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왕자는 그녀에게 다시 다정해졌다. 그녀의 애정을 피하지 않았고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녀에게 잘 본 시험지를 선물하기까지 했다.
왕비는 왕실 연금술사가 다림질해서 코팅한 왕자의 시험지를 벽에 걸어 놓았다. 기분이 좋지 않다가도 시험지를 보면 미소가 나왔다.
조프리 왕자는 늘 왕비를 행복하게 했다. 그런 마법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왕자뿐이었다.
“……이상입니다, 왕비님. 저는 제가 아는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제 충성심을 보셨지 않습니까?”
경비대장이 횡설수설했다.
왕비는 빙그레 웃었다. 감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경비대장은 그녀가 베푸는 대로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대가를 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어떤 정보를 왕비에게 가져왔더라도, 왕비가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되었다.
그건 왕비와 경비대장이 거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거래는 동등한 위치의 두 사람이 하는 행위다.
그러나 왕비의 표정을 보고 바로 움츠리는 자세는 좋았다.
처세가 괜찮은 자였다.
바움쿠헨 백작이 경비대장을 추궁했을 때, 경비대장은 자신의 후원자인 남작에게 달려가지 않고 곧장 왕비를 찾아왔다. 그리고 왕자가 처음 자신을 불렀을 때의 일이며 자신이 왕자를 위해 어떤 심부름을 했는지 털어놓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견을 덧붙였는데, 바움쿠헨 백작이 왕자의 명령을 받고 자신을 찾아온 것 같다는 말이었다.
왕비는 그 사견 때문에 경비대장을 수렁에서 건져 주기로 했다.
바움쿠헨 백작은 다루기 어려운 자였다. 왕자의 승마를 도와 달라는 왕비의 요청에도 무례한 태도로 응하지 않았는가.
왕마저 그를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데, 조프리 왕자는 그자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자가 다시 다정해진 건 좋았다. 그러나 동시에 왕자는 비밀이 많아졌다. 사람은 욕심이 많은 동물이어서 왕비는 그게 또 서운했다.
바움쿠헨 그자가 왕자를 박대할 때, 왕비에게 힘들다 말 한마디 하는 게 어려웠단 말인가?
왕자에게 무슨 생각이 있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결국 왕자는 바움쿠헨의 마음을 움직였다.
고향에서부터 왕비를 따라온 시녀는 왕자가 어른이 되어 간다고 말했다.
확실히 왕자는 부쩍 어른스러워졌다. 이전 같으면 두려워할 왕과의 식사 자리에도 참석했고 승마도 배우겠다고 나섰다.
왕자가 그녀에게 비밀을 가지는 건 슬펐지만, 이 역시 이겨 내야 할 일일 것이다. 왕비는 사춘기에 들어선 왕자를 인내심 있게 지켜봤던 것처럼 지금의 왕자도 지켜볼 생각이었다.
왕자는 그녀의 믿음에 보답해 주겠지. 이번에 그랬듯이.
왕비가 남작을 추종자로 둔 건 편리성 때문이었다. 남작은 편리한 도구였고 왕비는 그 도구가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조프리 왕자는 그 도구를 망가뜨리고 싶어 했다. 바움쿠헨이라는 왕자의 검을 사용해서.
왕비는 왕자에게 자신의 도구를 내주었다.
경비대장은 바움쿠헨의 방문을 알리며 자신의 쓸모 역시 역설했다. 왕비는 남작을 정리하며 잡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경비대장이 청소부를 자청한다면 그보다 편한 일은 없을 거였다.
왕비는 조프리 왕자의 앞길을 깨끗이 닦아 놓을 것이다.
왕자에게 추문은 어울리지 않았다. 왕자는 성군이 될 테니까. 편리성 때문에 놔두었던 추종자들도 면면을 살펴서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왕비는 그런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내게 약조를 지키라?”
왕비가 물었다. 불온한 기색을 느낀 경비대장이 이마를 땅에 찧었다.
“아닙니다, 왕비님. 소신이 입이 방정이라…….”
“내 말이 그다지 미덥지 않았던 모양이군. 두 번째 약조를 얻어 내려 하는 걸 보니 말이야. 아니면 그대 욕심의 크기가 목숨의 중함보다 더 크던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왕비님! 소신이 성질이 급해 그렇습니다!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경비대장이 이마를 쿵쿵 찧었다. 왕비는 부채를 접었다.
시끄럽고 귀찮은 사내다. 상대하기 피곤했다. 왕비가 시녀에게 손짓하자, 시녀는 왕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경비대장에서 더 들을 말은 없었다. 시녀가 그를 상대할 것이다.
왕비는 시녀를 방에 남겨 둔 채 옆방으로 건너갔다. 문을 닫는 순간 경비대장에 대해선 잊었다.
왕비가 생각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사춘기를 통과한 왕자는 좋은 자질을 보이고 있었다. 성실함과 매력. 사람을 끌어모으는 자질이었다.
