안 되는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었던 거다.

    에드워드를 뭘 어떻게 얼마큼 괴롭혔다는 건지 내막은 모르겠지만, 조프리는 가해자였다.

    그레이에게 그 사실을 듣고 나니 그가 나를 더 싫어하게 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에드워드에게 친한 척이냐는 거겠지.

    그레이의 반응이 더는 껄끄럽지 않았다. 얘 호감을 어떻게 사나 싶을 뿐이다.

    그레이가 내 미래에 보탬이 될 순 없겠지만 방해는 될 수 있겠다.

    에드워드에게 조프리가 얼마나 나쁜 놈이었느냐는 말만 계속 해도 에드워드는 원한을 잊지 않을 거 아닌가.

    그레이의 악감정을 누그러뜨려 두는 게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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