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37화 (37/293)
  • 37.

    “도망친 거 아니에요. 수련하고, 자격을 갖춰서 다시 맹세하려는 거거든요.”

    “좋은 자세야. 왕자님도 안목이 좋으시군. 한 번 만나 뵀다고 했나? 너 같은 꼬맹이의 뭘 보고 마음에 들어 하셨을까?”

    “왕자님이 절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요?”

    알렉스가 놀라서 물었다. 그도 자기 객관화가 됐다.

    알렉스는 왕자님 앞에서 사형을 열 번쯤 당해도 괜찮을 말을 하고, 태도를 취하고, 나중엔 도망치기까지 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긴 했지만.

    왕자님 마음에 들 만한 구석이 없었다.

    “안 그러면 뭐하러 나한테 널 가르치라고 했겠어? 아직 내 명성을 듣지 못한 모양인데, 내가 보기보다 귀한 몸이란다.”

    “왕자님은 좋은 분이니까요?”

    알렉스가 냉큼 말했다. 순진한 눈망울을 보고 바움쿠헨은 이 꼬마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 이유도 있긴 하겠지.”

    “저도 제가 별거 아니란 건 알아요. 놀리지 마세요.”

    “내가 하는 말은 다 너 놀리려고 하는 말 같냐?”

    “아니에요?”

    알렉스가 똑똑하게 되물었다. 바움쿠헨은 그의 뺨을 조몰락조몰락 만져 주고 싶은 걸 참았다.

    “물론 90퍼센트는 놀리려고 하는 말이지.”

    “맞잖아요!”

    “하지만 진지할 때도 있어.”

    알렉스가 붕대 밑으로 드러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럴 리 없는데. 왕자님은 방금도 너 따위가 무슨 충성 맹세냐고 하셨는데. 난 왕자님께 충성할 자격도 없는데.

    “그럼……. 정말로 전하께서 절 마음에 들어 하세요? 왜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언제요?”

    “물론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지만.”

    “거짓말쟁이!”

    “꼬맹아, 넌 추측이라는 것도 모르냐?”

    “이제 스승님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바움쿠헨은 버둥거리는 알렉스를 붙잡았다. 광장 중앙으로 향하자 사람이 불어났다. 알렉스 같은 어린애는 길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알렉스의 과거를 떠올려 봤을 때 이 광장이 제집 같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지금은 부상을 입은 상태니까. 바움쿠헨은 알렉스의 몸 상태를 생각해서 오늘 왕성에도 안 데려오려고 했다. 왕자님이 알렉스를 보고 싶어 하고, 또 알렉스 본인이 무척 왕자님을 보고 싶어 해서 동행했지만.

    왕성 외에 오늘 들러야 할 곳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공개 처형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행사였다. 바움쿠헨 백작은 솔직히 광장에 사람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모두 영웅의 정의로운 행동을 칭송하고 있기는 했지만.

    찬사는 언제 들어도 귀에 달았다.

    알렉스가 몸을 빼냈다.

    “잡지 마세요. 내 발로 걸을 거예요.”

    “더 앞으로 갈 수 있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바움쿠헨은 놀리듯 말했다. 알렉스는 발끈하지 않았다. 얼굴에 의지가 떠올랐다.

    “갈 수 있어요.”

    “그래. 너한테 가장 즐거운 볼거리잖아?”

    바움쿠헨은 축제라도 맞은 듯 들떠 있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압송되는 죄인들에게 돌을 던지러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알렉스일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어디서 바위라도 주워 올 걸 그랬군.”

    바움쿠헨이 중얼거렸다.

    사실 돌로 되겠는가? 바위로 단번에 머리를 깨 주지 않고서야.

    나라에 엄연히 법이 있고 관리가 있는데 사사로이 형벌을 집행하는 건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자기 방어란 건 중요하지 않은가. 바움쿠헨은 스스로 상대를 단죄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도 사안이 크지 않았다면 조용히 정리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길 잘했다. 어린아이는 좋은 걸 보고 자라야 하는 법이다. 정의가 공개적으로 집행되는 것 같은.

    알렉스는 처형대를 보고 있었다. 단두대와 장대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멀리서 우우 하는 야유와 고함이 들려왔다. 죄인들이 오고 있었다. 알렉스가 주먹을 쥐었다.

    “꼬맹아, 목말 태워 줄까?”

    바움쿠헨이 물었다. 알렉스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움쿠헨이 어린애 취급하는 건 싫어하더니 어지간히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바움쿠헨은 알렉스를 번쩍 들어 한쪽 어깨 위에 올려놨다. 알렉스가 위에서 꾸물거리며 바른 자세를 취했다.

    바움쿠헨은 아이가 생기면 이런 걸 한번 해 보고 싶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인생은 계획한 대로 안 되는 법이지만…….

    괜찮은 이벤트였다. 공개 처형은 바움쿠헨이 계획한 대로 성황리에 끝났다.