왕자는 성군이 될 것이다.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왕비는 그에 대한 준비는 못 해 주고 있었다.
성군이라는 건 좋은 평판이 따라야 하는 법인데.
열린 테라스로 바람이 들어왔다. 저녁 공기가 서늘했다. 광장도 어두워지겠지.
공개 처형은 끝났을 것이다. 왕비는 처형식의 원인을 떠올렸다. 시작은 왕자가 어떤 고아를 동정해서였다.
내 착한 왕자님.
왕자는 자선 사업이 잘 맞을 것이다.
좋은 평판을 얻기에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어제 저녁 왕자를 불러 운을 떼어 보니, 왕자 역시 자선 행사 참가에 좋은 반응을 보였다.
또 어떤 행사가 있을까. 괜찮은 귀족들이 참가하는 자리에 왕자를 내보이고 싶은데.
왕비는 왕자를 위해 계획을 세웠다. 이 시간이 좋았다. 눈을 감으면 왕자가 높고 흔들림 없는 자리에 앉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왕자는 왕비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9. 자선 행사
“아직 안 됐어?”
“아직이에요, 왕자님. 눈 뜨지 마세요.”
“대충 하면 안 돼?”
“충분히 대충 하고 있어요. 꾸미는 시종이 저밖에 없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니까요? 앗. 잠깐만요, 움직이시면 안 돼요!”
도트가 주의를 줬다.
난 눈을 감은 채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느꼈다. 무스를 발라 딱딱해진 머리카락이 피부 어딘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왕자님, 정말 저로 괜찮으시겠어요? 지금이라도 솜씨 좋은 시종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됐어. 자선 사업이잖아. 여기서 뭘 더 꾸미겠어?”
“하지만 왕자님, 귀족들이 참가하는 자리라고요. 왕자님을 처음 선보이는 자리인데…….”
도트가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눈썹 근육이 뒤로 당겨졌다.
다른 시종은 필요 없었지만 도트가 불안하긴 했다. 거의 한 시간째 내 머리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도트는 뭘 하고 싶은 걸까. 머리카락으로 예술 작품이라도 만드는 걸까?
“자선 행사라며. 기부하러 모인 거 아니야? 내가 주인공이었어?”
“왕자님이 참가하시면 어느 자리든 왕자님이 주인공이 되시는 거죠!”
“응, 그래.”
“사실 자선 행사는 참가해 본 적 없어서 모르지만요.”
도트가 실토했다. 난 온 얼굴 근육이 뒤로 당겨지고 있어서 대답할 수 없었다.
왕비님이 말한 자선 행사는 어떤 귀족 저택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같았다. 난 점심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의에 맞는 차림새를 갖추느라 도트는 몇 가지 옷을 펼쳐 놓고 끙끙거렸다. 왕비님의 시녀가 왕비님은 푸른 계열의 차분한 드레스를 입을 거라고 전해 줬다.
드레스 색에 맞춰서 도트는 짙고 푸른 옷들을 쭉 늘어놨다. 최종적으로 복장이 선택된 건 그로부터 두 시간쯤 지나서였다. 그동안 난 피부가 반질반질해지도록 욕탕에 들어가 있었다.
조프리의 얼굴은 왕비님을 닮아 미형이었다. 눈이 까맣고 피부는 깨끗하고 전체적으로 잘 가꿔진 인상이었다.
내가 살면서 본 아이들 중에 가장 도련님 같은 인상의 소유자는 그레이였다. 물론 그레이는 진짜 도련님이었지만. 하지만 그레이는 태도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고, 생긴 걸로는 조프리도 만만치 않았다.
맨얼굴로 거리를 돌아다녔다가는 몇 분 만에 소매치기를 만나 전 재산을 털릴 것이다. 한 시간 뒤에는 납치범 소굴에 갇혀 있을 테고. 그레이가 변장을 권한 이유가 있었다.
티타임 시간이 되었을 즈음 준비가 끝났다.
“왕자님, 다 됐어요!”
도트가 내게서 손을 뗐다. 나로서는 어디가 바뀌었는지 모를 조프리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가장 큰 특징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이마가 시원하다 싶더니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이 없었다. 올백이었다. 살면서 이런 머리 해 볼 줄 몰랐는데.
두 번째로는 넥타이를 맸다. 현대식이 아니라 서양화에 나올 법한 레이스류 넥타이였다.
도트는 이 넥타이에 주름을 잡느라 한참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세계관에는 현대식 넥타이도 있었다. 그냥 그거 매면 안 됐던 건가.
솔직히 이게 멋있는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꾸민 도트 앞에서 무슨 말을 하기도 그랬다.
내 미적 감각이란 건 믿을 수 없기도 하고.
“고마워.”
도트에게 인사하자, 그가 방긋 웃었다.
“잘 다녀오세요,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