    묶인 죄인들이 돌에 맞고, 고개를 숙이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처형대로 올라갈 동안, 알렉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두대가 죄인들의 목을 뎅강뎅강 자르고, 처형관들이 그 목을 하나씩 장대에 내걸 때에도.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을 빠져나갔다. 바움쿠헨은 알렉스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아하고 있는 거 맞나?

    “내려 주세요.”

    알렉스가 말했다. 그는 약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바움쿠헨은 뒤늦게 알렉스가 겁을 먹은 건가 싶었다. 어린애한텐 너무 자극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애를 상대해 봤어야 할지. 바움쿠헨은 알렉스를 밑으로 내려 줬다.

    어떡하지? 애한테 이상한 거 보여 줬다고 부인에게 등짝을 맞을지도 모르겠다.

    바움쿠헨이 난처해하고 있는데 알렉스가 말했다.

    “아는 사람이 없어요.”

    응? 바움쿠헨은 알렉스를 쳐다봤다.

    “제가 말한 사람들은 잔챙이였던 거죠? 왕자님께 조금은 도움이 됐을 줄 알았는데.”

    알렉스는 자신의 쓸모를 말하고 있었다.

    그가 고발한 원장이나 다른 연락책은 바움쿠헨이 현장에서 잡았다.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려서 처형대에 세우지 못했을 뿐.

    알렉스는 공개 처형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풀이 죽어 있었다.

    “뭐……. 도움이 됐을 거다.”

    바움쿠헨은 달래 보려고 했다. 알렉스는 보기보다 이상한 꼬마인지도 모른다.

    “사람 목은 자르기 어렵나요?”

    “……지금 네 힘으론 어렵겠지?”

    “단두대만큼은 강해지고 싶어요. 단두대는 왕자님께 쓸모라도 있잖아요.”

    알렉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바움쿠헨은 할 말이 없어서 알렉스의 머리를 헝클었다.

    왕자는 어떤 놈을 구한 걸까? 귀엽고 순진한 꼬맹이.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괴상한 걸 거뒀는지도 모른다. 이 괴상한 꼬맹이의 목표는 왕자의 단두대였다.

    이 녀석은 아마 강한 기사가 될 것이다. 이런 독종이 따로 없으니까. 생각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확실한 건 왕자의 안목이 정말 괜찮다는 거였다.

    어린아이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향상심과 약간의 자기 비하는 성장에 도움이 된다.

    알렉스는 괜찮은 기사가 될 것이다.

    * * *

    밖은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개 처형이라는 이름의 축제였다. 이번 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려놓거나 자리를 잃었다.

    왕비 밀라네는 사형을 면한 남자를 내려다봤다.

    남문 경비대장은 평민 신분으로 한 구역의 경비대장까지 출세한 남자였다. 볼품없는 염소수염과 살 없는 얼굴 때문에 초라한 인상이지만, 실력도 괜찮고 운도 있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남자의 가장 뛰어난 점은 엎드려야 할 곳을 안다는 점이었다.

    왕비는 경비대장에게로 걸어갔다. 경비대장의 머리가 밟기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경비대장은 바닥에 고개를 조아린 채 눈을 들지 않았다. 왕비는 이렇게 주제를 아는 사람이 좋았다. 주제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찾기 힘든 법이니까.

    셔벗의 공주였던 밀라네는 열다섯의 나이에 이 나라 비스코티로 건너왔다. 비스코티의 왕은 잘생긴 소년이었는데 왕비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군이 된 왕에게는 연인이 있었다. 그 연인과 헤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왕은 초야를 치르러 온 왕비를 외면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어요.’

    왕비는 그날 이후 왕을 증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왕비는 셔벗에서 온 축복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아직 공주였을 때, 셔벗의 왕인 그녀의 오라비는 ‘비스코티의 모두가 너를 환영할 거야.’라고 말했다.

    왕비는 사랑받는 공주였다. 그녀가 가져온 지참금이 그걸 증명했다. 약소국 비스코티는 늘 외환에 시달리고 있었고, 국경에서 빠져나가는 자금으로 국고는 말라붙은 상태였다.

    왕비는 비스코티에 찾아온 축복이었다. 왕은 왕비를 그렇게 대우해서는 안 됐다.

    어리석은 사람.

    주제를 모르기로는 왕의 연인이 더했다. 왕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만으로 작위까지 받은 그 여자는 자신의 아들을 왕자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 왕자는 자신의 아들보다 먼저 태어나, 1왕자의 칭호를 달았다. 왕비는 자신의 편이라곤 몇 없는 왕성에서 그 치욕을 참아 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왕비에게는 조프리 왕자가 있었으니까.

    그녀의 왕자는 최근 일 년 동안 그녀를 멀리했다. 명확한 이유도 없었다. 그녀가 왕자에게 무엇을 잘못했던가? 왕자는 왜 갑자기 내게 이러지? 그녀의 손길도 목소리도 외면해서 그녀는 미칠 지경이었다. 왕자에게 사춘기가 찾아온 것 같다는 시녀의 위로가 아니었다면 스스로를 다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 왕자를 다그치지 않고 참아 내기를 잘했다. 왕비는 그 보상을 지금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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